slow down, baby a

태섭대만

6






“우편이 도착했는데, 확인해 보시겠어요?”


 대만이 매니저 은하에게서 빳빳한 우편물을 받은 건, 훈련을 끝내고 샤워를 끝낸 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라커룸을 나온 뒤였다. 조금 흠칫했지만, 꽤 오래 기다리고 있던 모양새여서 어디에서 보낸 거냐고 묻지도 않고 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많이 기다렸냐고 물었다. 은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녀석에게 줘도 됐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는 아까 전과는 다르게 세게 고개를 저었는데, 이 반응을 처리도 하기 전에 담백하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직접 받으셔야 되시는 거여서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그러자마자 은하가 빙긋 웃었다. 뭘 물어보고 싶은 건지,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훈련 스케줄 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대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찌푸린 미간을 자연스럽게 편 다음, 눈을 깜빡였다.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없어서 그랬다. 은하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은 알 수 있는 일이 있네.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나 했다.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은하는 이것 역시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뭐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 수 있는 대답이 손에 있었다. 

 은하는 오늘도 수고하셨다는 말을 한 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만은 체육관 출구로 걸어가는 은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다음, 손에 쥐고 있는 우편물로 시선을 돌렸다. 우편물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대만은 손에 있는 우편물을 앞, 뒤로 돌렸다. INVITATION이라는 글자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청첩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였다. INVITATION 외에는 그 어떤 글자도 없는 우편물을 한참 보다, 밀봉되어 있는 종이 틈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살짝 밀어 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벌어진 종이 사이로 손가락을 조금 더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우편물은 아주 쉽게 안에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을 열기까지의 시간과 생각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소가 나온 건 그래서였다. 그러다, 긴장이 되었다. 우습게도.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여태 그렇게 믿고 살아왔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대만의 눈동자 안으로, 하얀 엽서가 보였다. 대만은 조심스럽게 엽서를 꺼냈다. 종이와 종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종이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단어 하나하나를 읽는 동안, 대만의 미간에는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술이 달싹였다가 닫혔기를 반복했고, 혀로 축인 입술이 말랐다가 축축해지기를 반복했다. 심장이 뛰었고, 목이 말랐다. 건물 전체에 에어컨을 가동 중인 걸 아는데,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시원하기는커녕 더웠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좋아해요.’

 어떤 기억이, 비집고 나왔다.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다는 걸 잊고 더플백을 뒤지는 동안, 짧은 욕을 뱉으며 복도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대만이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서 찾았을 때는 엽서 내용을 세 번은 읽었을 때였고, 글자의 마지막에 적힌 어떤 이름에 시선을 고정한 뒤였다.


‘오래전부터 형을, 좋아했어요.’







 종이 위의 활자를 모조리 파괴하는 이름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보지 말라는 듯이.











slow down, baby












 태섭에게 전화를 하려다 말았다. 미국은 지금, 새벽이었으므로. 오른쪽으로 구부정하게 기울인 몸에 무게중심이 쏠렸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를 반복했다. 비집고 나온 기억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쏟아졌다. 거의 봉인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러기에는 그 말을 했을 때의 송태섭이 괘씸했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믿었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만날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가지 않겠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결국에는 갈 것이라고. 오도록 만들 것이라고. 만날 거라고. 그렇게 할, 것이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송태섭은, 이런 놈이었다. 길을 정하면 그것만을 향해 달려가는 놈. 녀석의 미국행만 생각해도 10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거다. 그런 건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 동안 복도에 앉아 있었다. 체육관 건물은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오로지 대만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조용하고 고요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시끄럽다는 것을. 시끄러운 것들은 대부분 이럴 때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언제인지 모르고 싶은 날부터,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면 잊을 수 있었다. 송태섭의 눈빛 같은 것. 제 얼굴을 올곧게 보던 투명한 눈동자나, 제 손목을 잡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나, 살짝 떨리고 있던 손가락 끝 같은 것.

 결국에는 이렇게 될 거면서도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송태섭에 관한 건,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수많은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인터하이. 윈터컵. 졸업. 대학 입학. 송태섭의 미국행. 귀국. 약속. 만남. 국제 전화. 편지.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새벽. ……형. 낮게 속삭이던, 떨리는 목소리. 계절의 변화. 달라지는 눈빛. 말투. 손. 체온,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리를 하면 할수록, 차곡차곡 묻어뒀다고 생각한 것이 두서없이 튀어 올랐다. 거기에 완전히 질린 대만은 지하 주차장으로 힘없이 걸어갔다. 차의 시동을 걸고, 더플백을 뒷좌석에 둔 다음,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맸다.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호흡을 정리하는 동안 깍지를 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두었다. 차 안 온도는 22도. 찬바람이 차 안을 시원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것을 알 수 없었다. 

 좋아해요. 파괴당한 것들 사이를 채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끊임없이.

 음악을 재생한 건 그래서였다. 대만은 운전할 때 음악을 듣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혼자 있을 때는 거의 그랬다. 시끄러운 것이 싫었다. 사람들은 대만이 타인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대만에게도 피곤한 자리와 대화가 있었다. 복잡한 것, 무례한 것, 선을 넘는 것이 싫었다.


‘……갑자기?’

‘오래전부터라고 했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어서 말했어요.’

‘……뭘.’

‘정대만 인생에 이정도 있었으면, 고백을 한다고 해서 나를 내치지는 못하겠구나.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선 긋는 사람이니까.’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야,’

‘형이 여태 사귀었던 사람들을 알아요.’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오는데?’ 

‘형 성격이면 나를 한 대 치든가 아니면, 돌아서던가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못 하잖아.’

‘…당황해서 이러는 건 생각 못 하냐?’


 이런 걸로 따지면, 송태섭은 이 모든 것이었다. 복잡하고 무례하며,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런데 이 선이라는 건, 송태섭이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송태섭은 예민하고, 기민하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으며 유순하고 가끔… 간지러운 점이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알고 있었는데. 

 대만은 볼륨을 높였다. 음악이라도 크게 듣지 않으면, 생각에 잠식당할 것 같았다. 푹 가라앉아서, 마음 같은 것이 생각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좋아해요. 파괴당한 순간 세차게 뛰던 심장 같은 것이. ‘그럼, 내일부터 내 연락 다 끊을 거예요? 말해 봐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다물고 있던 순간에, 한 번 반짝였다가 가라앉는 송태섭의 눈동자 같은 것이.

 맞잡은 손이 너무 뜨거웠다.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 손으로 핸들을 잡았을 때는 욕지기가 나왔다. 태섭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순간과 똑같았다.

 대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비게이션으로 돌아갔다. 알 수 없는 노래 제목과 가수를 보다, 한숨을 뱉었다. 꽤 긴 한숨이었다. 보통 한숨은 답답할 때 뱉는 것이고, 뱉고 나면 조금은 괜찮아져야 하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아서 또 한숨이 나왔다. 

 지금 시간이면 정체가 풀려야 되는데. 대만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느리게 이동하는 차들이 꼭 제 마음 같았다. 꼬리를 무는 차들로 길게 이어진 도로 위에서 마른 얼굴을 손으로 끊임없이 문질렀다. 왼쪽 팔꿈치를 창틀에 대고,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걸 반복하고 있을 때, 음악이 멈추었다. 대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디스플레이로 움직였다. 지도가 사라진 디스플레이에는 송태섭, 세 글자가 있었다.


“…어.”

-어디예요?

“도로. 집으로 가는 길이야.”

-늦네요. 

“어쩌다 보니. …너는. 벌써 일어났냐?”

-네.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누른 것치고는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대만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초대장 받았어요?


 대만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태섭의 숨소리가 들렸다. 저와는 다르게 아주 낮고, 차분했다.


“어.”

-올 거죠? 일정 조정하라고 미리 보낸 건데.

“그런 건 나도 알아. 그런데,”

-형 초대장에만 내 이름 새겼어요. 이 사람이 그 형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다들 형 보고 싶어 해요.


 대만은 낮게 혀를 찼다. 지금 태섭은, 올 시즌 파이널 경기를 끝내고 난 뒤에 했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의 경기 중에서 오늘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예상한 기자에게 그건 아니라고, 고등학생 때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과, 그 사람 중 형(정대만)과 함께했던 농구가 늘 기억에 남아 있을 거라고 대답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약은 새끼. 오도록 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들을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죠.

“그럼 굳이 안 가도,”

-정확하게 말해야 아는 거 아니잖아.


 태섭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대만은 할 말을 잃었다. 둘러서 말했지만,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는 말을 곱씹었다. 태섭은 말이 없었다. 이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대만은 태섭의 숨소리를 들을 것처럼 차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빼면, 차 안은 조용했다. 온 사방이 조용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아까 전에 그랬듯이 속이 시끄러워야 하는데, 그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우습게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시끄러운 것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리어 고요해진 이 순간이 대만을 끊임없이 과거로 데려갔다.

 그래서일 거다. 그날이 떠오른 건. 마이너 리그에 있던 태섭이 메이저 리그로 진출하게 되면서 잠깐 귀국한 적이 있었다. 벌써 2년 전이다. 그때,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셨었다. 기쁜 날이니까 한 잔 정도는 하자고 만난 건데, 한 잔은 무슨, 사케 큰 병을 다 비우고 맥주까지 마셨었다. 

 태섭은 그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실없는 이야기, 농구 이야기, 사적인 이야기. 계속 미국에서 농구할 거냐는 질문에 그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내가 좀 변한 것 같냐고 물었었다. 그때 대만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고, 느리게 술잔을 비운 태섭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말했었다. 

 대학에서 같이 농구를 하던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과 가끔 만나는데, 그러더라고. 내가 좀 변한 것 같다고. 어떤 게 변한 것 같냐고 물었거든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단단해진 것 같대요. (대만은 거기서 더 단단해지면 어떡하냐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하. 그러게. 살아남아서 그런가.

 

-이틀 전에 미리 들어갈 거예요. 그때 잠깐 볼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나, 살아남은 거잖아요. 그러면, 뭔가가 변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일정 빡빡하지 않냐?”

-형 만날 시간은 만들 수 있어요.


 대만은 액셀을 밟았다. 언제 정체된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차가 제 속도 그 이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거리 신호에 멈춘 대만이 짧은 숨을 뱉었다. 강변북로로 빠질 걸 그랬나.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이 순간에 있고 싶었다.


“연락해라. 맞출게.”


 태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대만은 태섭의 대답을 들으면서, 말아 문 입술과 턱을 연신 손으로 매만지며,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고마워요.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뭐가?”

-조금 긴장했었어요.

“…….”

-형이 싫다고 대답할까 봐. 그래서 빨리 일어난 거예요. 자도 자는 게 아니어서.


 대만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한숨을 뱉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태섭의 말대로,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누군가의 좋아한다는 말은, 어떤 힘을 만들어 내는 걸까? 하지만 예전 연애를 생각하면, 늘 이렇지는 않았다. 대만은 누군가의 마음이나 생각을 알아내는데 가끔 애를 먹었다. 알아주지 못해서 서운하다거나,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거냐는 소리도 곧잘 듣곤 했다. 그런데 송태섭은 이상하게, 알 수 있다. 예전부터 그랬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송태섭을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서, 녀석의 예민하고 기민한 성정이 옮은 걸까? 그런 거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이래야 하지 않았을까? 

 가슴 한편이 뻐근했다. 소리를 쳐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묵직함이 집어삼킬 것 같았다. 

 곧, 집 근처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좌회전 후, 단지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정지 신호에 핸들을 크게 돌려 유턴했다.


“한 대 치고 싶은데, 만나야 할 수 있어서.”


 태섭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얼굴은 참아 줘요. 우리 이제 어른이고, 일도 해야 해. 만날 사람도 많아요.

“내가 알 바야?”


이렇게 말해도 너는 나를 안다. 적당한 농담과 진심을 구별할 줄 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태섭을 만나면 늘 편했다. 


-부탁할게요. 

“진정성이 없다.”

-이런 말을 하는 건 형이 유일한데도?


 대만은 헛웃음을 뱉었다. 태섭의 말이 기쁘다. 어이가 없어서 봉긋 솟아오른 볼을 눌렀다.

‘네가 변했다면, 내가 가장 먼저 알았을 거야. 우리는 어쨌거나, 이어져 있으니까. 늘 그랬지.’ 

 갑자기 떠올랐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태섭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그 대답에 태섭은, 느끼한 말을 곧잘 한다고 그랬었다. 연애를 많이 해서 그런가.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새벽 내내 고여있는 이슬을 머금고 있는 잎사귀 같았다. 조금만 툭 건드리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고.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일걸.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너고.’ 

 그 말을 했을 때, 태섭의 귀가 빨개졌다. 옆으로 돌린 고개가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나 혼자 이거 다 마신다. 퉁명스럽게 이야기할 때까지. 빨갛게 익은 얼굴 때문에 취했냐고 물어보는 내내,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때는 그랬었는데. 좋아해요. 이 말을 할 때의 눈은…….

대만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용히 입술과 턱을 매만졌다. 강변북로로 진입하기 위해 운전하는 동안, 태섭은 말이 없었다. 들리는 거라고는, 숨소리. 숨을 고르는 소리는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이 순간에도 어떤 것들이 오고 가는 것을 알았다. 반드시 말로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형.

“어.”


 태섭이 말한대로 우리는 이제, 어른이니까. 옛날의 그 풋내기가 아니었다. 


-곧 만나요.


강변북로로 진입한 차가 자연스럽게 차선을 이동했다. 잠시동안 가만히 있던 대만은 대답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럼에도 이어져 있는 어떤 것이 대만의 심장을 끊임없이 두근거리도록 만들었다. 이 두근거림이 싫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세는 날짜와 숫자, 태섭이 귀국했을 때 늘 하던 어떤 과정이 끊임없이 두근거리도록 만들어도, 대만은 기꺼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것을 손 안 가득 품었다. 손가락 끝을 타고 혈관을 헤집는 내내, 심장박동이 자연스럽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내내 대만은 입술을 깨물지도,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창문을 내렸다. 곧바로 차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은, 오후 내내 뜨겁게 작열하던 태양을 머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태섭이 떠올랐다. 여기보다 훨씬 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농구를 하는 태섭이, 대만의 머릿속에서 움직였다. 

그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곧 만나요. 그 말에, 뒤늦은 대답을 하듯이. 지금 태섭이, 손에 쥔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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