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down, baby b

태섭대만

8






  시간이 흐른다. 여느 때와 똑같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변한 게 없었으니까. 일어나는 것, 먹는 것, 하는 것, 가는 곳, 모두 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고, 오늘 같은 내일이었다. 

 훈련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대만은, 간단한 저녁을 먹은 뒤 프로틴 음료를 마셨다.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진 거실에서 창밖을 쳐다보며, 다 마신 컵을 손에 쥐고 서 있다. 이것 역시, 똑같았다. 이 집으로 이사한 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시간만 다를 뿐 늘, 똑같았다. 똑같지 않은 건 생각 정도인지도 몰랐다. 변하지 않은 것 중에서 유일하게 변하는 건 생각과 느낌이다. 이런 것까지 똑같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생각이나 느낌에 초연하다.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 대만은 여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태섭이 말한 ‘곧’ 이라는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대만은 같은 구단 선수들이나 지인들과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와 농담, 가끔 부친이나 모친과 통화하며 알게 되는 주변이나 세상일 같은 것을 오래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외부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성격이라고 해야 할지, 성정이라고 해야 할지도 헷갈려했다. 그럼에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것으로 나를 증명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대만이라는 사람이 가진 어떤 증명은 농구로 모두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여태 그렇게 지내왔다. 그랬기에,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달라질 수 있는 생각과 느낌도, 크게 널뛰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적이 없던 시절도 있다는 것을. 바래고 흐려진 어떤 기억들 위로, 강렬하고 반짝이는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 송태섭이 있다. 그래서인지 송태섭을 생각하면,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문제는 이 감정이 최근 자주 치솟곤 했는데 그건 모두 다 태섭이 말한 빌어먹을 ‘곧’, 이라는 날 때문이었다. 

 후. 짧은 숨을 뱉은 대만은 몸을 돌렸다. 부엌 싱크대에 다 마신 컵을 둔 뒤, 물을 틀었다. 넘쳐흐르는 것을 보다 물을 끄고, 고개를 젖혔다.

 부정하려야 할 수가 없다. 송태섭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있다.

 태섭에게서 연락이 없다. 이런 적이야 많았다. 자주 연락을 한다거나, 그래야만 한다거나, 어떤 날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이, 송태섭과의 사이에서는 없다.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이런 건 연인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송태섭과는 연인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건데, 좋아해요. 이 말 때문인지, 어떤 선을 넘어갔다는 느낌이 대만을 묘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태섭의 귀국. 예전에는 태섭이 귀국 소식을 늘 미리 알려주었다. 날짜, 요일, 시간. 그럼에도 대만이 맞추었냐면 그건 아니었고, 태섭이 맞추었다. 대만이 맞추겠다고 해도 태섭이 그렇게 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귀국을 하는 게 고작 저를 만나러 오는 것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태섭이 맞추겠다고 하면 캘린더에서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고, 그 날을 태섭에게 알렸다. 이 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뉘앙스가 느껴진 건지는 태섭만이 알겠지만 적어도 대만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다. 네가 맞추겠다고 했잖아. 뻔뻔하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태섭의 연락이 없어도 만날 그날에 대한 준비를 미리 했다. 칵테일 파티에 입을 슈트를 찾아보고, 명품 브랜드에서 열리는 칵테일 파티는 처음이라서 검색도 해보았다. 어떤 분위기 인지,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런 것들을 알고 싶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행사가 처음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프로 농구 선수로 데뷔한 뒤, 감사할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훈련 스케줄에 무리만 없다면, 저를 찾는 행사는 대부분 다 참석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걸 알면서도 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정신을 차린 뒤 인터넷 창을 보면 열어 놓은 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탭에는, 대만의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런 자리에 송태섭과. 이런 사람들과 송태섭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송태섭은.

 그러고 보니, 연락해라, 맞출게. 이 말을, 처음 했던가.


“어, 은하야. 서호 연습 끝났어?”


 은하의 전화였다. 대만은 뒷머리를 만지며, 다시 거실로 걸어갔다.


“네가 고생이 많았네. 감독님은. 그래? 아니, 나 밥 먹었어. 다음에 같이 먹자. 같이 있는 거 아냐? 통화 가능해?”


 은하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괜찮다고 말했다. 대만은 짧은 숨을 뱉은 뒤,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까 전보다 가로등 불빛이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네가 전에, 훈련 일정 조정해야 하면 말해달라고 했었지.”


 말을 할 때는 주변이 시끄러운 것 같았는데, 끝날 때가 돼서는 조용해졌다. 대만의 두 눈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거 말씀하시려고 한 거예요?

“최대한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많이 늦었죠. 초대장 온 지가 언젠데요.


 대만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언젠가 팀 막내 민오가 우리 구단에서 가장 T는 채은하 매니저일 거라며 입술을 댓발 내민 적이 있었다. 일 잘하고 싹싹한 걸 서운하게 생각하는 네가 문제 아니냐고 한 적이 있는데, 왜 그날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감독님이랑 같이 있으니까 말씀드리기 좋은 타이밍이긴 하네요.

“8월 22일에 훈련 세 시간 정도만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은하는 말이 없었다. 이 침묵이 묘하게 거슬릴 때쯤, 그걸로 괜찮겠냐는 물음이 나왔다.


“어. 왜?”

-슈트 입으셔야 되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시잖아요. 구단으로 오는 우편물은 제가 기본적으로 다 확인하고 드리는 거.

“어.”

-안에 내용물을 본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아무튼,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명품 브랜드에서 오는 우편물이 처음이라서요.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었다. 저 역시, 이게 뭔지 몰라서 한참 동안 보기만 했으니까. 

 그 뒤, 뭐라 덧붙이려던 대만은 은하의 말에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그날 입는 슈트에 맞춘 메이크업 받아야 할 거다, 메이크업 할 수 있냐 그건 아니지 않냐, 그래도 그런 건 송태섭 선수가 대충 알아서 해줄 것 같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송태섭 선수. 잘 지내요?

“어? 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섭이 그 브랜드의 엠버서더가 된 건 농구선수뿐만이 아니라 패션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잘 아는 일이었지만, 이 타이밍에 태섭이 잘 지내냐고 묻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 이 팀으로 이적한 뒤, 그 송태섭이랑 밥이나 술 좀 먹어보자는 사람들 덕분에 같이 만난 적은 있어서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니 당연하다지만.


“그런데 넌 그런 걸 어떻게 잘 알아?”

-좋아하는 연예인이 직업별로 많아서요.

“아….”

-집에 특이한 택배 도착한 건 없어요?

“특이한 택배?”

-없나 보네요.


 또 웃는다. 대만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웃음인데,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은하의 웃음이 긴 듯, 짧게 이어졌다. 이 웃음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아무튼. 그런 건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말하는 은하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린 게 무색하게,


-훈련 스케줄 바꿔놓을게요. 마침 감독님이 서호 선수 특훈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셔서 바꾸면 될 것 같아요. 이틀 비울게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태섭 선수한테서 연락, 없어요?


 어디론가 빠져들어 간다. 은하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끊은 건 맞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연락, 없다. 곧 만날, 녀석에게서. 이틀 전에 먼저 들어오겠다던 놈이 언제, 어디로 오겠다는 말이 없다. 이 생각은, 아까 전까지 하던 것.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이 생각에 이르렀다. 이게 억울하게 느껴지는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만이 한 건 그날만의 준비뿐만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보거나, 날짜를 보거나. 시간을 재고, 세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했다. 이런 건, 그날이 오기 전, 태섭을 만나는 날에 대한 준비였다. 인정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다. 그러기 싫어서 부정하는 건 아주 오래전에 했다. 송태섭이 말하는 어른이 되기 전. 고등학생 때인지, 대학생 때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시간에. 

 그런, 건데.

 대만은 소파에 누웠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응시하듯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꾸 억울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보려는 건지 아니면, 이런 마음 때문에 계속 생각나는 송태섭 때문인 건지. 확실한 건, 송태섭 때문에 억울하기는 싫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송태섭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다. 그런데 왜 내가 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은 거야? 이런 건,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는, 내 생각을 하고 있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이 하고 있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눈을 깜빡인다. 잘못 들은 건 아니다. 좋아해요. 그 말로 파괴당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관계 같은 것. 그럼에도 한 대 치거나, 돌아서지 못하고 곁에 두었기에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여지 같은 것. 이건 송태섭이 아닌 정대만이 만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너를 내치지 못해. 왜냐면……,


“…….”


 손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데, 확인하고 싶다. 이런 감은 대부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관계에 놓인 사람에게서만 느꼈다. 지금 저에게 있어 그런 사람이란, 송태섭, 단 하나였고.


-형.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화가 치솟았다. 그걸 꾹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그러기가 무색하게 말이 튀어나왔지만, 참으려고 애는 썼다. 그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형한테 전화하는 새끼.

“말장난하지 마, 장난 아니니까.”

-무슨 일 있어요?

“어.”

-뭔데요?


 태섭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이 목소리 때문에, 대만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나 만날 시간은 만들 수 있다고 한 거 너야. 알지?”

-…네.

“너한테 맞춘다고. 연락하라고 그랬고, 내가. 이것도 알지?”

-응.

“그런데 왜 연락이 없어?”


 대만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엇이 이렇게 만든 건지는 평온에서 방향을 튼 심장박동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너만 바쁘냐? 나도 바빠. 내가 시즌 아닐 때 어떻게 지내는지는, 너도 잘 알아.”


 이건, 선을 넘는 거다. 이상한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 투정에는, 왜 예전처럼 나에게 맞추지 않아? 옹졸하고 치졸한 감정이 있다. 

 대만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태섭은, 말이 없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잘도 대꾸하던 녀석이, 침묵을 지킨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이 세상에서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며, 너 역시 그렇다는, 누가 들으면 애틋하다못해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말을 한 그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한 건지, 안다. 그러면, 다른 말을 해야 되는데.


-기다렸어요?


 이 말에는, 다른 말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장난 아니라고 했어.”

-형은 화를 내네. 

“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대만은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되묻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인터하이. 윈터컵. 졸업. 대학 입학. 송태섭의 미국행. …, …, …, …, 편지. [편지 쓰려니 좀 낯간지러워서 다음에는 전화 한다. 기다리고 있어라.] 번호를 누르지 못하는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새벽. ……형. 낮게 속삭이던, 떨리는 목소리.


-오후 5시 50분에 도착해요. 


 긴 숨을 들이마신 태섭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관계자 한 명이랑 같이 가게 됐어요. 공항으로는 오지 않아도 돼요. 미안해요. 조정이 안 됐어요.


 그렇게 말하는 동안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호텔로 와줄 수 있어요? 파티가 열리는 호텔에서 묵을 거예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호텔 야경이 좋다면서요. 바(bar)에서 술 한 잔 마셔요.


 마른 얼굴을 연신 쓸었다. 몇 번이고 달싹인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고작 한 마디였다. 

 그래. 그러자. 

 이 고작인 말이 하찮았고, 견딜 수 없었으며, 참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좋아해요. 이 말을 들은 뒤, 물었어야 했거나, 했어야 할 말을 이제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태섭의 연락이 온 건, 막 주차를 끝낸 뒤였다. 대만은 차의 시동을 끈 뒤, 느린 눈으로 문자를 읽었다. 이제 막 관계자와 헤어졌고, 바(bar)로 가고 있다고. 나도 곧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낼 때쯤, 적당한 걸로 주문해도 되냐는 문자가 왔다. 보내려던 문장을 지운 뒤, 그러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도 곧 올라간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보내지 않았다. 대신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긴 숨을 내뱉었다.

 피곤하다. 진심이었다. 저 자신이 이렇게 감정에 휘둘릴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그럴 수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끝냈다고 생각했고, 판단했으며, 믿었다. 이런 믿음조차 송태섭에게 파괴당한 건 아니었다. 확신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데,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송태섭을 생각하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꾸, 옛날을 생각한다. 오늘에조차 있지 못한다. 송태섭에게만 그렇다. 이런 건 너무, 불공평하다. 송태섭은 이러지 않을 것 같다. 확신한다. 그렇게 믿어야만, 이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무엇을 견딜 수 없는 건지도 모를 것에서 발 하나라도 뺄 수 있다. 그럼에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서 문을 잠그고, 키를 주머니에 넣은 뒤, 레지던스가 아닌 호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1층의 바(bar)로 올라가는 동안, 고도의 차이로 멍해지는 귀가 차라리 멀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 한편이 꽉 막혀버렸으므로.


“차 많이 안 밀렸어요?”

“어.”


 태섭은 바(bar)의 구석진 자리에 있었다. 와인과 플래터가 준비되어 있었다. 메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건 뒤, 자리에서 일어서는 태섭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향수 냄새가 났다. 지금의 태섭처럼 낮고 묵직한 숲 향기였다. 아니, 그것보다 더 진한, 숲 안에 있는 나무 향인가……. 저도 모르게 목덜미에 코를 갖다댈 뻔해서 태섭을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다. 태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까 전에 저가 그러고 싶어 했듯이, 어딘가에 얼굴을 묻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향수를 뿌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러고 있는 태섭이, 그런 걸 모를리가 없었다. 정작 태섭에게서는 방금 막 뿌린 것처럼 진한 향기가 났지만, 저는 그러면 안 됐다. 너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알면 안 돼. 

 뭔가, 삐뚤어졌다. 대만은 이 느낌을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송태섭을 떼어내야만 한다.

 태섭이 얼굴을 묻고 있는 어딘가가 심장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동안을 이렇게 있어서 점점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쿵쿵대며 뛰는 건강한 심장이 태섭의 생각으로 흘려들어 가면 안 됐다.


“재회의 인사는 여기까지 하자.”


 목소리 톤이 어땠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마주친 태섭의 눈은 풍기는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뭘 그렇게 보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태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음 트레이 안에 있는 와인을 꺼냈다.


“형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는 화이트 와인 좋아하죠.”

“기억하고 있었냐?”

“네.”


 태섭이 웃었다. 꽤 뿌듯하다는 것처럼 보여서, 대만은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짓궂은 것처럼 보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태섭이 잘 보여주는 얼굴 중 하나였다. 물티슈로 손을 계속 닦았다. 하도 닦아서 축축한데,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태섭이 짧게 와인 설명을 했다. 아까 전에 바텐더가 말해준 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인 뒤,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잔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태섭의 눈동자와 간간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동자가 고정됐다. 그때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절반 정도의 와인을 채운 뒤 저에게로 병을 넘기는 태섭에게 손을 뻗었다. 태섭의 손가락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한 뒤, 병의 아래쪽을 잡았다. 이러면 닿지 않을 줄 알았는데, 태섭이 병에서 손을 떼자마자 손가락 끝이 닿았다. 고의적인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태섭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시선 역시, 그랬다.


“비행기 연착은 안 됐냐?”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기를 빌었다. 이런 걸, 빌어야 할 일인 건지를 생각하는 게 기가 차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네.”

“이 호텔에서 묵어?”

“한국에 있는 동안은요.”

“언제 출국해?”

“일요일.”

“정말 비지니스로 온 거네.”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힐끔거리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태섭은 옛 얼굴을 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곧 여유 넘치는 얼굴로 빙긋 웃기나 했다. 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섭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정확히는, 그 시간 동안의 정대만이. 저와는 다르게 온갖 여유란 여유는 다 부리고 있는 것 같은 송태섭. 정대만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송태섭. 


“그래도, 이런 시간은 만들 수 있어요.”


 정대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건방을 떠는, 송태섭.


“고마워서 황송하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네가 마음에 안 들어. 네가.”

“내가? 왜?”

“아무것도 묻지 마.”


 대만은 잔을 들었다. 묻지 말라는 데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저 얼굴이 꼴 보기 싫어서 술을 마셔야만 했다.


“보고 싶었어요.”


 저 한마디에 화끈거리는 얼굴에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난 별로.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웃기나 하는 저 얼굴을 기억하지 않아야만 했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늘 그랬듯이, 실없는 이야기, 농구 이야기, 사적인 이야기. 이런 것들에, 여기까지 오면서 한 생각이 사라졌다. 태섭이 귀국하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도. 와인은 대만의 취향에 딱이었고, 샤퀴테리 역시, 맛있었다. 점점 바닥을 보이는 병을 흔들면서, 사이좋게 와인을 나눠 마셨다. 마주 보고 있던 태섭이 대각선에 있는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가까워진 거리는 시선 역시 그렇게 만들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마주치는 태섭을 보면서, 대만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뜨겁다. 그게, 제 체온 때문인지 아니면, 태섭의 시선 때문인지 분간이 안 갔다. 


“이렇게 마셔도 되냐?”

“왜 물어요?”

“그냥 온 거 아니고, 비지니스로 온 거잖아. 그러면, 몸 관리해야 하지 않나?”


 태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신기해요.


“뭐가.”

“그냥 하는 말인데, 왜 다정하게 느껴지지.”

“…놀려?”

“설마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흐음…. 짧은 숨에서, 옅은 와인 냄새가 났다. 대만의 미간이 알 듯 모르듯, 구겨졌다. 그 순간, 태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들 멍청해서 다행이네. 

 대만의 미간이 보란 듯이 구겨졌다. 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옛날의 송태섭은 하나도 없는, 선은 부드럽지만, 날렵한 얼굴. 대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쫙 편 손바닥이 태섭의 얼굴 앞에서 멈추었다. 저 얼굴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만의 손에 가려졌다. 그럼에도 손가락을 펼치고 있어서 태섭의 눈은 보였는데, 그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옛날의 송태섭이 보이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고 싶어서 손을 내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완전히 내렸을 때 보이는 얼굴은, 아까와 변한 것은 없는 송태섭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말아 문 입술 사이로 나온 혀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축축한 입술이 보였다. 

 저 입술을, 알고 있다. 본 적이, 있으므로.

 태섭은 아까 전에 그랬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러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툭. 툭툭. 뭔가를, 말하는 것처럼.


“취했나….”

“이 정도에, 설마.”

“큰일 났네.”

“뭐가.”


 송태섭인지, 정대만인지. 주어를 알 수 없는 말이 오고 가는데도 무엇을 말하는지, 묻지 않는다. 시끄러운 음악. 이야기. 주문. 잔이 부딪치는 소리. 이것들이 모두, 묻지 않은 것에 사라졌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태섭과 시선을 마주 보던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 한강을 포함한 서울 전역이 보였다. 소문대로, 야경이 볼만했다. 태섭이 어느 룸에서 묵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룸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만약에 지금, 이 야경을 혼자 보았더라면 같은 생각을 했을까. 이런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이 질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른 세수를 하도록 만들었지만, 방금 전까지 보던 것 역시 어두워서인지 딱히 도움은 되지 않았다. 


“피곤해요?”


 손을 내렸을 때,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있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지금부터 송태섭에게 하는 어떤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이 오랫동안에는 지금 태섭에게 휘두를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었다. 미래. 이것을 확신한다면, 자꾸 옛날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송태섭을 부술 수 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태섭이 다행이라고 말하며, 잔을 들었다. 제 몫의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혔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와인을 마시는 것도 잊고,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태섭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잔을 내려놓고, 혀로 축축한 입술을 핥은 뒤, 느리게 깜빡이는 눈도, 쳐다보았다. 이 모든 것이 느린 듯, 빠르게 지나갔다. 

 어렴풋한 느낌이 확신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늘 그랬듯, 숨을 가다듬도록 만들었다. 어떤 일에 확신이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치고 들어가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정대만이 태섭의 앞에 기지개를 켰다. 여태 대만이 알고 있던 정대만이었고,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 모습이었다.

 야경을 보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꽤, 오랫동안. 대만은 피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 할 말,”

“정대만 선수. 맞으시죠.”


 대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욕지기가 나올 것 같은 걸 삼키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송태섭 선수 한테는 인사 드렸습니다. 바텐더 케이 입니다.”


 태섭이 어깨를 으쓱였다. 농구를 좋아하신대요. 짧은 대답을 덧붙인 다음 올리브 한 알을 먹는 태섭을 쳐다본 뒤, 꽤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케이를 쳐다보았다.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국내 농구 선수 중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하하. 네.”

“그런 의미에서, 위스키, 좋아하십니까?”

“못 마시진 않습니다.”

“한 잔 서비스로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 송태섭 선수도 함께요.”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아까 전처럼 어깨만 으쓱였다. 애매한 제스처에 미간이 구겨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케이가 그렇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케이는 온더락 잔을 두 사람 앞에 놓은 뒤, 위스키를 채웠다. 위스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는 내내 대만은 팔짱을 끼고 있는 태섭을 힐끔거렸다. 


“대만 선수님 경기 이번 시즌에는 꼭 성공해서 가보겠습니다.”

“오셔서 보시면 더 재미있을 겁니다.”

“잘 알죠. 그런데, 그거 아시죠. 티켓팅 장난 아닌 거.”

“하하. 그렇습니까?”

“그 이유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는 선수님께서 모르면 곤란합니다.”


 태섭을 힐끔거리던 대만은 마지막에 한 케이의 말을 들은 뒤에는, 대놓고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올라간 왼쪽 눈썹, 삐뚜름한 입꼬리, 조금 튀어나온, 입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여유 넘치던 송태섭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웃는 얼굴 실제로 보니까 좋네요.”


 태섭의 눈썹이 조금 더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을 때는 더 그랬고, 태섭 역시 케이와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는, 입꼬리 한쪽이 어색하게 올라갔다. 대만은 이 모든 것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 때 태섭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주먹이 올라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태섭은 알까. 지금 어떻게 인사하고 있는지.

 케이가 자리를 떠난 뒤, 자리에는 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태섭은 자리에 비스듬하게 앉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은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대놓고 보고 있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여전히 삐딱한 자세를 고수한다. 

 시위하는 거야, 뭐야. 

 이 생각이 들자마자, 발가락 끝부터 다리를 타고 천천히 올라오는 어떤 찌릿함이, 태섭에게서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대만의 입꼬리를 계속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귀여운 송태섭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이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거야?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질투. 라는 걸 알아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너는 질투가 일종의 독점 욕구라는 걸, 모르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럴 수 있는 거야?

 대만은 케이가 준 위스키 잔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마자 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보자마자 크게 웃을 뻔했다. 그걸 꾹 참고, 잔을 들었다. 긴 숨을 들이마신 태섭이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주머니에서 오른손 하나를 뺀 다음, 잔을 들었다. 

 어떤 불빛인지 모를 것이, 잔이 부딪치자마자 반짝였다.

 대만은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위스키를 마시는 태섭을 쳐다본다. 똑같다면, 똑같다. 목울대가 연신 움직이며 위스키를 삼키는 동안에도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 시선과 눈빛에서, 말을 읽어낸다.

 이건, 네가 원하는 걸 보는 걸까 아니면,


“룸에서 한 잔 더 해도 되냐?”


 내가 원하는걸, 보는 걸까.

 탁. 테이블에 잔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태섭이 자세를 고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의자에 걸어둔 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걸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만 봤고, 태섭의 손에 든 계산서를 빼앗았으며, 케이의 시선을 무시했고, 정중하게 계산했다. 

 호텔 룸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태섭은 조용했다. 지금 태섭이 어떤지 모르고 싶었지만, 이 호텔에 있는 것들은 지나치게 반짝였고,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만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81층으로 오는 동안 엘리베이터 속도가 빠르다는 걸 경험했으면서도, 지금은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주머니에 있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쥐었다, 폈다 하고 싶은 걸 참았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태섭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녀석이었기에,

 들키면, 안 됐다.

 바(bar)에서 나오는 음악이 조그맣게 들렸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81과 가까워지자마자, 태섭이 걸음을 옮겼다. 대만은 저와 나란히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태섭을 엘리베이터 문으로 쳐다보았다. 태섭이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고,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이 두 사람을 담았다. 

 거울 속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이 열렸는데도 들어가지 않는 송태섭을. 어느새 여유로워진 송태섭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턱짓으로 안을 가리키고. 그 얼굴을 보며 들어가자마자 걸음을 움직인 뒤. 주머니에서 절대로 빼지 않을 것 같은 손을 꺼내어 카드키를 태그하고. 98이 적힌 버튼을 누를 때까지.

 대만은 태섭이 뺀 손을 다시 넣지 않고 뒤로 뻗은 뒤, 손잡이를 잡는 손등에 굵은 핏줄이 튀어나온 걸 본 뒤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건, 긴장을 풀기 위한 송태섭의 습관.


“왜 웃어요?”

“아니야. 그냥.”

“알려줘요.”


 나는 들키지 않아도, 너는 모든 것을 들켰으면 좋겠다.

 

“봐서.”


 그래야 네가 마음에 들 수 있어. 그럼 알아? 내가 조금 더, 솔직하게 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