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태섭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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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은 안다. 태섭의 첫 연애 상대는 태섭보다 다섯 살 연상인, 당시에는 신인이었고 지금은 대스타가 된 어떤, 배우라는 것을. 그 사람과 2년 정도 사귀었다는 것도, 헤어지고 1년 뒤에 새로운 연애를 해서 오래 사귀었다는 것 모두, 알고 있다. 사귀면 으레 하는 것들은 스킨쉽이기 마련이어서 저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을 때도 그랬듯이 태섭도 그랬으리라, 막연하게 생각만 했다. 제가 아무리 그 대단한 송태섭의 첫사랑이라도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것이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증명해야만 하는 숙제같은 것. 그래서, 지나간 사람과의 스킨쉽과 관계의 깊이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야, 속 좁게 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건데, 그럼에도 태섭은, 그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내가 처음이 아닌데.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내 얼굴을 잡고 있는 손이 조심스러운지,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떨어질 수는 없다는 것처럼 구는지 왜, 새끼 강아지처럼 덜덜 떨고 있는지 그 사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굴었는지. 



“…무슨 생각 해요?”



 대만은 안다. 태섭이 왜 애달픈 눈으로 쳐다보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첫사랑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저리듯이 태섭 역시, 그럴 것이라고. 너의 첫사랑인 내가 네 앞에 있고, 완전한 사랑으로서 현재진행형이 되었다는 건 아마도 벅차오르다 못해 가끔, 믿을 수 없는 것일 거라고. 태섭이 안다면 오만하다는 말을 해도 인정할 생각이, 키스를 하다 말고 제 얼굴을 살피는 태섭을 보면서 들었다. 아무 말 없는 대만을 어쩌지 못하는 태섭이 허리를 끌어 안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대만은 제 옷깃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태섭의 뒷덜미를 만지며,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조용히 숨만 내쉬고 있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태섭은 여전히 애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변한 게 있다면 조급해 졌다는 것. 1초도 뗄 수 없다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몇 번이고 흔들렸다. 이럴 때는, 태섭을 진정시키는 게 좋았다. 태섭의 미국 집에 오자마자 시작한 키스를 다시 시작해야 할 타이밍이 있다면 지금인 것 같았다. 

 엄지 손가락으로 태섭의 입술을 문질렀다. 곧바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엄지 손가락이 사라졌다. 그 손을 물고 빨면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눈이 여전히, 조급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다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집요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보면서 느린 숨을 뱉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 얼굴을 비비는 꼴이, 사랑해 달라는 것처럼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제 얼굴을 붙잡는 손이 뜨거웠다.



“왜 웃었어요…?”

“그냥.”

“그냥 같은 거 없어요.”

“네가 좀… 귀여워서?”

“내가… 귀여워요? 그게… 좋아요?”

“귀여운 게 좋은 게 아니라 이건, 당연한 거야.”

“뭐가요?”

“아무것도 안 해도 귀엽게 보이는 거. 좋아하면 당연히 그렇게 보이는 거잖아. 넌 안 그래?”



 제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빤히 보는 태섭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쵸옥- 하는 소리와 함께 살짝 감았던 눈을 뜬 태섭이 다시 대만을 빤히 쳐다본다. 태섭의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 눈을 보고 있던 대만은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 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가끔 아무 말 없이, 미동도 없이 무언가를 빤히 보고 있는 태섭의 뒷모습을 볼 때는 어느 정도의 깊이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볼 수 있는데도 모르겠다.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도리어, 아무것도 물어볼 수가 없다. 그저, 가라앉은 눈을 쳐다만 보았다. 태섭의 시선이 저에게 머물러 있으니 아마도, 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형.”

“어.”

“내가…”

“…….”

“내가… 잘할게요….”



 태섭의 말이, 키스를 할 것처럼 시선을 내리는 시선이, 뜬금 없는데, 뜬금 없지 않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을 때면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날이 생각났다. 제 얼굴을 빤히 보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주먹을 쥐고 덜덜 떨다 두 팔로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안던, 제 앞에서 솔직하게 구는 송태섭을 처음으로 본 날.

 내가, 내가 더 많이 좋아해요… 선배, 내가, 내가… 내가 많이 좋아해요 내가… 잘할게요…… 

 우주를 준 것도 아닌데 그 이상의 것을 얻은 것처럼 황홀해하던 그 날의, 송태섭.

 입술이 닿자마자 제 등허리를 붙잡고, 훑으며, 몸을 붙이는 태섭이 집요하게 혀를 엮으며 달뜬 숨을 뱉었다. 조금은 빠르고, 빨라서 서툴어지는 키스를 부드럽게 만든 건 대만이었다. 태섭의 얼굴을 붙잡고, 엄지 손가락으로 볼을 만지면서, 천천히 숨을 쉬고, 뱉고, 점막을 훑도록 만들고, 혀뿌리까지 만지고,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빨도록 만들었다. 태섭의 숨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여유롭게 대만의 혀와 입술을 빨고, 깨문다. 그런데도 제 옷깃과 등을 잡고 있는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있어서 대만은 슬쩍 눈을 떴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키스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조금은 빨간 볼도. 달아오른 귀도. 그래서인지, 입술을 벌릴 때마다 쏟아지는 뜨거운 숨도 붉게 물들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키스를 할 때 누군가를 보는 게 취향은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키스에 열중하던 눈이 살짝 떨리는가 싶더니, 속눈썹이 조금, 흔들렸다. 속눈썹에 어떤 소원이 내려 앉은 걸까. 대만은 파르르 떨고 있는 속눈썹을 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지금 키스를 하고 있는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송태섭에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송태섭이 어떤 걸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나에게 바라는 거면 뭐든 다 해줄 수 있으니까. 송태섭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아니, 사실은, 

 무엇이든 좋으니까. 그 어떤 것도 좋으니까 내가, 송태섭의 소원이 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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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떨어져 있는 게 현실 같고 함께 있는 게 꿈인 것 같다.

 태섭은 조심스럽게 대만의 눈썹과 코, 입술을 만지며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대만의 옆에서 눈만 깜빡였다. 미국에 온지 며칠이 지나도 시차적응을 못 하더니, 이제야 몸이 적응을 시작한 것처럼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된 것처럼 편하게 자는 대만을 보는 게 좋았다. 침대에 오래 누워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옆에 대만이 있으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죽이는 일이 좋은 건 아마도, 정대만이 유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저에게 있어 유일한 것의 이유를 많이 가져갔는데도 아직까지 더 가져갈 것이 남아있는 평온한 욕심쟁이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커튼을 걷자마자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보다 간단히 씻고 나와 핸드폰을 켰다. 대만과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핸드폰을 아예 꺼놨었다. 켜자마자 쏟아지는 연락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너 애인 왔다고 핸드폰 끄는 거 습관 된다고, 나 사고라도 나면 올 사람 너 밖에 없으니까 고치라는 팀메이트의 문자에는 저항없이 웃음이 나왔다. 누구보다 마당발인 녀석이 하는 헛소리에는, 그토록 애지중지 한다는 대만을 보고 싶다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태섭은 그걸 가볍게 무시했다. 나도 아까워 죽겠는데 네가 왜.

 SNS에는 이미 파파라치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태섭은 한숨을 뱉으며 소파 팔걸이에 걸터 앉았다. 대만이 공항에 입국 했을 때부터 초단위로 찍혀 있는 사진에는 #714 라고 적힌 해시태그 하나만 있었다. 마치 짠 것처럼, 모든 사진이 그랬다. 대만과 포옹을 하는 사진, 캐리어를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대만의 손을 잡는 사진, 차에 캐리어를 싣는 사진,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사진,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차에 타는 대만의 사진…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태섭이 NBA에서 자리를 잡으며 몸값을 불리며 유명해질 때마다 거의 절차처럼 달라붙는 파파라치가 늘어날수록 그들을 그림자 취급하는 거에 능숙해졌다지만 대만 역시 그럴까 생각하면, 아닐 것 같았다. 한국에는 파파라치가 없으니까 이렇게 나노단위로 사진을 찍히는 건 저를 만나러 미국에 왔을 때 뿐일테니.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숨겨야 했나. 그럴 수는 있나, 정대만을 상대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숨겨야 했던 짝사랑일 때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대만이 송태섭을 사랑한다. 아주 오랜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대만이 빗장을 열어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내가 너무,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데도 가끔 불안했다.

 


“태섭아……”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일상이 숨막힌다고 하면 어쩌지. 가끔 문 밖만 나가도 찍히는 사진이 싫다고 하면 어쩌지. 이런 것들이 신경쓰인다고 하면 어쩌지 그래서, 시들어가면 어쩌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배를 문지르며 나오는 대만에게 달려간 태섭은 아직 잠이 덜 깨서 따끈따끈한 몸을 껴안았다. 잘 잤어요? 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대만이 하품을 하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고 숨을 마시는 동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태섭은 눈을 감았다. 이 손길을 세포 하나하나에 새기고 싶었다. 

 잘 들어. 정대만이 나를 사랑해. 그러니까 불안 너는 나대지 마.



“어제 검색한 시리얼 먹어 볼래….”

“마트 다녀올게요.”

“……갔다 온다며.”

“…….”

“이러다가 언제 가려고. 응?”



 눈도 못 뜨고 있던 대만은 제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다 물고 빨기 시작하는 태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쳐다보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그런데, 깨무는 입술이 자꾸만 간지럽게 만들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삽입은 끝까지 하지 않고 그저 깨물고, 핥고, 물고, 빨기만 했다. 내가 송태섭의 인간 도화지야 뭐야. 이게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른다. 입술이 닿는 족족 빨개지는 살이 좋다고 맑게 웃는 얼굴에 비해 손과 입술을 그렇지 못하게 움직이던 어제의 태섭이 지금과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조금… 진지하다는 거?



“태섭아.”

“…네.”

“마트 같이 갈까?”

“집에 있어요. 혼자 갔다 올게요.”

“그럼 언제 갈 건데? 나 배고파.”

“…….”

“…얼굴 좀 봐.”



 태섭의 얼굴을 붙잡고 억지로 제 품에서 떼어냈다. 대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를 쳐다보고 있는 눈이 아주 그냥… 촉촉하다 못해 건드리면 축축해질 것 같았다.



“왜.”

“뭐가요.”

“눈 왜 이러냐고, 너.”

“그냥.”

“그냥 같은 거 없어.”



 한 말을 되려 받은 태섭이 맥없이 웃었다. 묘하게 힘이 빠진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얼굴을 붙잡았더니, 짧은 숨을 뱉고 제 얼굴을 빤히 본다. 대만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봐야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 테니까.



“…형, 와서. 사진 많이 찍혔어요.”

“그래?”

“SNS에… 알죠. 우리 둘 해시태그.”

“어. 잘 알지. 나도 가끔 검색해.”

“…네?”

“잘 찍는 사람들 은근히 많던데. 넌 내 사진 찍느라 바빠서 같이 안 찍어 주잖아.”

“아니, 그건, 그게 아니라… 말을 하지 그랬어요….”

“답지 않게 당황하네, 송태섭. 재미있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장난 안 해.”



 송태섭 거의 다 넘어왔다. 이제 마지막 한 방. 대만은 태섭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러면 태섭은 거의 맥을 못추렸다. 지금처럼.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대만이 태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알아낸다는 것에 있었다. 태섭이 하는 것처럼 스스로 찾을 때도 있었지만, 이게 훨씬 더 빠르고, 쉬우니까. 

 멍하게 대만을 보다 마른 얼굴을 쓸던 태섭은 대만의 허리를 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웃고 있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솔직하게 말해요.”

“어.”

“아무렇지도 않아요…?”

“사진 찍히는 게?”

“네.”

“송태섭이 너-무 유명해졌다는 뜻이잖아. 미국에서는 아무한테나 파파라치 안 붙는다며.”

“그게… 싫지는 않아요…?”

“난 괜찮은데? 넌 싫어? 그럼 우리 공개 연애 하지 말까?”

“…….”

“그건 싫어?”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안아오는 태섭 때문에 웃음이 터진 대만은 태섭의 어깨를 꽉 안았다. 말없이 제 품에 안긴 태섭이 조용했다. 태섭의 어깨를 토닥이는 동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진지해졌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숨을 꾹 삼켰다.

 네가 하지 않는 말을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는데, 너는 모르는 건지. 이렇게 안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건지. 이러는 주제에 뭘 걱정하는 건지. 머릿속에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 건지. 왜 아직도, 불안해 하는 건지. 



“마트 같이 가.”

“배고프죠. 빨리 다녀올게요.”

“안 돼. 너 혼자 못 가.”



 잠시만 기다려. 태섭은 짧게 입맞춤을 하고 돌아선 대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만이 입을 맞춘 볼을 저도 모르게 문질렀다. 뒷모습이 묘하게 신나 보이는데 착각인가.

 멍하게 있던 태섭은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오래 씻고 있는 건지, 대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기다리기에는 혼자 못 간다고 말했던 대만이 궁금했다. 얼른 대만을 붙잡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러려면 사랑하는 얼굴을 봐야하고, 얼굴을 보고 있자면 또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주체를 못할 것이 뻔했다.



“가자, 태섭아.”



 재빨리 고개를 돌린 태섭은 선글라스를 셔츠 주머니에 넣으며 오는 대만을 보며 입을 벌렸다. 대만은 하늘색 린넨 셔츠에 통이 넓은 슬렉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왁스로 고정해서 훤칠한 얼굴이 더 잘 보였다. 마트를 가는 건데 지나치게 꾸미고 나온 거 아닌가…. 심장이 쿵쿵거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괜히 딴청을 부렸다. 준비 다 했어?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대만은 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것 것 같기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제 어깨에 팔을 둘며 가자고 말하는 대만에게서 저가 좋아하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런 대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만이 지금의 제 생각을 알든 모르든, 이건 확실히 알아줬으면 했다. 

 형이 나를 먼저 만지면서 다가오면 나는 늘, 속절없이 형에게 첫 눈에 반했던 그 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마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렸다. 차키를 주머니에 넣고 대만이 있는 곳으로 넘어간 태섭은 곧바로 대만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이왕 나온 거, 느긋하게 장 보고 가자.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태섭은 대만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배 안 고파요?”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가. 아까처럼 막 배고프지는 않아. 넌?”

“나도 괜찮아요.”

“그럼 느긋하게 있다가 가자.”

“으응….”



 말꼬리가 늘어진 건, 대만이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태섭은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정말, 아까랑은 다르게 미친듯이 뛰었다. 여기 밖인데.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우리만 있는 게 아닌데. 아마도… 다 보고 있을 텐데.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는 것도, 웅성거리는 소리도 모두 다, 들릴 텐데. 그걸 당신이…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뭘 살지를 고민하며 중얼거리는 대만이 끊임없이 제 볼을 만지며, 자연스럽게 제 어깨 아래로 떨어진 손으로 셔츠깃을 만져댔다. 대만의 허리를 만지고 있는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꼼지락거렸다. 대만이 하는 말에 그저 탄탄한 옆구리를 지분거리며 고개만 끄덕이고, 단답형으로만 대답해도, 불성실하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취해있다는 걸 안다는 것처럼 근사하게 웃는 대만이, 평소에는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고, 예민하게 구는 태섭을 바보로 만들었다. 마치, 정대만이 가진 유일한 특권을 알고 이용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저녁에 소고기 구워 먹자.”

“네.”

“…아니다. 삼겹살 구워 먹을까?”

“된장찌개도 만들어서 같이 먹을까요?”

“살 찌지 않을까.”

“시즌도 아닌데 뭐 어때요.”

“너는 괜찮아?”

“네. 바깥 테라스에서 구워 먹을까요?”

“응.”



 태섭은 카트를 끌면서 간간이 대화를 하는 동안 대만의 시선이 머무는 제품과 궁금하다고 하는 것, 신기하다고 하는 것 모두를 담았다. 집에 손님 오는 거 아니지? 카트에 가득 담긴 먹을 거리를 보면서 웃는 얼굴이 말도 못하게 사랑스러웠다. 우리 운동 선수잖아요. 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제 말에 그건 맞다고 말하며 제 옆에 와서 같이 카트를 끄는 손이 좋았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자연스럽게 겹치고, 새끼 손가락을 엮는 동안 옅게 웃고 있던 대만이 고개를 숙여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이쯤되니 태섭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까 전에 주차장에서 그랬듯이, 심장이 두근거려서 대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 집에 갈까? 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들렸다. 태섭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얼굴을 붙잡고, 당장이라도 키스를 하고 싶었다. 아니, 할 수 있었지만, 꾸욱- 참았다. 참는 건 태섭이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힘들었지만.

 셀프 계산대에서 대만이 바코드를 찍은 제품을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쉴 새 없이 찍히는 걸 보면서 너무 많이 샀냐고 중얼거리는 말에 비해 얼굴은 잔뜩 신이 나보였다. 개구쟁이 같네. 중얼거리는 제 말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랑 있으면 옛날의 내가 가끔 나오는 것 같아.”

“…그래요?”

“어. 편해서 그런가.”



 좋은 거다, 좋은 거. 제가 할 생각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덧붙이는 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태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면서 하는 말에는 언제나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차로 돌아와 문을 닫자마자, 마트에서 하고 싶었던 키스를 짧게 했다. 미국은 짙게 썬팅을 하는 게 금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수도 있어 길게 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면 제일 먼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대만을 빈 속인 채로 지내게 할 수 없어서 도착하자마자 장을 본 걸 두 손 가득 들고 부엌으로 갔다. 



“시리얼로 괜찮겠어요?”

“어. 저녁 거하게 먹을 거잖아.”

“그 사이에 배 안 고프겠어요?”

“그럼 다른 거 먹지 뭐. 빨리 먹자. 궁금해.”



 제 뒤에 서서 어깨에 턱을 올린 대만이 중얼거렸다. 태섭은 고개를 돌려 대만에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쪽- 경쾌한 소리가 났다. 시리얼이 그릇에 담기는 소리가 났고, 우유를 붓는 소리가 났다. 한 입 먹어 보더니 너무 맛있다며, 제 옆에 비스듬하게 서서 그릇을 들고 먹는 대만이 우스웠다.



“앉아서 먹어요.”

“식탁까지 갈 여유 없어.”

“그렇게 맛있어요?”

“어. 이 맛있는 걸 미국 사람들만 먹다니. 억울하다.”



 한국 갈 때 가져 가라는 말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태섭은 제 유치함에 대만이 못 들을 정도로 낮게 혀를 찼다. 괜히 아무것도 생각 안한 척을 하며 시리얼을 먹었다. 5분도 안 돼서 한 그릇을 다 먹은 대만은 또 먹겠다며 우유와 시리얼을 부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담아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두 박스 사기를 잘했네.”

“어, 완전. 이럴 거 알고 산 거지?”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배는 채웠는지,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졌다. 느긋하게 먹으며 집을 둘러보던 대만은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마주치는 태섭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트에서부터 저에게만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들 경계는 전혀 하지 않던 순하디 순한 송태섭은 SNS와 타블로이드지가 묘사한, 코트 위의 코요테가 저 스스로 사랑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 마치 거짓인 것처럼 느껴진다 던 ‘그’ 송태섭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송태섭은 여전히, 저만 바라보고 있다. 대만은 그런 태섭에게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가득 담아 웃어주었다. 제 웃는 모습을 가장 좋아하는 태섭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가끔은, 너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을 때가 꿈만 같다. 너를 사랑하고 나서야 이제야 나는, 살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는 것 같다. 

 


“다 먹었어요?”

“응.”

“양치 하고 와요.”



 먹은 그릇을 정리하는 태섭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욕실로 향했다. 입을 맞추자마자 얼굴이 붉어진 태섭은 달아오른 귀를 둔 채로 설거지를 했다. 다 끝나고는, 아직까지 붉은 귓불을 만지며 핸드폰을 켰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이 로딩되는 걸 기다리는 동안, 대만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태섭을 조금씩 불안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진이 안 찍히는 게 이상한 거였다. 안그래도 저와 대만의 연애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사람들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는 대만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 역시, 그런 대만에 취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예 안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정대만에게 어떻게 그만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말릴 수 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SNS 어플을 눌렀다. 마트에 가기 전에 했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끔 검색을 해본다는 대만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해시태그와 사진이 난리였다. 태섭은 긴 한숨을 뱉었다. 한숨이 나는데 얼굴은 빨개지는 게, 이런 순간에도 더럽게 못 숨기네 싶었다. 사진으로 보기만해도 그 순간이 생각나 얼굴만 긁적이며 사진과 댓글을 보던 태섭은 어떤 사진과 댓글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송 웃는 얼굴 보기 좋다

 송… 사랑받고 있네 행복해 보인다

 행복하냐? 사랑에 빠진 송은 언제봐도 좋다



“…….” 



 송이 더 사랑 한다더니, 형도 만만치 않잖아?



“…….”



 제 얼굴을 보고, 만지며, 환하게 웃고 있는 대만이 가득 채워져 있는 사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



 자꾸만, 벅차 올라서 목이 메여.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당신도…, 이런 기분 일까.



“…….”



 나도 이런 얼굴로…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당신을 보고 있을까.



“…….”



 당신을 보는 나를, 내가 볼 수 있다면 이런… 얼굴 일까.



“…….”



 우리는 벌써, 닮아있나……



“…뭐해? 왜 여기서 이렇게 서있어?”



 양치를 하고 나온 대만은 욕실 문 앞에서 제 얼굴을 빤히 보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빤히 보는 태섭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고개만 젓는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채로. 한참 보고 있던 태섭은 아무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대만은 조금 황당해서 닫힌 욕실문을 쳐다보았다. 다른 욕실 놔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지?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욕실문을 보다 거실로 걸어가 티브이를 켰다. 습관처럼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다리를 올리고 누웠다. 쭉 펴도 자리가 남고 움직여도 떨어지지 않는 커다란 소파에서 뒹굴거렸다.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를 듣고 본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도 태섭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대만은 다시 채널을 돌렸다. 이제 이건 거의, 의미없는 행동이다. 슬금슬금 지루해질 때쯤, 욕실에서 태섭이 나왔다. 누워있던 대만이 일어나 앉으며 저에게로 걸어오는 태섭을 보았다. 아까처럼 아무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태섭이 좀, 이상했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고 눈도 좀… 빨갛고… 이제보니 꾹 다문 입술 아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있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

“아니, 안기지 말고 말을 하라고, 어? 야, 송태섭, 야아.”



 제 허벅지 위에 앉으며 목을 껴안는 태섭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우, 이 새끼 진짜, 미국와서 벌크업을 얼마나 했길래. 하지만 무거운 건 무거운 거고, 제 목에 얼굴을 비비며 몇 번이고 숨을 고르는 태섭은 제 애인이었다. 대만은 짧은 숨을 뱉으며 티브이를 끄고, 태섭의 등을 껴안았다. 대만이 토닥여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춘 태섭은 다시, 천천히, 숨을 골랐다. 방금까지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는 것처럼. 이러기 전까지는 숨이 막혔다는 것처럼. 그래서 한참동안, 등을 토닥이고, 어깨를 만지고, 목덜미를 안아주었다. 괜찮다는 것처럼. 이제는 다, 제자리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그러고 있자면 조금씩, 대만의 숨소리가 들렸다. 대만을 채우기에 급급해서 조금 소홀하게 들었던 대만의 숨 역시 저처럼, 일정했다. 그래서 괜히,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있어서 그런 거냐고. 내가 있어서, 편안하냐고.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형.”

“어.”



 가끔 믿을 수가 없어서 당신을 보던 새벽이, 눈을 뜨면 당신이 있는 아침이, 둘러보면 당신이 있는 오후가, 같이 잠드는 당신이 있는 밤이 가끔은 너무 벅차 올라서…… 한 번도 하지 않은 기도를 하게 만든다고.



“내가… 잘할게요.”



 내가… 당신의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내가 진짜… 잘할게요.”



 당신이 나의 처음이자,



“부족하지 않도록 내가… 잘할게요, 형… 그러니까……”



 처음일 마지막이 되어주세요…….

 목을 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대만은 눈을 감으며 태섭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꽉 잡으면서도 아프지 않게 하려고 꽉 쥔 손 끝은 아마,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이 상냥함에 짧은 숨이 터져나왔다.

 


“태섭아.”

“네….”

“그러고 싶을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 해주면 좋겠는데.”



 그 숨은 곧, 상냥함에 물들어 제 안으로 들어왔다. 제 얼굴을 붙잡고 깊게 입을 맞추는 태섭이 떨고 있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꼬옥… 안아주었다. 지금 내가 상냥하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너에게 배운 것일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태섭아.

 나를 더욱 더 사랑해줘.

 너에게 받은 사랑을 모두, 돌려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