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됐다. 너한테 못 가르쳐 준 게 있어서 졸업하고 나서도 내내 찝찝했어.”
“이게 입학식에서 할 소리에요…?”
“결국, 만나네.”
“…제대로 된 인사를 좀 하라고요.”
오랜만에 만난 정대만은 역시, 정대만이었다.
첫사랑이 망한 건지 내가 망한 건지
01. 아직도 진행 중.
대만이 진학한 대학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태섭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성적 커트라인으로는 시도도 못할 곳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농구부 감독인 안 선생님과 상담 후 농구 특기생으로 지원 하기로 결정을 했는데, 고민과 걱정을 한 것치고 쉽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는, 허울 좋은 말이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다 진짜 이유를 순순히 인정하자고 결심 하자마자 찾아온 건, 두려움이었다.
…사실은.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 오빠 대학 합격 했어! 기적이 일어났어! 아라가 하도 난리를 치며 옆에서 방방 뛰어대서 되찾은 평정심은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하며 사라졌는데, 머릿속에서 별안간, 상담을 하는 동안 제 의견과 소신을 술술 풀어내다 왜 그 학교여야 하냐는 질문에 당황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불순한 이유를 넣으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게 마음대로 되었다면, 여태 괴롭지 않았을 거다.
합격 통지서는 손에 힘을 주자마자 쉽게 구겨졌다. 구겨진 종이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누운 채로 천장을 쳐다보았을 때, 머릿속에 있던 사람이 천장에 슥 나타났다. 쉽게 구겨지지 않는 사람.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존재감을 뽐내는 뻔뻔한 사람. 제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튀어나와 물먹은 스펀지마냥 무거워지는 사람. 그 사람은 꽤 오래 만나지 못했음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지, 어제도 만난 것처럼 세세한 것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안 선생님이 사람 여럿 살리네.”
그래서 도리어, 두 눈 앞에 있는 지금이 비현실로 느껴졌다.
대만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태섭은 아무말도 못하고 한 쪽 어깨에 걸친 가방끈만 손으로 꾹 잡았다. 저 얼굴에 심장이 뛰었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쳐서 얼굴은 자세히 못 보면서도 그랬다. 교복이나 운동복을 입지 않고 학교를 걷는 건 처음이어서 그렇다고 생각을 하는 내내, 힐끔거리며 대만을 살폈다. 어색한데 새롭고, 낯선데 익숙하다. 이 감각은 태섭을 더욱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왜 기분이 좋지. 기분 좋은 일 있나. 뭐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지. 1년 전만 해도 저와 있을 때면 늘 투닥거렸던 대만을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가, 특유의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짓는 얼굴과 마주쳤을 때는, 원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 따라왔냐?”
“무슨 애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
“반가워서 그러지.”
“…두 번 반가웠다가는 아기 되시겠네요.”
“으하하, 아, 이 새끼 진짜. 뻘소리가 늘었네?”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고개를 젖히며 웃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붉게 물든 볼만 손으로 긁적였다. 웃음소리가 자꾸만 심장 근처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괜찮아질 것 같아서 선배가 이 학교에 진학한 이유랑 똑같거든요, 라는, 굉장히 공적이고도 딱딱한 말만 늘어놓았다. 이 말에 대만은 재미없는 놈이라며 태섭을 발끈하게 했다. 재미가 없기는 누가 더 없는데. 그러는 그쪽은 입학 축하한다는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았으면서. 입술을 안 내밀려야 안 내밀 수가 없었다.
“농구부 가입 할 거지?”
“네.”
“내가 직접 데리러 올게. 먼저 오지 마.”
“뭣하러요?”
“그런 게 있다.”
그러면서 또 푸하하 웃는 대만이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는 건 저 자신이었다. 그런 게 뭔데. 뭐길래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진짜. 이런 생각이나 하며 문제가 되는 생각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생각나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가… 이런 게 귀여워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애당초에 정대만이 귀여워 보인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툴툴거리는 생각과는 다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입술을 말아물어도 올라가려는 파렴치함에 손으로 턱을 매만지는 척을 하며 입술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본 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로인줄 알았는데. 아닌가?”
“…네?”
“아니. 그냥 좀.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서. 막 미자 딱지 뗐으니 당연한가.”
그러는 지 분위기는 어떻고….
“수강 신청은 다 했냐?”
“네.”
“시간표 불어.”
“왜요.”
“시간 맞으면 점심 같이 먹게.”
“…친구가 없어요?”
“네가 없을 예정이잖아, 네가. 내가 구제해주는 거라고.”
“뭐라는 거야…? 저 사회 부적응자 아니거든요…?”
“너는 무표정하게 있으면 성격이 더러워보여서 아무도 다가오려고 안 해. 모르는 거 아니지? 이달재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없잖아. 그러니까 사회성 좋은 선배님이 후배님 구제해주려는 거다. 알아듣냐?”
위기였다.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아무도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냐?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이 대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도… 위기는 계속 되었다. 태섭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 해도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볼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든 말든, 그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들킨다면, 제 마음과 함께 구긴 합격통지서가 들킬 것 같았다. 대만이 졸업을 하고 잘 보지 못했던 1년 동안, 그래도 컨트롤이 가능했던 마음이 손쓸 새도 없이 요동칠 수도 있을 거라고 경고 했던 일 따위는 저 밑바닥으로 가라 앉아야만 했다.
“꽃가루 알레르기 있으면 조심해라.”
“네?”
대만이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등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벼운 손짓이었다.
“우리 학교, 벚꽃으로 유명해. 나무가 많다는 뜻이야.”
“…….”
“코 가려울 수도 있어. 피부도 가려울 수 있고.”
“…….”
“심하면 약 챙겨 먹어.”
태섭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앞서가는 대만의 등을 보았다. 창밖을 보는 옆모습을, 멋쩍은 듯이 뒷머리를 매만지는 손을 보았다.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데 꽃 피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간지러워? 좀 예민한 스타일? 태섭을 보며 뒤로 걷는 대만은 웃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처음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알고 있는 다정함을 보여주었다. 태섭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떤 책임감이 들었다. 오래 전부터 간지러웠던 왼쪽 가슴을 무시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책임감.
“넘어져요.”
“복도는 평지거든.”
“부딪혀요.”
“내 주변에 사람 없거든.”
“나한테 부딪힌다고.”
“어? 갑자기 왜 뛰어와, 아! 야, 송태섭, 거기 안 서냐! 저게 진짜!”
역시 제 마음 같은 건 그 누구도 영영, 몰랐으면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만이 아주, 해맑았으므로.
02. 그러나.
정대만은 애초부터 사고였다. 모를려야 모를 수가 없는 대형 사고.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가 동시에 열이 뻗쳤다. 어떤 사고든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다. 그 후유증이 첫사랑과 더불어 짝사랑이 될 줄 몰랐을 뿐이다. 몰랐으니 받아들였지 알았으면 사양 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억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그것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심장을 건드려? 건드릴 줄은 몰랐기에 더, 억울했다. 대만과 치고 박고 싸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은 상처를 생각하면 상처는 정말이지, 양반이었다. 상처는 흉터로 남고,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데 빌어먹을, 심장은 가끔 숨 쉬는 걸 버겁게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뭘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둘만 있는 분식집에서 저 인간은 해맑게 떡볶이나 처먹고 있는데, 심장은 쿵쿵대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 뿐인가. 혼잣말도 잘했다. 그 심장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맵나? 왜 헥헥거리지. 혀 내밀고 있는 게 좀 귀엽네. 옆에 콜라 좀 마셔가며 먹든가. 우유를 사다줘야 하나? 근데 혀… 계속 내밀 건가? 기분이 좀… 이상한데?
“뭔 팅?”
그러면 이성적인 머리는 그 시그널을 끊었다. 정신차려, 송태섭.
“소개팅이요.”
“벌써?”
“애들 말로는, 우리 과가 느린 거라고 하던데요.”
“요즘 애들 발랑 까졌다.”
“늙은이같은 소리 하네.”
“까진 걸 까졌다고 하는데 그게 늙은이같은 소리냐.”
“언제는 신입생 때 열심히 놀아야 한다면서요.”
“친구 생겼냐?”
“사회 부적응자 아니라고 그랬죠, 내가.”
콜라를 마시며 굴러가는 대만의 두 눈이 영 심상치 않았다. 태섭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쩌다가 소개팅 이야기가 나온 거지? 이런 건 생각하지도 말라는 듯이 대만이 치고 나왔다. 나갈 거냐?
“아니요.”
“잘했다.”
“그게요?”
“그런 게 있어. 신입생일 때는 봄바람에도 가슴이 뛰고, 떨어지는 벚꽃잎에는 웃음이 나고,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가 귀엽다고 느끼기 마련이야.”
“경험이세요?”
“…분위기 같은 거에 휘둘리지 말라는 거야. 뭐 너는, 그러지 않겠지만.”
“경험, 있다. 근데 나보고는 하지 말라.”
“이제 슬슬 농구부 입부 신청서 받을 때가 됐는데.”
“왜 말을 돌려요?”
“시끄러워, 인마.”
태섭의 입 안에 떡볶이가 들어왔다. 두 눈이 동그래진 태섭을 보는 대만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대답 하는 거 여전하네. 너는 인마, 선배한테 말이야, 태섭은 그 얼굴을 보며 입 안에 든 떡을 영혼없이 우물우물 씹었다. 대만이 하는 말이 귀에 하나도 안 들렸다. 매너 없이 떡을 가로로 넣어서 입가에 양념이 묻은 게 느껴지는데 그건 닦을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지금. 정대만이. 지가 먹던 포크로. 내 입에 떡을 넣었는데. 그걸 아무 생각없이. 쭈욱. 빨았음. 이게. 간접키스인가. 아닌가. 정답은?
“없다.”
“네?”
“휴지. 네 얼굴 보기 흉해서 닦아야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태섭이 발끈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대만은 빈 테이블에서 휴지를 가져왔다. 어유 말하지 그랬어, 가져다 줬을 건데. 분식집 이모의 살가운 말에 어려운 거 한 게 아니라는 착한 아들내미같은 말을 했다. 대만에게서 휴지를 받은 태섭은 입주변을 닦으며 이모와 대화를 하는 대만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생 때 둘이서 자주 가던 분식집이 떠올랐다. 그 분식집은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콜? 한 마디에 들어가던 작고 낡은 곳이었다. 학생 장사를 하는 곳이 그렇듯, 가격은 저렴하고 양은 많았다. 그래서 자주갔다. 메뉴 하나씩 다 시켜 말없이 먹다가 짜증나는 걸 이야기하며 으르렁거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략을 짰던,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아지트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여기 맛있지. 태섭은 딴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묻는 게, 꼭… 여기를 그런 곳으로 만들어도 되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머리를 무시한 심장이 다시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녀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기 맛있지.”
“네.”
“좋아할 줄 알았다.”
뭐가 그렇게 뿌듯한 건지, 옅게 웃으며 배를 두드리는 대만의 입가에 시선이 갔다. 태섭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대만이 쓰라고 준 휴지를 다 써서 새 휴지를 가져와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의자를 뒤로 물리자마자 이모가 새 휴지를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감사합니다. 간결하고 짧은 인사를 하는 태섭을 보며 이모는 얘가 걔구나? 척보니 알겠다. 라며 알은체를 했다. 얘가, 걔? 그럴리가 없는데도 상당히 고전적인 무언가로 들리게 하는 말투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섭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설명을 하라는 얼굴을 보면서도 웃고 있던 대만은 팔짱을 꼈다. 왼손목에 하고 있는 메탈 손목시계가 반짝였다. 그러니까, 시계가 반짝인 거지 대만이 반짝인 게 아니다. 태섭은 초연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런데,
“재미있는 후배 있다고 말했었거든.”
“…그게 설마 나예요?”
“어.”
“웃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쥐어 팬 적은 있어도…. 대만은 뭘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젓는 건 덤이었다. 그 덤에 태섭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말을 더 할 건지 지켜본다는 듯한 눈빛을 대만에게 덤으로 보냈다. 그 덤에 대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것처럼.
“이 얼굴 좀 봐요, 이모. 성격 엄청 더럽게 보이죠.”
“원래 이런 애들이 속은 착해.”
“착하기는 개뿔. 안 잡아먹으면 다행인데요?”
“속이 착하니까 잡아먹힌 지도 모르게 할 수 있는 거야.”
눈을 가느다랗게 뜬 이모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기가 눌린 기분이었다. 태섭은 시선을 돌리며 물을 마셨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모는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으로 태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음에 또 와요.”
“네.”
“그때는 말 놓는걸로 해요.”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물을 한 번 더 마셨다. 얘가 걔구나, 라는 말은 확실히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야, 쫄았냐? 이모 풍채 만큼 속도 좋으셔. 푸하하 웃는 대만에게 이모는 너는 풍채도 속도 별로다. 라며 푸하하 웃었다. 태섭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2의 아지트로 합격이었다. 이정도면 인생(짝사랑) 상담도 가능하다. 한데.
“내가 왜요, 내가 왜!”
“양념 묻히고 이러는 거 하나도 타격감 없거든요. 좀 봐봐요………”
휴지를 든 손을 뻗으려던 태섭은 이모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뭐하는 짓이냐, 이거? 대만은 말랑한 얼굴로 불평을 했다. 분명히 시선을 피했는데,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것도 존 프레스인가.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1초가 1분 같은 압박감과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침묵 속에서 태섭은 굉장히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 상담이든 뭐든, 하면 안 된다. 이모 앞에서는. 그 무엇도, 절대로. 좀, 아니 많이, 조심해야 될 것 같다. 시선 조심, 말 조심, 행동 조심.
이 모든 것들을 조심하려면 여전히 말랑한 얼굴로 쳐다보는 정대만만 조심하면 됐다.
03. 하여간, 정대만이 문제다.
대만은 그가 말했듯, 시간이 맞으면 태섭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뭐 이런 말을 지키냐는 태섭의 말에 남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은 하는 건 아니라며 도리어 으름장을 놓았다. 태섭은 이 말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건방진 입꼬리는 늘 배신자처럼 굴었다. 응, 너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학습을 시킨 주제에 처음 가르쳐주는 것처럼 뻔뻔하게 나타났다. 그럴 때면, 어느새 말이 많아진 대만의 이야기에 집중을 했다.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저와 보폭을 맞추며 걷는 대만은 얼핏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을 볼 때마다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고등학생 때와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은데, 무엇이 이렇게 만든 건지 궁금했다. 교복이나 운동복만 입고 다니던 사람이 매일 다른 옷을 입는 것도, 향수를 뿌리는 것도, 거슬린다며 절대로 기르지 않던 머리카락을 기른 것, 모두. 그동안 보지 못한 1년 동안의 정대만을 상상하면 기분이 솟아 올랐다가 곧바로 바닥을 쳤다. 생각하기도 싫은 것들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어떤 것을 목도하면서 정점에 다다랐다.
정대만이,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과 인사를 한다.
“오늘 학식 돈까스. 종류 엄청 많아. 안녕하세요.”
“좋아요? 신난 것 같은데?”
“어. 맛있거든. 안녕하세요, 선배.”
“참나. 어린애도 아니고.”
“먹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안녕.”
“…….”
“왜?”
엘리베이터에 타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느라 대화가 자주 끊겼다. 태섭은 두 눈을 굴리며 대만과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다. 모두 대만을 잘 아는 것처럼 안부를 물었고, 대만은 그 안부에 적당한 대답을 하며 적당히, 웃었다. 웃다니. 정대만이? 이런 대만을 보고 있자니 급기야 기억이 조작되기 시작했다. 이 인간, 고등학생 때도 이랬던가? 그때의 대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생각이나 했다. 그러다보니 얼굴에 표정이 없어졌다.
“기분 안 좋아?”
“아니요.”
“그럼. 배고파?”
“아니요.”
“근데 왜 기분이 나빠?”
“안 나쁜데요.”
“…왜. 뭐.”
“뭐가요.”
“왜 기분 나쁘냐고.”
“안 나쁘다고 했잖아요.”
“내가 널 모르냐?”
태섭은 걸음을 멈추었다. 같은 보폭으로 걷다가 저보다 앞서나가기 시작한 대만이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다섯 걸음 정도는 뒤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거리면 그래도 짧은 건데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제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대만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보지 않았을 때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주머니 안으로 손을 감추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이제는 더 알 수 없을 거다. 내가 널 모르냐는, 거슬리는 말 같은 것도 안 할 거고. 정말로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을 거다. 그런 건데. 가끔은, 해맑음이 거슬리는 법이었다.
“언제부터 사교성이 좋았어요? 교양 과목에 그런 게 있어요? 추천 좀 해봐요, 나도 들어나 보게.”
…미친.
태섭은 대만이 듣지 못하도록 한숨을 뱉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2초 정도만 되돌아 간다면 이런 건 묻지도 않았을 거고, 1분 정도만 되돌아 간다면 표정 관리를 제대로 했을 텐데. 그렇다면, 저런 얼굴은 보지 않았겠지.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침묵이 어색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대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두 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게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나 사실은… 축제 운영 위원회에서 일해.”
“…….”
“…….”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태섭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대학 축제 있잖아. 그거, 운영하는 위원회에서 일해. 문장을 풀어주는 친절한 말에도 이해가 안 갔다. 위원회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에도 저런 건 있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대만이. 그, 정대만이. 기껏 농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을 해놓고, 농구도 하고, 운영 위원회에서도 일한다? 긴장이 조금 풀어진 태섭은 오른손을 꺼내 미간을 문질렀다.
“설마 그… 홍보 뭐… 그런 거 해요?”
“…그것도 하고… 현장에서도 뛰고….”
“…….”
“그러면서 학교 사람들한테 얼굴 좀 텄지….”
“그걸 선배가 왜 하는데요. 농구할 시간은 있어요?”
“농구 당연히 열심히 하지 인마 날 뭘로 보고! 근데 있잖냐… 사회 라는 게 쉽지 않다…….”
사회 같은 소리 하네… 이래서 사회성 어쩌구 소리를 했던 거냐고……. 어이가 없어진 태섭은 제 옆으로 되돌아오는 대만을 빤히 올려다봤다. 들어 봐…. 내가 처음 입학했을 때, 온갖 사람들이 다 찾아왔어… 네가 그 북산의 정대만이냐… 중학 MVP 였다며… 이 소리를 대학에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1년 사이에 10년은 늙은 사람처럼 말하는 대만이 기가 막혔고,
“근데 일단 식당으로 가면 안되겠냐? 배고파 죽을 것 같다.”
어이없이 귀여워서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이런 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다시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하는 말이 그렇게 심각하게 들려? 나 농구 제대로 하고 있어, 걱정 마. 축제 1년에 한 번만 해…. 선배 걱정하는 후배처럼 보이는지 어깨를 토닥이는 대만의 손이 가볍게 툭툭 떨어졌다. 태섭은 실소를 뱉었다. 날 잘 알기는 개뿔. 내가 언제부터 선배 걱정을 했다고. 뭐, 하기야 했지. 근데 그걸 티 낸 적이 있었냐고. 식당에 다다를 수록 사람이 많아졌고 대만은 아까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달라진 건, 하나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 그 하나가 저라는 걸 느꼈을 때는, 바닥을 친 기분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래. 과거 같은 거. 태섭은 홀가분한 얼굴로 대만을 쳐다보았다.
“선배랑 같은 학교인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무슨 소리야?”
“안 선생님한테 딴짓 하고 있다는 거 말씀 드려도 돼요?”
“야, 야, 뭐라는 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맞잖아요. 딴짓 하고 있는 거.”
“아니, 라고, 했지 이, 새끼야.”
“아야! 아! 선배 잠깐만! 아파요!”
대만이 헤드락을 걸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태섭은 졸지에 할 말을 잃었다. 대만이 헤드락을 건 것도, 대만의 품 안에 갇힌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이런 건 마치, 안긴 것 같잖아……. 빨개진 얼굴이 사정없이 대만의 가슴에 비벼지면서 은은하게 나던 향수 냄새가 코 안으로 확 들어왔다. 잠깐만, 숨막혀요, 선배.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대만은 연신 취소해 빨리, 제 할 말만 쏟아냈다. 그 할 말들 속에서 적당한 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태섭은 저도 모르게 성질을 냈다.
“아 진짜, 형!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두 손으로 손목을 꽉 잡고 비틀자마자 대만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찌나 꾹 다물고 있는지, 피가 안 통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힘 풀어요. 그 말을 하자마자 조금씩 빨개지는데, 이 얼굴에 적당한 말을 찾기란 또 쉬운 일이 아니어서 태섭 역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얼굴이 빨개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대만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린 태섭은 순식간에 조용해진 식당 안에서 먼 곳만 쳐다보았다. 하여간, 정대만…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돼……. 생각과 표정이 따로 노는지는 모르면서 배가 고파 죽을 것 같다는 대만의 말은 기억하고, 알고 있었다. 이 미친듯한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돈까스가 맛있는데요. 조용히 묻는 제 말에 움찔한 대만이 헛기침을 했다.
“치즈 돈까스….”
“…그거 두개 주문 할게요. 앉아있어요.”
“왕돈까스라서 네가 다 못 들고 와… 같이 가야 돼….”
…….
…….
웃어도 되나. 웃음 나올 것 같은데.
눈치만 보던 태섭은 대만 역시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인 채로 실소를 뱉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풉, 소리를 낸 대만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웃긴데, 왜 웃긴지 모르겠어, 근데 너무 웃겨, 어떡하냐?
고개를 숙인 채로 속삭이는 대만의 어깨는 여전히 들썩이고 있었다. 태섭은 그 어깨를 보며 대만의 등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어떡하긴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줄 서서 돈까스 주문해야지. 이 말에 제대로 웃음이 터진 대만이 태섭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끅끅거리며 웃어댔다.
참 이상했다. 건물 안이라 봄바람이 부는 건 느껴지지도 않고. 벚꽃은 아직 피지도 않아서 떨어질 꽃잎은 없는데다가. 민들레 홀씨가 날라 다니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남은 건, 신입생이 아닌 대만의 웃음소리였다. 어째서 이렇게 웃어? 왜, 이렇게 웃을 수 있어? 무엇이 선배를… 웃게 만들었어요? 태섭은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고. 대만의 숨이 죄다 어깨와 목덜미로 쏟아져서, 거기만 온통, 뜨거웠다. 정대만 반칙. 반칙이라고, 이 인간아. 제대로 줄 서야 된다며 대만의 옆구리에 갖다댄 제 손이 반칙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 태섭의 얼굴이 온통 빨갰다.
“너때문에 바보 소리 다시 들을 것 같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내가 할 소리거든? 쪽팔려서 딴 곳만 보는 놈이 입만 살아서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만 산 건 여전하네.”
“죽는다, 진짜.”
아무래도, 정면으로 부딪히려면 노력이 많이 필요한 듯 싶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빨개진 얼굴로 대만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을 감추더라도 떳떳하고 싶었다. 이건, 태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04. 하지만, 정대만이 문제다.
“야, 송태섭.”
태섭은 1학년만 있는 강의실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2학년 정대만을 보면서 애써 심드렁한 척을 했다. 가방도 없이 달랑 들어오는 게, 누가 보면 뭐 맡겨 놓은 거 찾으러 온 줄 알겠다.
“뭐하냐?”
“여기 선배 강의실 아니거든요….”
“알아. 뭐하냐니까?”
“강의 준비해요.”
“그래? 안녕. 빈자리에 앉아도 될까?”
“네, 선배님. 네, 당연하죠.”
진짜, 뭐가 이렇게 당당해…? 태섭은 제 옆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싱글벙글 웃는 대만을 보며 혀를 찼다.
“수업 없어요?”
“어.”
“근데 왜 벌써 왔어요?”
“심심해서.”
태섭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대만은 미친 거냐고 묻는 듯한 태섭을 보면서 가지런하게 나열되어 있는 책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작년에 들었던 교양과목의 수업서였다.
“나 이거 족보 있는데. 줄까?”
순간, 태섭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변화였다. 또 어떤 얼굴을 보여주려나…. 이번에는 책상을 치는 펜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느라 힘이 들었다. 태섭은 뭐랄까, 가만히 보면 티가 나는 스타일이었다.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는 않아도 대만의 눈에는 잘 보였다. 뭐… 좀, 자세히 봐야하지만. 턱을 괸 손가락을 톡톡 치며 다른 곳을 응시하는 태섭을 보는 내내 대만의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지금 줘도 공부 안 할 거니까, 시험 기간 때 줄게. 까먹을 거 같으니까, 달라고 말해야 된다.”
“…준다고 한 사람이 챙겨줘야죠.”
“간절한 쪽이 먼저 말하게 되는 법이잖냐.”
“그러면 선배가 책임감을 가지면 되잖아요.”
“무슨 책임감?”
“후배가 F는 안 받게 하겠다는 책임감.”
“하하. 그럼 그 책임감 네가 먼저 발휘해.”
“어디다가요?”
“나랑 같이 점심 먹자.”
“…내가 왜요.”
“심심하니까.”
“…널리고 널린 게 선배랑 아는 사람들인데 뭐 꼭 굳이.”
“그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제일 편한데?”
“…이제 가요. 강의 시작해.”
“알았다, 인마. 끝나면 연락해.”
“……간절한 쪽이 먼저 연락하던가.”
“푸하하! 예예. 간절함 담을 테니 받아줘라.”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갈게, 하며 어깨를 툭툭 치고, 손을 흔들며 강의실을 빠져 나가는 동안, 태섭은 주먹을 쥔 손을 풀 수 없었다. 급기야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연신 눈만 깜빡였다. 야야 태섭아, 너 정대만 선배랑 많이 친해? 같은 학교 출신이래도 다 친한 거 아니잖아. 강의 시간이 몇 개 겹쳐 제법 친해진 동기 재경이 물었다.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저 유명한 정대만 선배가 네가 제일 편하다는데 너는 아니야?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에에엥?
“그 인간이랑 친하기는 개뿔….”
“그 인간이라고 부를 정도면 친한 거 아니야…?”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붙잡고 자세하게 말해보라는 재경이 부러웠다. 나도 이해를 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근데 너무 이해가 잘됐다. 잘돼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애초에 정대만과는 단순한 관계가 되는 것자체가 성립이 안 됐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첫 눈에 반한 사람이면,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그런 사람이라고, 빌어먹게도. 입을 꾹 다문 태섭이 이이상의 말은 하지 않을 것을 느꼈는지, 체념한듯 손을 내린 재경이 새 노트를 펼치며 말했다.
“그래도 이 세상에 날 편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 행운이야.”
태섭은 턱을 괴며 대만이 들어오고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글쎄…. 너 같으면 편하겠냐,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편하게 생각하면? 원래 짝사랑이란, 그 사람이 표현하는 감정과는 반대의 그래프를 그리는 법이었다. 나는 네가 제일 편해(하강곡선) 나는 당신이 제일 어려운데(급하강곡선) 받아줘라(곡선 변함없음) ???!!!(상승하던 곡선이 해석 오류로 자유 의지로 움직임)
그래프를 뚫은 감정이 휘몰아친 태섭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차가워진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고, 손이 떨리지 않다는 것을 애써 숨기며 책에 손을 올렸다, 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이제는 이 책에도 대만이 보였다. 긴 한숨이 쏟아졌다. 이런 사소한 것도 기억으로 남아? 이쯤 되니 대만은 저에게만 헤프게 구는 도장인 것 같았다. 어디든 낙인을 찍어서 잊지 못하도록 하는 아주 몹쓸, 하등 쓸모없는. 그럼에도 그 쓸모없는 것들을 그냥 넘길 수 없는.
“너 진짜 이번에도 소개팅 안 나가?”
“어….”
“아쉽다. 같이 가면 재미있을 텐데. 또 기회는 있으니까.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태섭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웅웅거리며 연락이 왔음을 알린 핸드폰 화면에 뜬 [정대만] 의 이름과, [너 오후 수업 몇 시부터 시작이냐?][농구부 입부 신청 오늘부터래 네가 1등 해야지ㅋ][점심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문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갈 일 없을 거라는 말을 뒤편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솟아 오르려는 입꼬리를 감추려고 말아문 입술이 아릿했다. 입술을 말아 물며 책상 아래에서 문자를 쓰는 와중에 새로운 문자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네가 간절하지?][수업 끝나고 꼭 연락해라][ㅋㅋㅋㅋㅋㅋㅋ] 태섭이 지우는 글자 위로 대만의 문자가 견고하게 쌓였다. 어이가 없었다. 입부가 선착순도 아닐 텐데 뭐가 간절 하다는 거야? 헛웃음을 뱉으며 문자 하나만을 달랑 보냈다.
[ㅈ]
[ㅗ]
대만이 보낸 문자에 미간을 찌푸린 태섭은 심각한 얼굴로 책상에 다시 이마를 갖다댔다. 이게 무슨 드립이야 도대체. 정말, 매순간 이러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도대체, 이 심장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 거야. 나야, 정대만이야. 출석을 부를 때쯤에야 고개를 든 태섭의 이마가 제 마음인양 빨개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제 몸 어디든 빨갛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은 정대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는다면 대만이 무엇을 하든 거기에 휘둘릴 것 같다. 제 마음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다 준것처럼 느껴졌는데. 이게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주인이 아닌 내 몸이 말이 돼?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빳빳이 쳐든 태섭은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로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태섭은 언뜻보면 수업에 집중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되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나, 송태섭이야. 그, 송태섭.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내가.
“어디에요?”
-식당. 오늘 학식 제육볶음이다. 얼른 튀어와.
드립에 홀라당 넘어간(정확히는 해석 오류를 일으킨) 태섭은 문자도 아니고 무려 전화로 먼저 연락을 했다. 식당에서 사람들과 희희낙낙하고 있는 대만을 본 순간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가, 저를 보자마자 알은체를 하며 여기라고 흔드는 손을 본 순간 곱게 내려갔다.
“선배님.”
“어, 정대만. 왔어? 어라.”
“인사해라. 주장님이야.”
“안녕하십니…”
“걔 왔네.”
“까….”
“네.”
밥을 먹자마자 농구부로 간 태섭은 마치 저를 아는 듯이 구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걔를 남발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기시감을 애써 무시하며 주장이라는 사람과 부원들 그리고 대만까지 여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얼른 써. 종이를 내미는 대만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이 얼굴에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뭐가 이렇게 신이 났어? 그럴 일은 하나도 없는데도 이런다. 이러면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하게 된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팔을 부딪히는 대만이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조금 더 예쁘게 써라. 신경써서 또박또박. 이게 뭐냐? 대만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종이 속 이름을 가리켰다. 그 순간, 그 손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시비를 걸 작정으로 했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어떤 식으로 쓰는 걸 원해요? 흘림체? 고딕체? 어떤 것이든 원하는 이름을 써줄게요.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줄 때까지 써줄게요. 그러면. 그렇게 한다면.
“정대만.”
“네.”
“후배 들어와서 신났냐?”
“네. 얌마, 좀 성의있게 쓰라고.”
이성적인 머리가 시그널을 주었다. 송태섭. 자유 의지 박탈.
“좋-댄다.”
“그건 아니고요. 와. 진짜 더럽게 쓰네.”
“이 얼굴이? 내가 보고 있는 네 얼굴은 지금 쪼개고 있는데? 그리고 너 자꾸 나랑 이야기하는데 송태섭 보면서 말할래?”
대만이 대화를 하는 동안 제 마음이 가는대로 입부 신청서를 쓴 태섭은 주장에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주장은 입부 신청서를 손에 쥐고 호오… 소리를 내며 한 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태섭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대만에게 넘어가려는 관심을 멈출 수 있었다. 이 사실이 문득 끔찍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피곤했다. 감춰두기로 작정 했으면서 이런식으로 그러지 못하는 순간을 목도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매사, 매순간, 신경을 곤두세우면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정대만이 멋대로 들어온 것이니까 이해했다. 인정까지 했다. 하지만 가끔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좋아할지, 싫어할지, 그런 것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고 싶었다. 그런데도.
“이야기 많이 들었어. 경기도 쭉 봤고.”
“감사합니다.”
“정대만이 입학식 날부터 하도 걔 온다고 신난다며 노래를 불러서 너 걔 됐어.”
“말씀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 노래까지는 안 불렀어요. 신나지도 않았고.”
“거울 보여주랴? 그때 네 얼굴이 지금이랑 똑같아. 야, 걔야. 네가 좀 봐줘라. 선배 얼굴이 어떠시냐?”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 때문에 웃고 있는 거잖아. 이 얼굴을 어떻게 신경쓰지 않을 수가 있어. 이 얼굴이 어떻게… 좋지 않을 수가 있어.
“신청서 다시 쓰겠습니다.”
“어? 뭐 잘못 썼냐?”
“네.”
“어디가? 다 잘 쓴 거 같은데?”
“홧김에 날려썼어요.”
“에엥?”
“그리고, 걔가 개로 들리는데, 제가 더 신경써서 듣겠습니다.”
“어…?”
“으하하!”
종이나 다시 주십쇼. 평온하게 말하는 태섭의 목소리가 대만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이것들 진짜 또라이 아니야? 주장의 말이 하나도 타격이 없었다. 타격은 늘 저 웃음소리에 받았다. 백발백중으로 태섭을 움직이게 했다.
태섭은 주장이 뭐라든 신청서를 다시 썼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였다.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썼다. 저가 봐도 마음에 들었다. 그걸 본 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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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21. 대운 글로 쓰다가 안 쓸 것 같아서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