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너와 내가 있을 때는 늘 그랬다.
별 것도 아닌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웃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싸우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때는,
우리 어제 왜 그런 말을 했지?
우리 어제 왜 싸웠지?
우리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지?
우리 어제 이거 했었나?
그럼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내요
바보 같잖아, 그건
안 그래, 생각해 봐요
이제는 너무 자연스러운 거야, 우리가 함께 하는 게.
무너질 뻔한 날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 무서울 때가 있었다.
하루종일 감정의 고조가 없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었다.
그날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이,
기를 써가며 이기겠다고 싸우던 순간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매 순간, 오늘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날보다 훨씬 더 좋았다.
훨씬 더, 살아있다고 느꼈다.
태섭이 뻗은 손에 손목을 잡히고, 끌어당겨지고, 입술이 닿은 순간.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잡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열게 만들고. 혀를 낚아채고, 혀를 엮고, 고개를 꺾고, 코가 부딪히고, 입술이 빨리면서.
아, 나 지금 살아있구나.
이게, 살아있는 느낌이구나.
이 느낌 되게, 기분 좋은 거였네.
대만은 태섭의 손을 잡아 내린 뒤, 태섭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태섭은 그 손을 붙잡았다. 대만은 태섭이 잡은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대만이 움직이는 대로 손을 움직이고, 대만의 손이 제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것을 느끼면서 태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만의 침묵이, 불안했다.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대만과 짧은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가 떨어졌다. 태섭은 대만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보지 마. 아까처럼 무슨 말이라도 해. 소리라도 쳐. 화를 내. 이러지 마.
이렇게 나를 또 그냥, 보내지 마.
“태섭아.”
“형.”
“출국 해.”
“형,”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 줘.”
“…제발.”
“가서, 한동안 못 봤더니 첫사랑이 못생겨져서 뻥 차버리고 왔다고 말해.”
“혀엉….”
“그리고 다시는. 내 이야기를… 하지 마.”
대만은 웃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태섭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을 동그랗게 뜨는 태섭을 보고서야 대만은 안심했다. 그제야, 태섭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제대로 보는 것이 두려웠던 얼굴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나를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 수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는 얼굴을. 지금도 사랑해 마지않는, 너를.
회의실에서 나오며 대만은 한숨을 뱉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올라오는 숫자를 보다가, 태섭의 손을 잡았던 제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언젠가, 태섭이 그랬듯이. 주먹을 쥐는 이유를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면 된 거다. 이거면 된 거야, 정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거의 닫힌 순간, 저 멀리서 들리는 다급한 발소리를 들으며 대만은 눈을 감았다. 협회장과 단판을 짓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어떤 목소리를 잊기 위해서. 네가 원하는 걸, 잊기 위해서.
나 좀 욕심내주라
“…….”
내버려 두지 마라 제발…
“…….”
있잖아, 태섭아.
사실은, 내 첫사랑은 네가 아니야. 이 말을 들으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할까. 배신당한 표정을 지을까, 그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을까. 너라면, 상관없다고 말하겠지.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 그런 사람이니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잖아. 내 첫사랑은 네가 아니어서, 그래서 우리가 이루어졌던 건가 봐. 그런데, 내가 너의 첫사랑이라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커서 결국에는 이렇게 됐나 봐. 그런 거라고,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사람들이 그러잖아. 첫사랑은 첫사랑일 때가 아름다운 거라고. 첫사랑으로 남겨 둬야, 의미가 있는 거라고.
“…….”
그냥, 그런 거라고.
그런, 거라고.
그렇게 그냥.
그렇게…
“…….”
잡
아
줘
잡
지
마
…계속, 몰라주면 안 될까.
CATCH ME
주말 내내 대만은 집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업무용으로 쓰는 핸드폰만 켜두고 개인용으로 쓰는 핸드폰은 주말 내내 꺼두었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깜짝깜짝 놀랐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으면서, 손등으로 이마를 가리고 천장을 보면서, 머리를 비우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평가전에 대비한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 녀석들의 컨디션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
태섭이 최대한 빨리, 출국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태섭의 말을, 생각하지 않는 것.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밥을 챙겨 먹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억지로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업무 확인을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를 훑는 대만은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었다. 평가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문자, 후배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는 문자, 아무쪼록 태섭이 있을 때 잘해보라는 문자. 대만은 이런 문자들을 느리게 훑었다. 한숨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았다. 이들의 말은 늘 그랬듯이 무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려니. 곡해하지 않는 것.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그러려니, 그러려니.
먹은 음식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젖은 손을 타월로 닦고, 식탁에 올려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 사이, 문자가 와있었다.
[녀석들이 월요일이 송 선수 생일이라고 파티를 하자고 성화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유 코치의 문자에 대만은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건 도무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대만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소파에 앉았다. 문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입력창을 눌렀다. 키보드가, 누르지 못할 사진처럼 보였다. 대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키보드 위에 엄지 손가락을 올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동안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자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들 속에서 태섭의 생일을 웃으면서 축하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태섭의 생일이 스쳐 지나갔다. 첫 생일 축하 때, 딸기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를 받자마자 할 말을 잃고 제 얼굴을 쳐다보던 어린 태섭이 다른 케이크 좀 사주면 안 되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던 어른이 된 태섭의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형만 있으면 되는데. 매년 생일 때마다 듣던 말. 내년 생일도 기다릴게요. 당연하다는 듯이 미래를 약속하던 말. 그 말이 선명한데 그 약속을 깬 내가 어떻게, 너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어. 긴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를 두드리려는 찰나, 새로운 문자가 들어왔다.
[평가전 관련하여 기자회견 인터뷰가 월요일에 잡혔습니다. 아침 11시고요, 협회 건물 13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
대만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기자회견이 잡힌 거라면, 바로 코트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한심해서 대만은 머리를 젖힌 채로 눈을 감았다.
사랑하잖아. 나 사랑하잖아요, 형.
망할. 빌어먹을.
태섭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방금 들은 것처럼 선명해서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려니. 하는 게 힘이 들었다. 그 말에는 도무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 하는 선배님~ 생일 축하합니다!”
탈의실 문을 열자마자 생일 축하 노래 세레머니를 받은 태섭은 얼떨떨한 얼굴로 선수들과 유 코치를 쳐다보았다. 제 주변을 둘러싸며 축하의 말을 건네고, 폭죽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떨떨한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며 케이크를 받은 태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딸기로 장식된 케이크였다.
“이건 어떻게….”
“정 감독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송 선수 딸기 케이크 좋아한다고.”
“…….”
“이거 찾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는데…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굳은 얼굴이 이상한지, 유 코치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태섭은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라고 말하며 유 코치는 웃었다. 아, 그러니까 제가 이 케이크를 찾으려고요… 감독님도 빨리 말씀해 주시면 좋았을 걸, 늦은 밤에 연락해서는 태섭이는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아, 제가 말을 깐 건 아니고요, 감독님께서 송 선수더러 태섭이라고. 하하. 처음 들어봤네요, 감독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거.
“그래서, 어디 갔어요? …선배.”
“협회장실 가셨어요.”
“왜요?”
“회장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시던데요?”
케이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태섭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월요일 아침부터 협회장실에 할 말이 있다고 찾아가? 케이크 밑판을 잡고 있는 태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아는 정대만이라면 분명히.
“그나저나 선배님, 진짜예요?”
“…어?”
“저희 평가전까지 계신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이 판 좁잖아요. 벌써 소문 다 퍼졌어요. 그래서 기자회견도 같이 하시는 거잖아요.”
유 코치의 말에 태섭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기자회견이요?”
“…왜 처음 듣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시지?”
“처음 들으니까요.”
“네에? 진짜요? 어제 감독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11시에 평가전 때문에 기자회견이 있어요. 슈트 입으셔야 할 것 같은데. 유 코치의 말을 들으며 태섭은 케이크를 옆에 있던 선수에게 건네고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협회장실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태섭은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아닌 정대만이라면 분명히, 혼자 하겠다고 했을 거고 그리고, 평가전까지 내가 있을 이유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분명히.
“기자회견을 혼자 하겠다고?”
“예.”
“왜? 송 선수 어디 아파?”
“아닙니다.”
“그런데 왜 혼자 해?”
대만은 뒷짐을 쥔 손을 꽉 마주 잡았다. 협회장실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A는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대만을 쳐다보았다.
“왜 같이 하자고 하는 건지 모르지 않을 텐데? 한때 스타 선수였으니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저 혼자 해도 충분합니다.”
“아. 아직 스타성 있다, 이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시안게임 감독 후보에 있던 A는 대만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대만은 알고 있었고, 그런 적대감이, 후보 탈락 이후 더 심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건, 선배이기 때문이었다. 라인이니 뭐니 정치적인 것들 다 떠나서, 한때 대만을 아끼던 선배여서 그랬다. 대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A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협회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송태섭 선수, 곧 출국합니다.”
“그런 말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회장님?”
“송태섭 선수는 미국 팀 소속입니다. 여기 소속이 아닙니다. 같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한들, 화제성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걸 결정하는 건 납니다, 정 감독님.”
이 이상, 필요 없는 말을 꺼내지 말라는 뉘앙스를 내비치는 협회장과 A를 보면서 대만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도 사랑해 마지않는, 너를.
“송태섭 선수가 한국에 있는 동안 책임자는 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평가전 결과에 책임이 있는 건 접니다. 이기든 지든, 송태섭 선수까지 평가전을 포함한 그 어떤 결과에 대한 책임을 받게 할 수 없습니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나를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송태섭을.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빨리 나가려던 태섭은 눈앞에 있는 대만을 보고 그 자리에 멈췄다. 대만 역시 놀란 표정으로 태섭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내리고 타지 않아 문이 닫히려고 했다. 정신을 차린 태섭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다시 눈이 마주친 대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안 내려?”
“선배 보려고 온 거예요.”
대만은 아무 말도 없이 태섭을 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태섭은 1층 버튼을 누르는 대만의 팔을 붙잡았다. 대만은 태섭이 제 팔을 잡아채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피곤한 듯이 눈을 깜빡이며 한숨을 쉬는 대만을, 태섭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층으로 가는 거 아니잖아.”
“어.”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알아.”
“…진짜 이럴 거예요?”
“송태섭.”
“…….”
“태섭아.”
“…왜요.”
그렇게 부르면,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거 알면서.
“나, 이기고 싶다.”
하. 태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면 되잖아.”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냐?”
“기억 안나.”
“기억나게 또 말해줘?”
“형이야말로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
대만은 아무 말 없이 태섭을 쳐다보다, 짧은 숨을 뱉은 뒤 입술을 열었다.
“다 알고 있다니까 말하는 건데, 너 곧 출국해야 해. 그렇게 만들 거야.”
“진짜 이럴 거야?!”
“평가전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주라. 프로세스 짜는 거 좀 도와줘.”
“이러지 말자. 어? 진짜 이러지 마요.”
태섭은 바라고 또 바랐다. 이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움직이기를. 아니면 아예, 고장이 나기를. 마음 같아서는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대만의 눈을 끈질기게 쳐다보았다. 표정만큼이나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에서 조그마한 틈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그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틈으로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완전히 닫혀 버린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태섭은, 대만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손을 뿌리치지 않는 대만이 오히려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단 한 번 표현한 감정이, 감추고 숨기느라 바빴던 마음의 빗장을 풀어버렸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나한테 제발, 이러지 말라고. 대만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던 건 대만이, 손을 뻗은 대만이 제 머리를 만지며, 웃었기 때문이었다.
“생일이잖아.”
“…….”
“여기서 내리면 오늘만큼은 우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대만은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태섭의 등과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려난 태섭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버튼을 누르는 대만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 들어간 대만을, 문이 닫히면서 점점 사라지는 대만을 그저 쳐다보았다. 입술을 다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손으로, 마른 얼굴을 몇 번이고 쓸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떠밀기 전에 했던, 대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응? 태섭아. 그 언젠가 불러주던 말투로, 다정하게. 마치, 헤어진 적은 없었다는 얼굴로.
그리고 다시는. 내 이야기를… 하지 마. 하지 말라면서 웃었던 얼굴.
지겹도록 반복해서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
닫힌 엘리베이터를 보며 태섭은 대만의 손이 닿았던, 대만의 손이 밀었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어깨를 꽉, 쥐었다.
대만은 유 코치에게 자동차 영업소에 갔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을 한 뒤, 핸드폰을 껐다. 업무용, 개인용 모두.
기자회견이 끝난 후 대만은 기자들의 질문에 노코멘트 하며 협회 건물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대만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태섭이 도와주는 건 사실이나 평가전이 열릴 때까지는 아니라는 말. 태섭이 출국하기 전 평가전과 아시안게임을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조력을 받기로 했다는 말. 그 어떤 질문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자회견에 기자들과 협회 관계자들은 기어코 말을 얹었다. 애초에 계획된 대로 흘려가지 않고 멋대로 진행된 대만의 방식에 화를 내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건, 못 들은 척하는 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건물을 나가기 전에 마주친 태섭이 마음에 걸렸다. 편안해 보였던 얼굴.
쓸데없는 말, 듣지는 않겠지. 들었다고 하더라도,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면.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몰라도 내 말은 잘 들었던 너라고, 예전의 네가 지금도 그럴 거라고 대만은, 믿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아니, 사실은….
The sun doesn’t shine when you’re not here
Baby, am I making things clear?
Tell me that everything’s alright
Can you love me tonight?
택시 안에서 흘려 나오는 노래에, 대만은 천천히 눈을 떴다. 태섭과 헤어진 이후로, 노래를 잘 듣지 않았다. 우습게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인 것만 같았다. 가사에서, 리듬에서, 제목에서, 조그마한 것에도 태섭이 생각나서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은 이미, 아니,
“다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리며, 햇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서 대만은 생각했다.
생각하지도, 의식을 하지도 못한 순간에서조차 나는 이미,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보다 부품이 빨리 들어와서요. 교체만 하면 되는 거라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
“그동안 불편하셨겠어요.”
“아닙니다.”
터치패드에 사인을 하며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카드와 영수증을 받고, 정비공에게 사인을 한 다음 차를 양도받았다.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벨트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경기장으로 가야겠지. 내비게이션에 저장되어 있는 주소를 클릭하고, 몇 분이 걸릴 것이라는 안내음을 들으면서 대만은, 잠시 머리를 기댔다. 조용한 차 안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지도를 보고 있던 대만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뻗었다. 핸드폰을 쥐고, 핸드폰을 카플레이와 연결했다. 아까 전에 들은 노래 가사가 뭐였지…. 포털창에서 기억나는 가사를 검색했다. 제목을 기억해 놨다가 유튜브로 들어가 노래를 검색해서 듣기를 몇 번 반복했다. 대만은 귀찮음을 무릅쓰며 몇 번 더 반복했다. 마침내 택시 안에서 듣던 음악의 전주가 흘려 나왔을 때, 대만은 운전을 시작했다.
Maybe I’m making things too hard
Tell me that everything’s alright
동영상을 꾹 눌러 연속 재생으로 바꾸어 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운전을 했다. 잠시 후 X 교차로에서 좌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는 동안 노래는 계속 흘려 나왔고, 무표정한 얼굴로 태섭을 생각했으며, 차가 터졌던 장소에 다다라서는,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멍한 얼굴로 핸들을 보았다. 노래를 들었고, 태섭을 생각했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차키와 핸드폰, 이어폰을 손에 쥐고, 익숙하게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익숙한 길을 걸어, 태섭의 전광판에 다다라, 전광판 앞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태섭의 생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저마다 인증샷을 찍고, 무언가를 들고 있었으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걸 보면서 대만은,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하고, 아까 들었던 음악을 들었으며, 태섭을 생각했고, 태섭을 보았다.
The mood isn’t right when you’re too far
“생일 축하합니다, 송태섭 선수! 사랑해요!”
모여있던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며 외치고, 손을 흔들었다. 대만은 그들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Can you love me tonight?
대만은 그들과 전광판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 차에 올라탔고, 카플레이로 음악을 재생하고, 노래를 들었다.
Can you love me tonight?
그들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송태섭 선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 해요.
“…….”
삑 삑 삑 삑 … 비상등 소리를 들으며 대만은 눈을 감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그들이 나보다 더 나아보였고, 나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경기장으로 돌아와 훈련을 하는 동안, 선수들과 유 코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훈련에 전념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해서 대만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뒤집어 놓았거나, 한 소리를 들었거나. 훈련이 끝나고 태섭의 생일파티를 하기로 해서, 그때 제대로 한턱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없어야 편하게 먹으려나 싶은 고민을 잠깐 했으나,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 다시는 같이 할 수 없을 태섭의 생일을 망치지 않는 것. 대만은 이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머지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대만은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생각했다.
태섭 역시 평소처럼 선수들과 호흡하고, 대만과 함께 전략을 세웠다.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프로세스를 만들려고 해서 대만은 조금 놀랐지만, 곧 그런 태섭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더 편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줘서 오히려 더, 좋았다.
“오늘은 좀 마셔도 되죠, 감독님?”
“내일도 훈련 있다. 적당히들 마셔라.”
“예에!”
“이것들아, 생일 축하 자리인 거 잊지 마라. 늬들 좋자고 마시는 거 아니다.”
“예에!!!!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고맙다.”
잔이 부딪혔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대만은 모두와 함께 술을 원샷했다. 크으, 캬아, 으으, 좋다, 시끄러운 소리가 룸을 가득 메웠다. 대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유 코치가 주는 술을 받았다. 신날 거예요, 합법적인 술파티 날이니까. 유 코치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태섭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대만은 유 코치에게 술병을 받아 태섭에게 내밀었다. 태섭이 잔을 내밀었다. 그 잔에 술을 채우면서 대만은 태섭을 힐끔거렸다. 여전히 태섭은, 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은 짧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오랜만이네.”
“응.”
친근한 대답에 흠칫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뭐, 그닥 오랜만인 것 같지도 않지만,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태섭이 웃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 코치가 자자, 하며 분위기를 유도했다.
“다시 원샷, 실시!”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됐으니까 이제 그냥 편하게 마셔.”
“아싸!!!!”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대화의 절반에 욕이 난무하는 소리, 저들끼리 잔을 부딪히는 소리. 대만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좋을 때죠?”
“하하. 그렇죠.”
“감독님이랑 송 선수도 저런 때가 있었을 텐데 말이죠.”
“저희만 그런가요, 코치님도 있었죠.”
“네. 저때가 좋았어요.”
“그랬나.”
“아니셨어요? 설마 지금이 더 좋은 건 아니시죠?”
유 코치의 말에 대만이 웃었다. 유 코치와 함께 웃으며 잔을 부딪히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술을 마셨다. 다시 술을 채우려는 태섭의 손을 낚아챈 건, 태섭의 옆에 있던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자작하면 연애 못 하지 말입니다!”
“맞아요! 그런데 선배님,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첫사랑 빼고.”
“아~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물어보면 안 돼요?!”
“야야 이럴 때는 그냥 맥이고 물어보는 거야. 선배님 짠짠짠!”
“이것들아, 선배한테 맥여? 맥인다고 이 건방진 놈들아?”
“코치님 덜 취하셨다! 자, 짠짠짠? 감독님도 짠짠짠?!”
선수들 중 가장 시끄러운 녀석이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하자, 밑도 끝도 없이 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자코 지켜보려고 했던 대만도 분위기에 휩쓸려 술을 마시게 되었다. 태섭은 그런 대만을 지켜보기만 했다. 언젠가 대만이 그랬듯, 술을 마시는 척하며 버리고, 술은 조금만 마시고 물을 마시며 최대한 술에 취하지 않으려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긴장이 풀려 자연스럽게 웃게 되는 대만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가끔 배를 잡고 크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제 앞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만이 좋았고, 그런 대만을 보고 있는데도 그립고, 보고 싶었다. 이야기를 하는 얼굴, 손짓을 하면서 중얼거리는 입술, 움직이는 눈썹, 빨개지는 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하얀 손, 가끔, 제 얼굴을 살피는 눈. 그 모습을 전부 태섭은, 턱을 괸 채로 지켜보았다.
“감독님…. 에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하겠습니다.”
유 코치의 말에 대만은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여전히 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대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유 코치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은 아까 전부터, 저를 쳐다보고 있는 태섭이 신경쓰였다.
“하하, 예…. 걱정 안 합니다. 저 능력 있잖아요.”
“네 당연하죠! 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정말 송 선수 안 갔으면… 좋겠거든요?”
“…….”
“감독님이 코트에서 편한 얼굴 하시는 거 솔직히…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건데….”
대만의 시선이 유 코치에서 태섭에게로 넘어갔다. 태섭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은 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녀석, 어깨동무를 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녀석,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 녀석.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핑 도는 걸 보니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이 이상 마시면, 그랬다가 사고라도 치면 아니, 태섭에게 그 사고를 치게 되면. 대만은 상황을 정리하려 유 코치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 코치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대만의 손을 낚아채 그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감독님 제가요, 예? 제가 잘하겠습니다, 감독님 보필 잘 하겠슴돠.”
“예, 든든합니다. 이제 그만 갈까요? 많이 드셨어요.”
“감독님 압박하는, 읍,”
유 코치의 입을 틀어막고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집에 가자! 어깨에 유 코치의 팔을 두르고, 선수들을 깨워 부르는 대만을 보면서 태섭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만과 함께 상황을 정리하고 택시를 불러 태우고, 마지막으로 유 코치까지 대리 기사를 불러 보냈다.
“…….”
“…….”
대만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11시 30분. 아직, 태섭의 생일. 대만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만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몸을 돌려 태섭을 마주보았다. 태섭 역시 몸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는 대만 때문에 태섭은 그제야 눈을 깜빡였다. 사람들이 없는데도 웃고 있는 대만이 현실같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지내자더니, 정말 그럴 생각인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 이러는 건지.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태섭은, 대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가냐?”
“택시 타야죠. 형은.”
“나도.”
“차 수리 끝나서 가져왔다며. 대리 불러요.”
“됐어. 내일 운전 못할 것 같고 또,”
“또?”
“아니다. 너 먼저 들어가라.”
그 말에, 태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모르는 척하며 핸드폰을 꺼냈다. 택시 어플…. 중얼거리는 입술을, 핸드폰 불빛에 비친 대만의 얼굴을, 느리게 깜빡이는 눈을, 태섭은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금방 온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드는 얼굴을 보자마자 태섭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할 말. 없어요?”
태섭의 물음에 대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전 태섭이 그랬듯, 대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손에 쥔 핸드폰을 힘주어 잡았다. 핸드폰이 한 번 진동을 하며 울렸다. 아마도, 택시가 다 왔다는 알림 문자일 것이다. 대만은 도로 끝에서 차 한 대가 오는 것을 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차를 보면서 대만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한다.”
“…….”
“앞으로 늘…. 건강하고. 지금처럼 농구 잘하고. 지금처럼 잘, 살고.”
“…….”
“행복했으면. 좋겠다.”
택시가 옆으로 와서 섰다. 대만은 택시로 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얼른 타. 그렇게 말하는 대만을 태섭은, 제자리에서 쳐다만 보았다. 그날과 비슷한 데자뷰에 미간을 찌푸릴 뻔했다가 그냥, 웃었다. 얼른. 태섭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천천히. 천천히, 대만이 가까워지고 천천히, 택시에 올라탔다. 태섭이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한 후 문을 닫은 대만은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사라지는 택시를 보았다. 그때처럼 눈이 마주쳤다. 태섭의 얼굴이 점점 멀리, 점점, 작아졌다. 그런 만큼 대만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두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후, 한숨을 내쉰 뒤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데, 여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또,
“…야.”
대만은 태섭의 전광판 맞은편 벽에 기대앉았다. 세운 무릎을 껴안고, 그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전광판 속 태섭을 쳐다보았다.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서둘러 귀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안내 방송을 듣고서도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 들어갔냐? 물어보고 싶은데 못 물어보겠네.”
제 앞으로, 서둘러 가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들 속에서 태섭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태섭아.”
대만은 조금 더 제 무릎을 감싸 안고, 그 무릎에 이마를 갖다 댔다.
“생일 축하해.”
“그전에는, 나 혼자 집에서 네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는데. 올해는 얼굴 보고 축하해 줬네.”
“축하를 해준 건지, 잘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낮에, 여기 왔었거든. 차를 타고 가면 되는데. 그 차를 세우고서 굳이 왔어. 완전 어이없지 않냐.”
“차가 없어서 불편하지 않았냐고 정비공이 묻더라고. 아니라고 대답했어. 진짜, 괜찮았거든.”
“오히려 차가 더 불편했어. 조용하고. 아무도 없고. 답답하지 않고. 쾌적하고.”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여기 왔었거든. 그런데, 네 팬들이 엄청 많은 거야.”
“네 생일이라고, 축하 인증샷? 뭐 그런 걸 찍으러 왔었나 봐. 너 그런 거 다 보냐?”
“그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데….”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걸 보는데….”
“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였어. 나는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너를 보고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아니,”
“…안 행복해.”
“나 어떡해?”
“왜 왔냐, 너.”
“왜 와서…. 안 행복한 걸 알게 했어? 안 그랬으면… 그저 그렇게 살 수 있었는데.”
“그저 그렇게 살면서, 네가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아직까지 내가 너에게 첫사랑일 수가 있구나 하고 살았을 텐데.”
“왜 와서 너를. 왜, 와서….”
“왜 이제야 왔냐고 물어봐야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목소리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앞에 누군가 앉는 것을, 어떤 손이, 손목을 잡는 것을, 그 손이, 매우 익숙하다는 것을 대만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형.”
“…….”
“얼굴 좀 보자.”
“…….”
“싫어? 알았어요. 이렇게 들어.”
털썩, 하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들면 들수록 태섭이, 전광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태섭 그 앞에, 진짜 태섭이 있었다. 그 태섭이,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
“여기서 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
“몰라서 묻는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
“대답 안 해? 알았어요. 그러면, 지금은 잘 모르는 걸 물어볼게요. 이번에는 꼭 대답해줘야 해. 형이 아니면, 누구도 대답할 수 없으니까.”
태섭은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이 대만의 손에 닿았다. 손가락 끝이 닿고, 그 손가락을 잡고 엮은 뒤, 잡아 내리면서 태섭은, 느리게 깜빡이고 있는 대만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고, 똑바로, 제대로 들으라는 듯이,
“사랑해요.”
“……!”
“사랑해.”
“…….”
“…사랑해, 정대만.”
“…….”
“사랑해.”
“…….”
“단 한 순간도 형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
“형이 헤어지자고 말한 순간에도. 형이랑 떨어져 있었던 순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대만을 너무 사랑해.”
“…….”
“사랑해.”
“…….”
“응? 사랑해요, 형.”
대만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태섭은 그런 대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랑해, 내가 많이 사랑해, 형, 정대만, 사랑해. 여태 하지 못했던 것까지 다 말하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사랑한다고 쏟아내는 태섭을 보면서 대만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형이 아니면, 내가 아니면,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말.
오로지 나에게만 허락되는,
나만,
나만이 너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말.
“…….”
“…….”
“…해.”
“…응.”
“…사, …”
“응.”
“…사…ㄹ…ㅏㅇ…해.”
“응….”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태섭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들썩이는 어깨를 쳐다보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사랑한다는 말밖에 없었어. 내게 있어서 형에 대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어. 형이 있어서, 형의 사랑이 있어서 나는, 나일 수 있었어.
정대만이 있어서 송태섭은 완벽해진 거야. 그러니까,
“…보내지 마요.”
“응….”
“욕심 내줘.”
“응….”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마.”
“…응.”
“나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으응.”
“나를 이 이상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지 마요.”
“…….”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태섭아, 그건,”
“형이 할 건 단 하나라고 그랬지.”
“…….”
“내 사랑을 돌려달라는 건, 그런 거야. 내가 형에게 뭐든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이야기라고.”
태섭이 웃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태섭은 찌푸린 대만의 미간을 엄지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간섭하게 해 줘.”
“…….”
“형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만들어 줘요.”
“…….”
“형이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만들어 줘요.”
“…….”
“형이 화내는 거, 슬퍼하는 거, 좋아하는 거, 아무튼, 형의 모든 것을 내가 껴안을 수 있게 해줘요.”
“…….”
“그러려면 형은 허락을 해야 해.”
“…….”
“나를 형 옆에…. 내가 형 옆에 있는 걸 허락해 줘요.”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손등으로 거칠게 닦고, 제 앞에 있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웃고 있었다. 그런 태섭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대만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웃냐는 태섭의 말을 들으면서, 태섭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대만은, 환하게 웃었다.
“전광판 속에 웃고 있는 너보다 지금의 네가 훨씬 더 환하게 웃고 있어서.”
울면서 웃고 있는 대만의 얼굴을 보던 태섭은 대만의 두 손을 꼭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연하지. 형은 내 인생 전부나 다름 없는데.”
그 전부가 내 앞에, 내 품 안에 있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가 있어.
다정한 거짓말이라면 필요없어
내가 원하는 건, 당신
“한국에서의 일정은 만족하십니까?”
“네. 만족합니다.”
“돌아가면 시즌 준비 하시는 거죠?”
“네. 왜 안 들어오냐고 난리여서, 들어가면 훈련에 전념할 것 같습니다.”
“전념할 수 있으십니까? 최근에 생일 전광판 앞에서 촬영한 사진을 올린 SNS로 화제인데요.”
“첫사랑과 다시 이루어졌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데 사실입니까?”
기자들에 둘러싸여 있던 태섭은 그 질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리고, 질문을 한 기자를 쳐다보는 태섭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모두 태섭의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섭은 그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
“다시 이루어졌다는 말보다는, 이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내 오랜 첫사랑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전보다 더 많이, 사랑할 거예요.”
“이번 시즌,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누구보다 강해질 겁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전광판 앞에서 브이자를 하며 웃고 있는 사진]
song_no1guard_7 ZERON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