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것이, 진짜 있었다.
대만은 어색하게 머리를 매만지며 제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꺄르르 군단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지가 않지. 태섭에게 바쁘다고 한 건, 놀리려는 것도 있었지만 저들이 어색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보는 시간이 많아진다거나, 광어가 먹고 싶다느니, 생선 튀김이 먹고 싶다느니, 여기에 소주 한 잔 걸치면 너무 맛있겠다는 이야기를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한다거나, 금요일은 좀 여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굳이, 구욷이, 시선을 마주치면서 한다거나. 나 모르게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니기를 바랐는데. 저번에 주임님이 궁금하다고 하셨던 일식집 있잖아요! 거기 예약걸어 놨어요! 전화했을 때 마침 딱! 취소된 게 생겨가지구요! 완전 럭키비키죠! 여기에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가는 와중에, 럭키비키가 뭐냐고 물었다가 계몽을 해주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고작, 이런 걸로요…?
먼저 들어가세요.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갈게요.
대만은 어깨를 흠칫거렸다. 저 말 한 마디 했다고 받은 시선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슨 말을 했냐면 그건 또 아니어서,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눈빛이었다. 뭔가를 확신하고 있는 것도 같았고 뭔가를… 추궁당할 것 같은 그런 눈빛이어서, 빨리 끝내고 들어가겠다는 말만 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천천히 하셔두 돼요! A가 말했다. 저희가 알아서 주문해놓고 있을게요! C가 말했다. 회 먹을 거니까 청하 괜찮으세요? E가 물었다. 시간 다 됐어요, 얼른 들어가요. B가 상황을 정리했다. 대만은 그들이 들어간 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하다. 진짜, 싸하다.
집에 가고 있냐?
-…네.
대답 늦네. 삐쳤냐?
-아니거든요?
대만은 괜히 신발 끝에 걸리는 돌을 툭 치는 걸 반복했다. 아니라고 해놓고 말이 없는 걸로 봐서는 삐친 게 분명한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전화를 하는 내내 또 싸울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다들 합심해서 마련한 자리라 어쩔 수가 없었어.
-…….
너 회 잘 못 먹잖아. 어차피 와도 소용없었을 거야.
핸드폰 너머로 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하려는 건지, 삼키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숨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 숨을 뱉는 동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디를 보고 있을지. 하려는 거면 뭔지, 삼키려는 거면 뭔지. 이런 것들을 상상했다. 그래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태섭이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다. 아무리 생각하고 상상해보려고 해도, 군인으로 있을 태섭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군대 면제를 받은 게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왔으면, 네가 어떻게 하고 있을지 알 수 있을 텐데. 네가 물어보지 않아도 내가 먼저 이것저것, 알려줄 텐데.
-약속해요.
지금도 이런 생각이나 든다.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는데.
어떤 거?
-끝나면 연락해요. 출발하기 전에도 연락해요, 꼭.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대답 먼저 나온 게 이거였다. 어이가 없어서 뒷머리를 만졌다. 왜 대답이 없어요? 아까보다 조급한 목소리였다. 이건 확실히 알 것 같아서 고개를 젖혔다.
알았어. 꼭 연락할게.
-진짜예요.
어. 진짜.
-진짜, 진짜예요.
이 자식이 진짜. 진짜, 진짜라고. 진짜진짜진짜!
발끈해서 주머니 안에서 손을 꺼냈다. 그대로 엄지 손가락을 올렸다. 도장을 찍어줄 사람은 없는데도 그랬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걸 송태섭이 봤으면 얼마나 놀려 먹었을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리려다, 그대로 하늘 위로 치켜 올렸다. 태섭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듯한 헛기침도. 코를 몇 번 훌쩍이는 소리를 내더니,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보란다. 그건 내가 할 말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어깨가 움츠려졌다. 춥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는데 엄지 손가락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들어가라. 밥 챙겨 먹고.
-…밥 먹고 형이 준 마이쮸도 챙겨 먹을게요.
야, 니가 무슨…… 애새끼냐? 뭐 그런 것까지 얘기를 해…….
-그냥. 좋아서요.
아까 전 카페에서, 미친듯이 뛰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싶어서 뛰쳐 나가고 싶었을 때 나갔더라면, 이렇게 됐을까.
집에서 따뜻하게 있어라, 알겠냐.
그랬더라도 금세 녹았을 것 같다.
-네. 형.
이 순간을 멈추고 싶지 않아서 세차게 뛸 무엇 때문에.
30.
취하면 안 된다. 절대로. 대만은 이 말을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겼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려고 노력했다. 이상하리만치 술을 먹이려고 덤볐다. 신입직원도 아닌데 이럴 일인가 싶었다. 요즘에는 신입직원한테도 안 이런다. 그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희가 옆에서 노고를 다 지켜봤잖아요.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꺄르르 군단이 이럴 수 있다고 해도 오늘은 마음 편히 드세요. B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거의 질렸다는 표정으로 쳐다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B가 언제부터 꺄르르 군단과 다시 친해진 거야? B가 이들을 조금 멀리하기 시작한 시점이 회사에서 태섭이가 핫해지면서다. 설마 B한테서도 송태섭이 핫해진 거야? 그런 거야?
왜 그렇게 보십니까?
……술이나 주십시오.
대만은 B를 힐끔 노려보며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사에 믿을 사람이 진짜, 하나도 없었다. 술이 물처럼 넘어갔다.
주임님 이제 연차 쓰셔야죠.
어… 네. 언제 쓸지는 아직 안 정했어요.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빨리 다녀오셔야 되는 거 아닐까요? 팀장님이 그러시는데, 프로젝트를 좋게 본 이사님이 계시다구, 조만간 관련 업체 미팅 잡아 달라고 하셨다는데.
네. 들었어요.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꺄르르 군단과 B가 잔을 올렸다. 우리 팀의 번영을 위하여! 말이 웃겨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대만의 웃음을 보자마자 시선을 교환한 그들은 재빨리 대만의 잔에 술을 채우고 앞접시에 안주를 세팅했다. 의자를 테이블로 바싹 당기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직 술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곤란하다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술을 마실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대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C의 말투가 더 단도직입적이었다. 일단 한 잔 쭉 마시구요. 5개의 잔이 부딪혔다. 소주가 찰랑거렸다. 그걸 입 안에 털어넣었다. 바로 뱉게 될 줄 모르고.
요즘 연애 하시죠.
확실하다. 연애한다. 그들은 손등으로 축축한 입술을 닦는 대만을 보며 확신했다.
연, 그게 무슨. 안 해요 그런 거.
그런데 왜 술을 뱉으셨죠.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해보시죠.
그러면 저희가 충분히 납득을 하고 이번주 내내 일 때문에 미쳤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마지막 B의 말에 저항이라도 하듯 꺄르르 군단의 시선이 대만에게서 B에게 옮겨갔다. 그 시선에 화들짝 놀란 B가 그래도 납득이 안 되니 말이라도 해보시라며 말을 정정했다. 대만은 난감했다. 지금 당신들 사이비 신도들 같아요. 잘못된 걸 믿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이 핑핑 돌았다. 연애 상담 쌉가능. 연애 경험 유! 연애 경험 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또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안 해요, 연애.
그럼 썸 타세요?
……이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었고.
대답 못 하시는 거 봐…….
설마 설마 했는데 웬일이니…….
주임님 제발 연애는 몰래 해주세요…….
쏟아지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진 대만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없다. 말이 무슨, 모터 돌아가는 것처럼 쏟아진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시작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언제 만났냐, 얼마나 됐냐. 이런 거라면 이미 말한 적이 있다. 들은 적이 있다고요, 이 사람들아. 하지 못할 말 사이로 웃음이 비식 튀어나왔다. 그 분 생각하시는 거예요……? A가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만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술을 마셨다. 자연스럽게 그 날이 떠올랐다. 태섭이 추궁 아닌 추궁을 당했던 날. 태섭은 이들의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했다. 애매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올곧게 대답했다. 마음에 떳떳해서? 부끄럽지 않아서? 당당해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서?
그에 비하면 대만은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없어서,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애나 썸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졌다(대만 빼고). 그런 것만큼 술도 끊임없이 들어갔다(역시, 대만 빼고). 대만은 이들의 에너지에 혀를 내둘렀다. 분명히 저에게서 뭐라도 뜯어내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 같은데, 이제는 저들끼리 뜯어내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 이야기, 전에도 분명히 했을 거다. 백퍼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한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닳고 닳을 때까지. 아무일도, 없었던 걸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그냥 조용히 듣고 있었으면 될 텐데,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별 뒤에 힘들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그 이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게.
어떻게 이별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무섭지도 않아요? 걔가 없는 시간이?
헤어질 거면 연애를 왜 해요?
결국 한 소리 했다. 그러자마자 테이블이 싸해졌다.
주임님은 연애 안 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러게요? 주로 찼던 쪽이셨던 건가? 그래서 대화에 끼지 못하시는 건가?
…주로 차였는데요.
진짜였다. 그런데, 더 싸해졌다. 정말, 이이상 조용할 수는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뭘 생각하셨는지 모르겠고 이런 말 머쓱한데 저도 차일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연애를 안 하시는 거예요? 썸을 타도 연애까지 못 가고…?
상상력 도대체 뭐야? 대만은 기겁을 했다.
그래도 사랑은 해야죠.
암요. 사랑만큼 아름다운 건 없죠.
연애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어요!
그래서. 왜 연애 안 하시는데요? 아니, 일단요. 그 분은 주임님한테 마음 있대요? 있죠? 그렇죠?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걸까요?
그러려고 모인 자리니까요!
아까 네 분이서 열심히 이야기 하셨잖아요! 그거 계속 하시면 되잖아요!
싫어요!!!!
진심으로 피곤해졌다. 대만은 긴 한숨을 뱉었다. 저희가요. 이야기 진짜 잘 들어드릴 수 있어요. 우리들 얘기는 우리밖에 몰라요. 비밀 유지! 보안 철저! 의리 빼면 시체! 그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지 않으려 노력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저 조용히, 술만 마셨다. 홀짝. 호올짝. 잔을 내려놓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송태섭이랑 이야기해야 되는데.
………헤어진다면.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생각하는 게 처음이에요. 그게 무서운 것도, 처음이고.
…….
여기까지.
네에에에에에에?! 그런 게 어디있어요오오오오오오오!!
이런 이야기는 송태섭과 할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먼지 같은 마음도 털어냈다고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에게 덜 못나게 굴 것 같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말 좀 해 봐, 송태섭.
31.
도대체 지금 시간이…… 몇 시예요? 네?
눈 봐라. 아주 그냥, 눈빛으로도 한대 칠 수 있는 기세다. 한 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린 대만은 헛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야…. 울 엄마도 너 같은 소리 안 해.
기다리는 거 뻔히 알면서 늦게 오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그러는 너는 몇 시라고 기어 나오냐, 나오길?
…우리 어머니도 그런 소리 안 하거든요.
태섭이 눈썹을 올리며 대만을 관찰했다. 볼이 조금 동그란 걸로 봤을 때는 웃고 있는 것 같고. 입이 목도리 안에 있어서 취한 건지, 얼마나 마셨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였다.
그냥 내일 보면 되지, 뭘 또 보겠다고.
내 속은 하나도 모르면서.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네가 강아지냐? 어? 쪼르르 와서 반겨주게?
대만이 손을 뻗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태섭의 눈썹이 조금 내려갔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랬으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을 텐데.
……많이 마셨어요?
아니. …어. 아니? 조금.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밥 많이 먹었어?
……네.
마이쮸도 먹었나 봐? 냄새 나.
태섭이 숨을 참았다. 몸을 숙이는 대만 때문이었다. 목도리를 조금 내리더니 킁킁거린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건 모르면서, 사과맛이 더 맛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했다.
……형도 먹었나 봐요?
어? 어. 입가심으로. 어. 입가심.
왜요?
네가 연락 하라고 했잖아, 네가. 집에 못 가게 했잖아, 네가.
태섭은 시선을 피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대만을 보면서, 주머니 안에 넣어둔 마이쮸를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손바닥이 뜨거워지더니, 금세 축축해졌다. 밖에 있어서 딱딱해진 마이쮸가 말랑말랑, 녹을 것 같았다. 눈만 마주쳐도. 앞에만 있어도. 같이 있기만 해도. 그 전의 일은 하나도 생각 안 나는 줏대없는 마음인 것 같았다. 그래도 바닥에는 이것이 있다.
이 말 꼭 하고 싶었어요. 카페에서 못 해서요.
좋아해요.
발표 고생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죠.
이 말을 다양하게 하는 메뉴판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한 말을 꺼냈다. 머쓱하게 듣던 대만이 짧은 숨을 뱉는가 싶더니, 다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손길에 정말 마음이 녹았다. 대만의 손가락이 스치는 머리 세포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서, 하나하나 박제를 해놓고 싶었다. 몇 날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싶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뭐 그런 말을 낯간지럽게 해. 버럭하기도 하고. 말 많이 늘었다, 송태섭? 버벅이기도 하는 것 모두, 전부.
형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나 봐요.
…어.
그래도 다 안 하고 있는데.
……어.
다 하면 형 기절하겠어요.
………그건 모를 일이지.
그래요?
먼 곳을 보던 대만이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내렸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태섭은 그 눈을 보면서 한 발자국 다가갔다. 눈을 얼마나 빠르게 깜빡이는지, 앞은 제대로 보이는지 궁금했다.
…왜. 뭐.
나는 형을 오랫동안 보기 위해서 눈을 감지 않는데.
……뭐, 인마.
형은 나를 오래 보기 위해서 눈을 깜빡이는 거예요?
………왜.
나는 있잖아요. 눈을 감아도 형을 보기 위해서 감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일 나한테 시간 내 줘요.
…내가 왜.
오늘은 내가 양보 했으니까.
네가 뭘 양보 했는데.
둘만 있는 시간?
……약속 안 했었거든?
그러니까 지금 약속 해달라는 거라고요.
네가 양아치냐…? 내 시간을 막, 뺏어가겠다?
네.
…되게 당당하게 말하네.
같이 있고 싶어요.
…….
거짓말 아니에요.
…알았어.
진짜예요.
알았다고…….
눈을 감아도 형을 보고 있는 거라고. 언젠가는,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포도맛이 더 맛있어요. 이것도 좋아해 줘요.
…순 지멋대로네.
주머니 안에 있는 대만의 손을 꺼내어 마이쮸 포도맛과 사과맛을 쥐어주었다. 쥐어준 채로 있었다. 손가락 끝이 닿았다. 따뜻했다. 슬금슬금 움직여, 손가락 사이로 손을 집어 넣었다. 손바닥 사이에 있는 마이쮸가 떨어질 까봐, 꽉 맞잡았다. 이걸 아는 건지, 대만이 조용했다. 그러고 있다가 몸을 돌리더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이쮸 녹겠네, 녹겠어. 대만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손은 놓지 않는다. 주머니에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 않는다.
뒤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뽀얗게 올라가는 입김을 봤을 거고 봤다면, 뭐가 좋아서 웃는 거냐고 했을 거고 그랬다면, 손이 뭐야. 멱살을 잡았을 거다. 잡고, 흔들어서, 탈탈 털었을 거다. 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내 없애서, 내 마음만 집어 넣었을 거다.
좋아해. 좋아해 줘. 나 좀 좋아해 줘라. 내 시간 좀 제자리에 돌려놔 줘. 나와 같은 시간에서 살아 줘. 정대만, 제바아아아아아알!
내일 뭐 할 건데.
비밀이요.
비밀 같은 소리 한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몰라요.
뭐?
궁금해 하시던가.
뒤로 돌아보며 째려보는 대만을 모르는 척했다. 대신, 옆에 서서 걸었다. 나를 궁금해 할 정대만. 상상만 해도 좋았다. 너무 좋아서, 아주 크게 웃고 싶었다. 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는 거였다. 그래봤자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알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몇 시에 만나. 시간은 말해 줘야 되는 거 아냐?
한 바퀴만 걷다가 가면 안 돼요?
형 춥다….
걸으면 따뜻해질 거예요.
형 피곤하다….
…진짜 안 돼요?
대만이 열받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모르는 척했다. 괜히 억지를 부리고 싶을 때도 있는 거였다. 딱 한 바퀴다. 딱, 한 바퀴. 대만이 고개를 홱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지구 한 바퀴 아니, 우주 한 바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