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08

태섭대만

14





26.


 소중하다. 

 매우 귀중하다. 

 귀중하다. 

 귀하고 중요하다. 

 귀하다. 

 신분, 지위 따위가 높다. 존중할 만하다.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

 보배롭다.

 귀하고 소중한 가치가 있다.

 소중하다………


 …….


 핸드폰에도 영혼이 있다면, 너 때문에 내 수명이 줄어드는 거 안 보이냐며(=배터리 소진) 피곤해 죽겠으니(=계속 빛을 내고 있으니) 그만 좀 하라고 했을 거다. 그런 건 당연히 모르는 태섭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온 몸을 웅크린 채로 볼록 솟은 광대뼈를 문지르며 국어 사전을 읽고, 또 읽었다. 화면을 하도 오래 봐서 눈이 뻑뻑한 느낌이 들어 그만 보려고 해도, 너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대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만 볼 수가 없었다. 검색 이력으로 남아 있는 문장을 누르고, 누르고, 또 보고, 또 보고, 좋아 죽고, 계속 좋아 죽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귀여워 죽으려던 대만이 잠시 스쳐 지나가서 이불을 박차고 튀어오를 뻔했지만. 귀엽다고 안 했다. 소중하다고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귀중하고, 중요하고, 보배롭다고 했다, 정대만이. 생각이 1부터 10을 반복했다. 소중하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잠시 표정이 굳었다. 정신 차려. 저 말은 안 했어. 그래서 국어사전을 또 봤다. 살면서 사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본 적이 없었다. 또 웃음이 나왔다. 더 웅크릴 수도 없는데 계속 몸을 말았다. 그러다 벼락 맞은 것마냥 몸 냄새를 맡았다. 대만의 등을 꽉 안고 있던 손은 미친놈처럼 킁킁거렸다. 0.00001이라도 좋으니, 대만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냄새, 안 나네. 괜히 씻었나.

 마음이 터질 것 같아서 웅크리고, 또 웅크렸다. 그러니까 몸이 아팠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음이 더 아팠다. 너무 아파서, 볼록 솟은 볼을 한 얼굴로 소리를 치고 싶었다.

 오버하지 말자, 송태섭. 네가 누구야. 정대만의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처신 잘하자. 침착하자. 건방지게 굴지 말자. 이럴 때일 수록 잘 해야 된다. 그래야 된다, 송태섭. 가오를 잃으면 안 돼.


[형, 자요?]

[잠이 안 와요]

[근데]

[잠이 와요?]

[자야 되는 구나, 형은] 

[괜한 말 했네]

[근데 왜 잠이 와요?]


 대만은 어이가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하려다, 이러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벌써 새벽 2시였다. 자고도 남아야 하는 시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태섭의 문자를 보고 있다. 잠은 안 오는데, 그렇다고 할 건 없어서 보고 또 봤다. 보면 볼 수록 어이가 없었다. 왜 잠이 오냐니. 무슨 뜻이야, 이게? 

 태섭의 문자가 몇 개 더 왔다. 내일 발표 잘해요. 형은 잘할 거예요. 그거 끝나면 중요한 일은 더 없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일 빨리 끝나요? 같이 갈 수 있어요? 

 보면 볼수록 가관이었다.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니 말 다한 것이었다. 글자만 봐도 들뜬 게 보였고,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보여줄 표정이 저절로 떠올랐다. 여기에 대고 뭐하는 거냐고 물으면, 언제까지 이렇게 안고 있을 건데. 이때처럼, 못 들은 척하며 정수리만 보여줄 게 뻔했다. 얼른 안 자냐? 이렇게 물으면, 형 춥다. 이때처럼, 늘 올라가 있던 눈썹을 축 늘어뜨린 얼굴을 보여줄 게 뻔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손으로 턱과 입을 가렸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가관은 송태섭이 아니라 정대만이었다.


[자라]


 쫀 건 쫀 거였고,


[?]

[전화해도 돼요?]


 귀여운 건 귀여운 거였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야.

 -왜 안 자고 있어요?

 자고 있어도 깨겠다. 이 새벽에 무슨 문자를 그렇게 보내냐, 매너 없이?

 -…문자 때문에 깼어요?

 어.

 -……끊을게요.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 아니, 정대만이. 아니? 송태섭이.

 결국 웃음이 터졌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소리가 새어나가는지 뭐하는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었다. 거기에 대답도 못할 정도로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걸 멈추지 못했다. 마음이라는 거. 감정이라는 거.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는 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하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몇 번의 연애를 하기 전에 거친 거라서 잘 알고 있다. 


 -진짜 계속 이럴 거예요?


 불만스럽나 봐. 풀어줘야겠네.


 -왜 자꾸 웃어요? 나도 알고 싶어요.


 조금… 불안한 것 같으니까 달래줘야겠고.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보이는 것들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멈추었다. 대신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걸 알면서 할 수가 없어서 숨이라도 쏟아내야 했다. 그러자마자 태섭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너는 속 편해서 좋겠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애는 모르는 게 있어.

 -누가 앤데요.

 너.

 -내가 왜요?

 애니까 애지.

 -그러니까 왜요?

 기분 좋았던 거 아니야? 그 상태로 자라. 엉?

 -…….

 대답 없네.

 -형 진짜 짜증 나요.

 내가 더 짜증 나.

 -내가 더 그렇거든요?


 여태 몰랐는데, 네가 저 앞에 있는 것 같아. 옆에 있는데도, 저 먼발치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갑자기 내가 애가 된 것 같아.

 태섭과 실랑이를 했다. 더 했다가는 진짜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내일 이야기 하자고 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러웠는데,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잠깐 멀뚱하게 있다가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올린 뒤,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러자마자 불빛이 새어나왔다.


[잘 자요. 꿈도 꾸지 마요]

[그래도 내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애 같은 말인가]

[…………]

[형은 자꾸 변명을 하고 싶도록 만들어요]

[…………]

[잘 자요 형]


 저절로 눈이 감기게 만드는 빛이었다.




27.


 대만은 눈을 떴다. 눈이 덜 떠졌는데도 핸드폰 알림을 확인했다. 태섭이 보낸 문자가 있다. 잘 잤어요? 아침 꼭 챙겨 먹어요. 오늘도 많이 추워요.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됐다. 절대로. 그래서 정성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수고해라. 출근하면 연락할게.]

 아침부터 상다리 부러진 밥상을 받았다. 밥 한 공기를 싹싹 긁어먹었다. 양치도 야무지게 했다. 각 하나 없는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오늘의 넥타이는 다크 블루. 머리 세팅도 꼼꼼하게 했다. 향수도 조금 뿌렸다. 손목과 귀 뒤에 조금 묻힌 뒤, 외출용으로 덜어 놓은 향수병을 가방에 넣었다. 전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다가 사진을 찍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태섭에게 보냈다. 오늘의 어쩌구, 텍스트도 같이 보냈다. 1초도 안 돼서 문자가 왔다. 

[👍🏼] 

 애매한 이모티콘 이었다. 좀 더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대만은 사진 속 제 모습을 눈이 빠져라 쳐다보았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애 같아 보일까봐 이러는 건가. 그 말은 하지 말 걸.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후회를 하면 안 됐다. 절대로. 그래서 쿨한 척 문자를 보냈다. 

[회사 접수하러 간다ㅋ]

 버스는 만원이었다. 대만은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찐빵이 되어도 이 사람들도 힘들겠지. 범우주적으로 생각했고.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잡고 있던 손잡이를 갑자기 놓아서 머리를 부딪혀도, 하차벨을 누르기 위해 불쑥 들어온 팔에 얼굴을 부딪혀도, 하차 하느라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힘들게 비집고 나가도,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시원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들어도, 목도리 안으로 자꾸 얼굴을 숨겨도 그러려고 애를 썼다.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콧노래도 불렀다. 무슨 발표를 아침 댓바람부터 하는 거냐는 생각이 들어도, 원래 하기 싫은 일은 빨리 해치워야 하는 게 맞는 거라며 어깨를 쫙 폈다. 당당한 걸음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거라고 누가 말했던 것 같은데. A였나, E였나, 하여튼. 어디서나 당당하게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임님 좋은 아침이에요!


 웃으며 인사를 하고 백팩을 벗었다. 목도리와 패딩을 벗고, 가방을 열어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 잠 잘 주무셨나 봐요. C가 물어서, 그렇다며 웃었다. 사실은 눈이 조금 뻐근했다. 아닌 척하며 괜히 눈을 크게 떴다.


 드세요!

 원래 중요한 일 하기 전에 단 거 먹잖아요.

 저는 피로회복제. 힘내십시오.


 꺄르르 군단이 초콜렛을, B가 박카스를 건넸다. 대만은 그들을 보다, 책상 위를 채우고 있는 것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C가 A의 어깨를 치며 주임님 웃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우리 주임님 웃는 얼굴은 늘 보기 좋아요. 중간중간 웃어 주세요. 다들 뻑이 가실 거예요! 꺄르르, 꺄르르. 무겁지 않은 응원이 듣기 좋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인사였다. 

 각자 자리로 돌아간 뒤, 대만 역시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수첩을 펼치고, 손에 익은 펜을 꺼냈다. 집에 가져갔던 자료를 올려두고 짧은 숨을 뱉었다. 후, 후. 어깨를 펴고, 목근육을 풀었다. 고개를 젖히고 숙였다. 손깍지를 낀 팔을 쭉 뻗었다. 회의와 발표는 한 시간 뒤. 벽시계를 확인 후, 핸드폰을 보았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늘 그랬듯, 태섭에게서 문자가 와 있어야 했다. 그걸 의심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문자가 와있었다. 평소와 똑같았지만, 달랐다.


[XX 편의점 교환권

마이쮸 포도맛 2개, 벤포티아민 영양제 2개]


 …….


[힘내요, 형]

[잘할 거예요 정대만이잖아요ㅋ]

[응원하고 있어요]

[오후에 카페 올 거죠]

[떵떵거리면서 자랑할 거죠? 오늘만 참고 봐줄게요ㅎㅎ]

[화이팅👍🏼]


 대만은 고개를 숙였다. 편의점 교환권은 눈에도 안 들어왔다. 보게 되는 건 힘내요, 잘할 거예요, 응원하고 있어요. 아까 전에도 들었던 평범한 응원이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느낌표 하나 없는데, 수많은 느낌표를 받은 것 같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한 건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다.  

 평범한 거. 그런 건 새로운 게 아닌데. 익숙하다못해 느낌조차 없고, 느낌이 없으니 관심을 둘 수도 없고, 관심이 없으니 가볍게 스칠 수 있는 건데.


 뭐 어디 당첨 되셨어요? 얼굴빛이 갑자기 좋아지셨어요.


 이게 뭐라고. 정말 이게, 뭐라고. 


 편의점에 다녀올게요.

 에? 지금요? 곧 9시인데요?

 힘내야 돼서요! 

 네에에에에에?! 


 시금치라도 먹은 뽀빠이가 된 것 같은 거야.




28.


 좋은 연락이라도 받았어요?


 태섭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제 뒤에 있는 사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올려둔 뒤, 앞치마끈을 묶었다. 


 응? 뭔데요? 어제랑 완전 다른데? 


 사장이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대답이 안 나왔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맞다고 하면 뭔지 물어볼 것 같아서였다.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보다,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도 시선은 핸드폰. 사장은 태섭이 보지 못하게 웃으며 원두를 뜯어 그라인더에 넣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태섭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이다. 

 [오냐 힘낼게] 

 이게 뭐라고?

 [떵떵거리면서 갈 테니까 잘 준비해놓고 있어]

 이게 도대체, 뭐라고? 가슴이 콩닥콩닥 거려?

 여태 알던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 태섭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건 말이 안 됐다. 기분이 들쑥날쑥 하는 것. 말 한 마디에 천국에 갔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 이 생각, 저 생각에 뻗어가는 가지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에 이렇게 많은 게 오고가는 거라고 왜 알려주지 않은 거야? 밑도 끝도 없이 삽질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왜 말해주지 않는 거야? 겁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을 닦고, 에이드로 쓸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준비하고, 재료의 재고를 파악하는 동안,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원래 심장이라는 게,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게 아니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주문을 받고, 결제를 하고, 손님들과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자꾸 가슴에 손을 갖다댄다. 이런 건 정말, 말이 안 됐다. 심장이 뛰는 걸 알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 뿐이었다. 행복하거나, 불안하거나. 지금 나는 행복한가 아니면, 불안한가? 이런 게,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건가? 행복하면서 불안할 수 있고, 불안하면서 행복할 수 있어?

 

 손님 몰려오기 전에 연습 해보실래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사장이 빙긋 웃었다. 태섭은 왼쪽 가슴에 가지런히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원래는 퇴근 후 대만을 만나기 전에 했었는데, 최근에는 사장이 괜찮다고 하면 손님이 없을 때도 라떼 아트를 만드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후드티 소매를 걷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후. 짧은 숨을 뱉었다. 제가 알려드린 것만 잘 기억하면 쉽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두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사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근차근, 천천히. 순서대로 했다. 처음 연습하는 것도 아닌데 늘 떨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처음에는 손이 많이 떨렸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 걸까. 처음부터 이런 걸 생각하면 안 됐던 걸까. 하지만, 잘하고 싶다. 잘해서, 감탄하는 대만을 보고 싶다. 그래서 허투루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잘해보고 싶었다. 

 행복하면서 불안해도, 정대만이니까. 모든 게 다, 형이니까.

 태섭이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사장은 태섭의 뒤에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다 끝나면 자세 교정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계속 하다가는 어깨가 뭉칠 거라고.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쌓이다보면 불편해질 거라고, 꼭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짝 올라간 어깨끝이 집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서, 태섭이 다 마칠 때까지 최대한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망한 것 같아요.


 태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커피잔을 보는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너무 어려워요.

 왜요? 괜찮은데?

 아닌 것 같아요.

 어제보다는 하트 끝이 잘 만들어졌어요.


 삐죽 나온 입술이 조금 들어갔다.


 이것 봐요, 꼬리도 만들어졌잖아요.


 …그런가?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어제보다 사이즈도 더 커졌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볼이 조금 볼록해졌다.


 여태 한 것중에 제일 예쁜데요?


 태섭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사장은 웃음을 꾹 참으며 태섭의 팔뚝을 툭 쳤다. 얼른 사진 찍어요.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드느라 의식하지 못한 심장이 다시 쿵쿵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더 그랬다. 이 각도, 저 각도, 전문 사진사 마냥 사진을 찍었다. 연습한 라떼 아트만 모아놓은 폴더를 보니 사장의 말대로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해서 근육이 아팠다. 대만에게 보여줄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조금, 아아아아아주 조금은 발전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을 숨길 수 없는 입꼬리를 꾹꾹 누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대만이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대만에게서 연락은 없었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온다고 했으니까. 약속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있으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문자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올 거니까, 괜찮았다.


 태서바!


 점심 시간이 끝나고 북적이던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 늘 그랬던 것처럼 꺄르르 군단이 들어왔다. 태섭은 거의 반사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야, 이 가식적인 인사? 이 인사를 대만이 들었을까봐 신경쓰였다.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 대만을 신경써야만 했다. 대만의 얼굴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밥… 먹었어요?

 어.


 태섭은 쭈뼛거리며 대만의 눈치를 살폈다. 꺄르르 군단 뒤에 서 있는 것도, 그들이 주문을 다 하고 난 뒤에 하는 것 역시 똑같았으나, 얼굴은 평소와 달랐다. 설마, 발표를 망쳤나? 가슴이 쿵 떨어졌다가, 그런 거면 분위기가 이럴 수 없을 것 같은데?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들의 얼굴은 대만과는 달랐다. 평소랑 똑같다 못해 조금 들떠있는 듯 했다. 


 형.

 어.

 무슨 일… 있어요?


 커피를 가지러 온 대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레이를 두 손으로 잡은 대만이 슬쩍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휙 돌린다. 태섭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없어.

 근데 왜 이래요?


 대만은 말이 없었다. 계속 다른 곳을 쳐다만 봤다. 태섭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떵떵 거리면서 들어온다며. 잘 준비해 놓으라며. 하지만, 기대가 무너진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무런 표정도 없는 대만이었다. 이런 얼굴은 뭔가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볼 수 있었다. 잘 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고. 

 커피 드리고 올게. 대만이 조용히 말한 뒤, 뒤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삐용삐용. 경고음이 울렸다.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을 안 했던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러다가 연락 안 하면 어떡해. 내가 해도, 무시하면 어떡해. 어제처럼 형이 없는 하루를 지내야 되면 어떡해.


 왜왜?


 대만은 커피 트레이를 놓고 일어서자마자 태섭에게 손목을 잡혔다. 어찌나 꽉 잡는지, 조금 아팠다. 그런데 놓으라는 말을 못했다. 안 나왔다. 카운터 뒤에 조그맣게 있는 직원이 쉬는 공간으로 밀어넣은 태섭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있기 때문이었다.


 왜.

 …….

 왜 이러는데?

 오늘 끝나고 뭐해요? 정시 퇴근 해요?


 덩달아 굳어지려던 대만의 얼굴이 살짝 말랑해졌다. 대만은 태섭이 볼까 싶어서 재빨리 헛기침을 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빠.


 태섭의 눈썹이 올라갔다. 주머니 속, 손가락 끝에 걸리는 걸 톡, 두드렸다.


 왜요?

 바쁘니까 바쁘지.

 …중요한 일 끝났잖아요.

 그러니까 바쁘지. 원래 이런 날 회식 하잖아.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시선이 돌아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가도 돼요?

 아니?


 너랑 꺄르르 군단이랑 같이 있는 거 싫거든? 이 말을 꾹 삼켰다. 그 말을 모르는 태섭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럼, 전화해도 돼요?

 아니? 


 너랑 있을 거니까. 역시, 이 말을 모르는 태섭의 눈썹이 조금 더 올라갔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태섭의 눈썹을 보면서 근질근질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발표는 잘 끝났다. 임원의 칭찬도 들었다. 주임님은 역시 실전에 강하세요. 칭찬에 인색한 B가 엄지를 치켜 올렸다. 그걸 보자마자 태섭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전부터인지도 몰랐다. 발표가 끝나고, 인사를 할 때. 박수를 받을 때. 수고 했다는 말을 들을 때. 고생 했다는 말을 들을 때. 그 모든 순간에 태섭이 있었다. 밥이고 뭐고 당장 달려가서 형아가 또 한 건 했다며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럴 수가 없어서 편의점에서 교환해 온 마이쮸를 먹었다. 포도맛이라니. 지 같은 걸 골랐다, 아주. 그걸 질겅질겅 씹었다. 질겅에 가고 싶은 걸음을 참았고, 질겅에 연락하고 싶은 걸 참았다. 대신, 꺄르르 군단과 B에게 발표에 관한 걸 태섭에게 아무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왜요오?! 호들갑을 떨며 묻는 그들에게, 그냥 좀 놀래켜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에엥?! 더 호들갑을 떨도록 만들었으나, 마음이 그랬다. 어제에 대한 복수인 지도 몰랐다. 나 어제 하루종일 너 때문에 마음 졸였어. 너도 똑같이 그래 봐. 

 그들에게 말하고 돌아선 뒤, 화장실로 달려가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공들여 세팅한 머리가 망가지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는 짓이 정말 형답지 못하고, 어른답지 못하다. 이걸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 마음이 안 됐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모를려야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끝나면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마음의 방향이라는 거 정말 우습고, 안 보이던 게 보이게 되는 거 정말, 무섭다.


 어제처럼 또 연락 안하고 오지 말고요.


 말만 안 했지, 이런 거, 사실은…….


 ………같이 있고 싶다고요.

 손.

 …네?

 손 줘 봐.


 대만이 웃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섭은 그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얼른 줘.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못했다가, 쓰읍, 소리에 허둥지둥 손을 내밀었다. 대만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축축한 게 느껴졌다. 


 …왜요. 뭔데요.


 태섭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대만은 헛기침을 했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 않으면, 바보 멍청이라고 했던 태섭의 말에 당당하게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쫀 건 맞지만,

 말만 안 했지, 이런 거, 사실은…….


 나는 사과맛을 더… 좋아해.

 …….

 참고해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제 얼굴만 보는 태섭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무의식적으로 맞은 자리를 문지르면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심장이 진짜, 미친듯이 뛰었다. 너무 뛰어서, 당장 카페를 나가고 싶었다. 찬 바람을 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심장이 멎었으면 해서. 그랬으면 해서, 얼어붙고 싶었다.


 말씀하셨어요?! 

 깜짝 놀라죠, 그쵸! 

 태서비도 주임님 걱정 많이 했어요. 어제도 있잖아요……


 행복한데 불안하고, 불안한데 행복해. 

 너랑 있으면서도 자꾸 미래를 생각하게 돼.

 확실한 건,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인데.


 대만은 카운터를 등지고 앉았다. 꺄르르 군단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제 몫의 바닐라 라떼를 보았다. 오늘은 나뭇잎 모양의 라떼 아트가 있었다. 자주 오니까 굳이 안 해도 된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듣는 건지, 심장 소리를 듣는 건지, 두 개가 섞여서 소란스러웠다.


 …….


 그 소란이, 태섭의 문자와 라떼 아트 사진으로 조용해졌다.


 뭔데 그렇게 보고 계세요?

 저희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네. 안 돼요.


 나만 볼 수 있어요, 이건.


[다음에는 더 예쁘게 해볼게요]


 지금도 충분히 예쁜데. 여기서 더 예뻐지면 어떡해.

 이렇게 말해도 태섭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네. 형. 그래도 처음처럼 예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