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오늘 여자친구랑 어디 가기로 했냐?”
연습과 훈련이 끝난 라커룸. 애인이 있는 녀석들은 오늘 저녁에 어디에 가서 뭘 먹느니, 어디를 예약을 해놨느니, 밤새도록 같이 있을 거라느니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빴다. 막 옷을 다 입은 대만은 거울로 머리를 정리하는 태섭을 힐끔거렸다. 벌써 12월 24일이었다. 시간이 빨리 가면서도 느리게 가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매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연습을 하는 시간을 빼고는 그랬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겨우 5분이 지나가 있다거나, 아직 몇 시밖에 안 됐다거나. 오늘따라 연습 시간 엄청 긴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시간이 느리게 흘려간다는 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 걸까. 그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오늘도 집에 똑같이 도착해서 똑같은 지하 주차장의 다른 구역에 주차를 했다. 엘리베이터도 같이 탔다. 10층과 20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내일 차 가져오지 말라고 태섭이 말했다.
“어? 왜.”
“차로 돌아다닐 거 아니니까.”
“…그…러냐?”
“네.”
“…추운데. 안에 있는 거지? 아니. 말하지 마. 미리 안 알고 싶다.”
태섭이 픽 웃었다. 뭘 웃어, 안에서 있을 거 아닌가, 그럼 어디에 있겠다는 거야. 대만은 구시렁거리며 10층과 20층이 눌려진 엘리베이터 버튼을 쳐다보았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 밖에서 돌아다닐 생각인가 싶어서 아득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려 나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예고되어 있는 가운데…… 삐죽거리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진다. 얼떨결에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멋쩍게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재킷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주먹을 쥐었다. 손이 떨리는 건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았다. 10층입니다- 안내음을 듣자마자 마음이 편해졌다. 대만은 짧은 숨을 뱉고 고개를 돌렸다. 태섭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간다, 잘 자라, 내일 보자. 어제도 했던 인사를 했다. 그러면 어제 들었던 인사가 돌아와야 하는데. 태섭은 묵묵부답이었다. 의아해서 내린 뒤 고개를 돌렸더니, 태섭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았다. 뭐하냐, 너?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마자 태섭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뭐, 뭐하냐고 너.
“따뜻하게 입고 와요.”
“어…. 너도.”
“목도리랑 다 챙겨 와요. 장갑도.”
“알았어.”
“내일 봐요.”
“어.”
“잘 자요.”
“…어.”
“들어가요.”
그제야 순순히 손목을 놓는다. 태섭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빙-긋 웃는 건 덤이었다. 대만은 문이 닫히는 동안, 그 자리에서 태섭을 쳐다보았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쳐다보는 얼굴에는 옅게 띈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 웃음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서도 그랬다. 점점 늘어나는 숫자를 보다 20 이라는 숫자를 보자마자, 재킷 안에 넣어둔 손바닥이 축축 하다는 걸 깨달았다.
크리스마스의 남자 관찰기
대만은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12월 25일. 새벽 4시 17분.
날짜를 쳐다보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하게 천장을 보며 눈을 꿈뻑거린다. 이불 안에서 손을 꺼내 마른 얼굴을 쓸었다. 두 시간 전까지 랩탑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눈이 뻑뻑했다. 인공눈물이 있던가…. 쉽게 사라질 생각들이 사라지고 태섭만 남았을 때,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크리스마스에 알게 될 거예요.
선배가 궁금하다는 나?
24일 저녁에 들어와 자기 전까지, 대만은 랩탑과 베프가 되었다. 정확히는, 포털 사이트와 SNS. 거의 중독자처럼, 태섭의 경기 영상과 인터뷰, 심지어는, 미국에서 활동했을 때의 영상을 보는데 시간을 썼다. 크리스마스에 알게 될 송태섭을 미리 알고 싶었다. 송태섭과 만나는 게 이겨야 할 경기는 아니지만,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 이런 게 여자들이 말하는 직감 같은 것인가 싶었다.
공개 연애를 할 때 소설을 쓰던 인터넷 수색대도 찾아서 블로그의 글을 뒤졌다. 혹시나, 태섭에 관한 소설도 써놓았을 까봐. 열애설이 터지지 않았으니 쓸 소설이 있겠나 싶었지만, 크리스마스에 약속이 있다는 인터뷰가 나간 그날, SNS에서 송태섭이 트렌드가 되었느니 하는 기사가 나온 걸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뉴스 기사를 보는 내내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송태섭 인기가 이랬다고…? 이런 것도 기사가 되어서 나올 만큼…? 궁금해서 SNS도 찾아봤다. 설치만 되어 있을 뿐 잘 들어가 보지 않았던 SNS에 들어가 송태섭을 검색했더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하루만 송태섭 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 송태섭이랑 데이트하고 싶다, 송태섭 매너 끝내주겠지? 대만은 긴 한숨을 뱉으며 뒷덜미를 매만졌다. 온갖 글들 사이에 있는 소설 같은 글이 눈에 띄었다. 재게시와 마음에 들어요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송태섭 같은 사람한테 여태 애인이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답은 두 가지지 이상한 도벽이나 성벽이 있거나 존나… 순정남이라거나 ㄴ인정 나도 그렇게 생각함… ㄴ이상한 게 있었으면 터졌을 걸? 근데 그거 아니면… 레알 순정남인가 ㄴ송태섭 같은 남자가 순정남…? 시발 더 좋아 ㄴ제발 조용히 연애해라… 나 모르게 해 제발… |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쏟아지는 글자들이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흘려 들어갔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됐다. 송태섭 같은 남자가 어떤 남잔데. 송태섭이 왜 연애를 조용히 해야 하는데. 송태섭이 왜… 순정남처럼 보이는데. …맞긴 하지만. 송태섭이 순정남이면 왜 더 좋은데. 이쯤되니 대만은, 제 자신이 이들보다 태섭을 더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티브이나 경기장에서만 보는 송태섭을 보고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쉽게 잠이 안 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송태섭이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게.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송태섭이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게.
“또 잠 못잤죠.”
연습이 끝나고 대 자로 누워 있는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대만은 눈을 감은 채로 아무 말 없이 손을 휘저었다. 잠을 못 자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놈에게 대꾸도 하기 싫었다. 왜 못 잤어요. 제스처를 알아 들었을 텐데 이러는 저의가 뭐야, 진짜.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밝은 빛을 등으로 막아 선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제 몸 옆으로 다리를 벌리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태섭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못 잤냐고 물어본 사람 얼굴도 그닥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태섭을 아무 말 없이 쳐다만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퉁, 퉁, 농구공 소리가 울리는 코트장.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화하는 소리. 이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짧은 숨을 내쉬며 팔을 뻗었다. 태섭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고… 소리가 나오자마자 태섭이 웃으며 옆에 앉았다. 대만은 태섭을 힐끔거리며 볼을 간질였다. 얘도 잠을 못 잔 것 같은데. 왜 못 잤냐고 물어볼까.
“야.”
“네.”
“…아니다.”
“왜요. 왜 물어보려다 말아요.”
“그냥… 안 물어봐도 되는 말인 것 같아서….”
“그러니까 뭐가요.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까 일단 말해요.”
“별 말 아니야.”
“내가 판단 한다니까요.”
“…….”
“빨리요. 나도 궁금한 거 싫어요.”
이 새끼가. 째려 보니까 웃는다. 대만은 긴 한숨을 뱉으며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상처럼 보이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분위기… 좋아 보이네. 여기랑 다르게.
“아니. 그냥.”
“네.”
“너도 잠. 못 잔 것 같아서.”
“네.”
“…왜 못 잤냐고.”
태섭이 말이 없다. 힐끔 쳐다보니 눈이 마주쳤다. 대만이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뭐 저렇게 빤히 쳐다보고 난리람.
“그게 궁금했어요?”
“궁금한 건 아니고.”
“네.”
“…….”
“…….”
“…어.”
대만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냥 할 수도 있는 가벼운 안부 인사가 왜 송태섭에게 하는 건 낯간지러운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기분 속에서 태섭이 낮게 웃는 소리가 커지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좀… 들떠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볼이 볼록하다. 원래 웃을 때 저랬나. 대만은 그 얼굴을 힐끔거리다, 빤히 쳐다본다. 송태섭에 관한 것들을 벼락치기해서 그런 걸까. 원래 알고 있던 송태섭과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준 송태섭이 겹쳐진다. 이를테면, 선배는 왜 잠을 못 잤어요? 라고 묻는 목소리가 좀, 다정하게 들린 다거나. 수면 안대 준 거 잘 쓰고 있는 거 맞아요? 되묻는 목소리가 다정 하다거나. 경기 때문에 신경 많이 쓰고 있는 거 아니죠? 걱정이 다정하게 들린 다거나. 혼자 고민 하지 마요. 내가 잘할게요, 맡겨 줘요. 진짜, 다정, 하다거나.
“야아, 너네 여기서 뭐하냐? 분위기 좋다?”
세민이 농구공을 튕기며 다가왔다. 대만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세민을 쳐다보았다. 제 앞에 앉으며 태섭과 저를 번갈아보며 쳐다보는 눈이 영 심상치 않아 보였다. 뭘 그렇게 보냐고 물으니까, 아니 그냥 좀, 분위기가 다르네 싶어서, 한다. 그게 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세민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태섭이는 오늘 약속 있다고 그랬고. 정대만 너는 뭐하냐?”
“…나도 약속 있는데.”
“진짜냐?”
“그럼 진짜지 가짜냐. 왜?”
“너 약속 없으면 내가 나갈 소개팅 대신 나가라고 하려고 했지.”
대만은 저도 모르게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무표정한 얼굴로 세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 거 안 해, 이제.”
“왜? 너 연애 오래 쉬었잖아. 이러는 녀석 아니잖아, 너.”
“득츠르…”
“친구들 약속이면 물러. 오늘 아니라도 볼 수 있잖아.”
“아뇨. 오늘이어야 돼요.”
조용하던 태섭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졸지에 굳은 대만은 삐걱거리며 태섭을 쳐다본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경기가 아닌데 손에 땀이 차는 느낌은 오랜만이다. 애초에 붕어빵 사먹느라 빌린 돈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진짜. 8마리에서 반을 나눠 먹었으니 빌린 돈은 고작 이천원인데. 저 이천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같은 약속 때문에 송태섭한테 저당잡혀서 이게 뭐냐고, 진짜.
야, 송태섭 너 제발 조용히, 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세민이 대만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라고 묻는 건 덤이다. 너 뭐 아는 거 있냐? 대만이 고개를 젓기도 전에 태섭의 말이 날아들었다.
“원수 관계 청산을 해야 해서요.”
“…아. 그 원수가 정대만이었어?”
“네.”
“오호라…… 그래?”
대만은 고개를 슬쩍 숙인 채로 눈을 감고 이마를 긁적였다. 오호라, 라고 묘하게 말한 세민의 말이 신경쓰인다. 뭐라고 말을 하지. 뭐라고 변명을, 아니, 변명을 해야 할 거리가 되나, 이게. 굳이 이해를… 시켜야 할 일인가. 정리가 끝난 대만이 고개를 들었을 때, 대만은 세민이 어깨를 툭툭 치는 손에 어리둥절해졌다. 왬마. 뭐, 왜 이러는데?
“송태섭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뭐?”
“예수 그리스도 말 잘 들어야 천국 간다. 원수를 사랑하고, 관계 청산해. 알겠지?”
“…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야 이 미친놈아. 뭐래 진짜? 야, 너 미쳤냐 진짜?”
“이제 연습 하러 가자.”
대만은 할 말을 잃고 일어서는 세민을 쳐다본다. 우리 아부지 나 엄청 자랑스러워하시겠다고 중얼거리는 세민이 미친놈같다. 요 근래에 이렇게 머릿속이 새하얘진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옆에서 끅끅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태섭이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뭐라 입을 털던 세민과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놈들이 주장 화이팅! 응원할게! 하는 소리에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게 이런 경우구나…. 대만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거 산재 같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선수인 내가 일하는 곳인 코트에서 이러면 산재 처리 되지 않나. 대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생각을 하면서 손이라도 잡고 갈까요? 라고 묻는 태섭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애초에 응원을 받을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시발…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가 이런 식으로 응원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윤세민 이 미친 목사 아들 새끼야………
“원수들아 좋은 하루 보내라.”
“화이팅!”
“뭐 얼마나 사이가 더 좋아지려고 이러세요 선배들~ 어쨌거나 화이팅 입니다!”
“내일 경기니까 적당히들 놀아라 원수들아.”
라커룸을 나가며 손을 흔드는 놈들을 노려보는 대만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적당히 놀아야 될 건 애인이 있는 놈들이라고. 대만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라커룸이 조용해서 한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용한 라커룸이 시끄러워진 건, 태섭이 라커를 닫는 소리가 나고서부터였다. 대만은 고개를 돌렸다. 태섭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저번에, 붕어빵을 살 때 태섭이 해줬던 목도리다. 대만은 코트 안에 넣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태섭의 손이 자연스럽게 목도리를 정리한다. 그 목도리가 턱과 입술을 가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괜히 어색하고, 이 어색함이 부자연스럽다. 갈까요? 라고 묻는 태섭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제 옆으로 와서 빙-긋 웃는 얼굴이 그렇게 보였다.
얘는, 아무렇지도 않나.
건물을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가 가면 갈수록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리에는 간혹 케이크 박스를 손에 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대만은 볼을 긁적였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자마자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그 끝으로, 차가운 볼을 문질렀다. 문지른 부분이 말랑말랑해졌다.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것 같은데… 지금 송태섭이랑 하고 있는 게 꼭 크리스마스 데이트……
“선배.”
“어?!”
“왜 이렇게 놀래요?”
“어, 어, 아니. 왜?”
“뭐 먹을까요.”
“어… 네가 먹고 싶은 거? 내가 사기로 했으니까.”
“진짜 사줘요?”
“네가 갚으라며.”
“그 돈보다 몇 십배는 더 비싼 것도 사줘요?”
“…나 째째한 사람 아니거든? 똑같은 걸로 안 갚거든? 이게 진짜 날 뭘로 보고.”
태섭이 웃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힐끔거렸다. 웃을 때 이렇게 웃었구나. 눈썹이 살짝 내려가고,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고, 볼은 볼록하게 튀어나온 채로. 목도리에 반쯤 가려진 입술이 립밤을 발랐는지 반질거렸다. 미친. 재빠르게 시선을 돌린 대만은 볼을 긁적였다. 볼이 조금, 뜨거웠다. 괜히 목도리를 코까지 올렸다. 목도리 정리를 다 하자마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추워요? 조용한 목소리 뒤에, 시선이 다른 곳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마치, 따뜻하게 입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 시선이 민망해서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태섭은 말이 없다. 궁금한 게 풀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처럼.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살짝 깨문 다음, 입을 열었다. 이 시선을 받고 있는 것보다, 한 마디를 하는 게 덜 어색할 것 같았다.
“따뜻하게 입었어. 안 추워.”
쭈뼛거리며 말을 하자마자 태섭이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웃었다. 빙-긋.
“얼른 앞장 서.”
“싫은데요.”
“뭠마?”
“옆에서 같이 걸을 거예요. 선배랑.”
이… 미친. 당연히 나랑 걷는 건데 뭘 또 선배랑, 하면서 웃어, 웃길. 대만은 목도리를 눈까지 올리고 싶었다. 가요. 대만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태섭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런 거다. 크리스마스라서. 태섭의 옆에서 같이 걷는 동안, 묘하게 들떠 보이는 태섭을 힐끔거리는 내내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이 날이 주는 어떤 느낌이 있어서 그런 거다. 크리스마스니까. 크리스마스, 니까.
지하철역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이미 지하철에 타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대만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이거 탈 수 있을까? 제 물음에 태섭이 얼굴을 힐끔거리다 지하철 정보판을 본다. 다다음에 온다는데 어떻게, 다음 거 탈까요? 대만은 고민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한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타고 내리면 된다는 말에는 픽 하고 웃었다. 그 얼굴을 다시 힐끔거렸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다 내린 뒤 줄을 맞춰서 지하철에 탔다. 내린 사람들만큼 타는 느낌이었다.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답답해서 목도리를 내렸다. 후우, 숨을 쉬자마자 태섭이 눈을 맞춰왔다. 태섭의 목도리도 느슨해져 있었다. 대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 정거장은 거의 2분 거리. 이 시간 동안, 지하철 문에 제 모습과 태섭이 비쳐보였다. 사람들이 많아서 가까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더워진다. 옷이 두꺼워서 태섭의 온도가 느껴지지는 않을 거고 그러면 내 온도라는 뜻인데. 창에 비친 태섭은 무언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보다 시선을 돌려 지하철 광고를 보았다. 2분이 이렇게 느리고 긴지 몰랐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똑같이 느낀 이 시간이 오늘은 왜 다른 건지, 축축한 손을 코트에 문지르며 생각했다.
“…진심이냐?”
“네.”
“다시… 생각 하지?”
“어제부터 생각한 거예요.”
출구를 빠져 나와 어디론가 성큼성큼 가는 태섭을 따라 도착한 곳은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였다. 대만은 어이가 없었다. 뭐 거창한 거라도 사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고작 온 곳이 포장마차라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는 태섭을 보다 맞은편에 앉았다. 태섭은 어쩐지 들떠보였다. 대만은 헛기침을 하며 목도리를 풀어 빈 의자 위에 두었다.
“로망, 뭐 그런 건가?”
“그런 건가.”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냐?”
“검색했죠.”
“…너 T지.”
“MBTI?”
“어.”
“대답이 짜증났어요? 왜 저런 걸 물어보지. 아니면, 관심인가?”
“주문해. 얼른. 빨랑.”
관심은 무슨. 대만은 구시렁거리며 코트를 벗었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걸 관심이냐고 물어볼 수가 있는 거야? 혼잣말을 하다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목도리를 풀고 재킷을 반쯤 걸친 채로 제 얼굴을 보고 있는 태섭은 웃는 듯, 웃지 않은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깜빡임속에 태섭이 웃었다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는 뭐 먹을까요, 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너 먹고 싶은 걸로 먹자는 말에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모- 하고 불렀다. 대만은 정색을 했다. 이모를 이렇게 부드럽게 부를 일이야?
“뭘로 드릴까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야야, 야.”
“네.”
“저거 다 먹겠다고?”
“그럼 몇 개 뺄까요?”
“저거랑 저건 빼. 저녁에 부담스러워.”
“네. 또 뭐 빼요?”
“메뉴가 겹치니까 저것도 빼.”
“또.”
“…우동 하나 더 시키자.”
“네. 이렇게 주시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이모가 남자 둘이서 사이가 참 살갑고 좋네, 하며 호호 웃었다. 대만은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고, 태섭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 태섭을 못본 척하며 팔짱을 꼈다. 아니, 한국어 모르는 외국인이냐고 다 달라고 하게. 생각하면 할 수록 어이가 없어진다. 그러다, 제가 먹고 싶은 것만 주문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은 티슈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고 물티슈까지 가지런하게 둔 태섭을 쳐다보았다. 음식보다 먼저 온 소주병의 뚜껑을 따는 손이 자연스럽다. 대만은 겹쳐진 소주잔을 분리해 제 앞과 태섭의 앞에 놓았다. 술 받으라고 턱짓을 하는 태섭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일 경기니까, 딱 한 잔 씩만 마셔요.”
“그럴거면 왜 시키냐?”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너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지 않나.”
“크리스마스니까.”
선배도 아무 말 안 해놓고. 대만은 그건 그렇다며 멋쩍게 웃었다. 태섭의 눈이 조금 동그래지더니,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빙-긋. 그 얼굴을 보며 태섭의 잔에 술을 채우고, 부딪혔다. 빙긋 웃은 태섭이 잔을 한 번 더 들어올렸다. 대만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소주를 털어넣었다. 식도를 따라 흘려가는 소주가 뜨겁게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소주잔을 놓았다. 탁, 소리가 나도록 놓은 잔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뱃속까지 뜨겁다. 그래서일까. 심장이 쿵쿵거렸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음식이 죄다 맛있었다. 우동이 너무 맛있어서 한 그릇 더 주문하려다 내일 경기인 거 생각하라는 태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모레였으면 한 그릇 더 했을 텐데. 중얼거리는 제 말에 국물을 마시던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경기 끝나고 먹으러 올까요? 아무 말 없는 제 얼굴을 보는 태섭이 웃었다. 대만은 두 눈을 굴렸다. 이미 답을 들어서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주도 한 잔씩 더 마셨다. 한 잔은 너무 정이 없지 않냐는 말에 태섭이 웃었다. 내가 그랬죠, 쌓일 정이 많다고.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 많이 쌓으려면 뭘 더 해야하냐? 웬만한 건 다 하지 않았나.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잔이 부딪히고, 소주를 마시는 태섭은 대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대만은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조금 더 젖혀 잔에 있는 소주를 다 털어넣었다. 첫 번째 잔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똑같이 뱃속까지. 이번에는 귀 끝도 뜨거웠다.
태섭이 티슈를 내밀었다. 뭐, 했더니 입술 옆에 뭐가 묻었단다. 대만은 여기? 라고 물으며 태섭을 빤히 보며 대충 닦았다.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 네가 닦아. 제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려던 찰나, 태섭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맴돌던 손에 있던 티슈를 제 손에 가져오는가 싶더니, 반대편 입꼬리를 부드럽게 눌렀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비해 제 얼굴과 입술을 살피는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대만은 아무말 없이 태섭을 쳐다보았다. 손 많이 간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태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순간에 나와야 할 말이 없는 시간에는 눈을 마주칠 수 있구나. 마주친 눈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소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뱃속이 뜨거웠다. 귀도, 태섭의 손이 머물렀던 입술 끝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안 했나.”
포장마차에서 나온 대만은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하늘과 아까 전보다 줄어든 사람들과, 조금 더 어두워졌다고 건물에서 반짝이고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보면서. 고작 한 시간 지났을 뿐인데 조금 더 추워진 느낌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움츠리던 찰나, 태섭이 제 앞으로 와 섰다.
“진짜 손 많이 간다니까요.”
“…….”
“제대로 안 하고 있으니까 추운 거 아니에요.”
제 목도리를 정리하는 동안 태섭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엉성하게 맨 목도리 안으로 입술을 숨긴다. 대만은 가만히 태섭을 쳐다본다. 느리고 꼼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끝이 목 끝을 만진다던가, 턱 끝을 스친다던가 하는 순간에, 슬쩍 눈을 드는 태섭을 빤히- 쳐다본다. 꼼꼼하게 매어진 목도리가 태섭을 닮았다. 대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됐다고 말하는 태섭의 목도리를 잡았다. 지는. 툭, 하고 던진 말에 태섭이 눈을 깜빡인다.
“너야말로 잘 여며라. 원래 추위 잘 타지 않았나. 따뜻하게 입고 왔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재킷이 뭐냐? 멋부리다가 얼어 죽을 일 있냐?”
“…….”
“근데 나 이거 너처럼 제대로 못 맨다.”
“…참나.”
“그냥 목만 감싸면 되는 거지, 뭐. 네가 이상한 거야.”
“…….”
“모양은 이상해도 따뜻하긴 하지?”
“그러네요.”
태섭이 중얼거리며 목도리 안으로 턱과 입술을 숨긴다. 대만은 픽 웃었다. 눈만 내밀고 있어서 그런가, 좀 귀엽게 느껴져서 머리카락을 헤집으려다 미간을 찌푸렸다.
“한동안 연습 끝나면 왁스 안 하더니 오늘은 왜 했냐? 스타일링 망칠 뻔했네.”
“…….”
“이제 뭐하냐? 디저트 먹으러 가는 건가?”
“선배는.”
“어?”
“뭐 하고 싶어요?”
“나?”
“네.”
입술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 걸까. 태섭의 눈만 보고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섭을 빤히 보고 있던 대만은 목도리 안으로 턱과 입술을 숨겼다. 며칠 전만해도 자신만만하게 크리스마스에 궁금해하는 나를 알게 될 거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대만은 괜히 시선을 돌리며 양심상 디저트는 먹지 말자고 중얼거렸다. 태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꼬리가 조금 올라간 걸 보니 아마도 웃은 것 같다. 저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이 간지러워서, 어디든 가고 싶었다. 왠만하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먼저 가려다 태섭을 쳐다보았다. 가자고 말하는 제 옆으로 태섭이 왔다. 대만은 헛기침을 했다. 목도 좀, 간지러운 것 같아서.
어디로 갈 건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묻지 않는 거리를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대만은 제 옆에 있는 태섭과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느라 목도리 안에 감추었던 입술을 꺼내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뽀얀 입김이 나왔다. 추우면 추울 수록 입김이 선명하게 보인다는 걸 당연히 아는 것처럼, 태섭과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이 거리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별로 영양가있는 대화가 아닌데도.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순간도, 웃을 때마다 더 자주, 많이 나오는 뽀얀 입김도, 조금씩 좁혀지는 태섭과의 거리도 모두.
“와, 사람들 진짜 많다. 어? 트리다.”
“여기까지 왔네.”
“어?”
“이번에 대형 트리를 설치 했다는 백화점이요.”
목적지가 있어서 걷고 있는 게 아닌데 제대로 된 곳에 온 것 같았다. 대만은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우뚝 선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추었다. 트리 끝에서 반짝이는 커다란 별 오너먼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쩜 저렇게 크고, 반짝일 수가 있을까. 야, 태섭아. 한참동안 별 오브제를 보고 있던 대만이 고개를 돌렸다.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눈을 깜빡이며 다시 목도리 안으로 입술을 숨겼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마주친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가보자.”
“네.”
대만은 헛기침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는 사이에, 태섭의 걸음이 느려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걸었다. 가까이 가면 갈 수록, 트리에 가까워질 수록, 반짝이는 오브제와 오너먼트들이 대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트리 자체가 워낙 커서 감상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만은 트리에 가까이 갔다가 조금 더 멀어졌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먼 곳에서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산타클로스, 루돌프, 지팡이, 선물 꾸러미… 온갖 오너먼트로 장식되어 있는 트리가 반짝였다. 트리를 둘러싸고 있는 솔방울 모양의 전등이 귀여웠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작년에는 이런 것들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것 같은데. 누구와 함께 있든…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는 게 별로였는데.
“눈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그 외침이 신호가 된 듯,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까만 하늘에 하얀 점처럼 보이던 눈이 조금씩 뚜렷하게 보였다. 그 눈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자며 서로 모여들었다. 사진을 찍어주던 사람도 가까이 와 어깨를 잡고 셀프 모드로 돌려 사진을 찍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동영상을 찍고 있는 건지 손을 흔드는 사람들, 재미있는 포즈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무리들, 시선이 상관 없는 것처럼 짧게 입을 맞추는 연인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릴 수록 커지는 웃음, 셔터음 그리고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 오너먼트에 비쳐보였다.
대만은 천천히,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얼굴에 닿았다가 녹는 눈이 차가웠다. 그 숨을 천천히, 길게 내뱉었다. 그 숨만큼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느린 쿵쿵거림은 25일이라는 숫자를 보면서 세었던 시간과 비슷했다. 아주 느리게 흐르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궁금해했던 어떤 것. 조금 더 자주 가던 시선. 그 시선만큼 오래 머물고 있던 궁금함. 그 궁금함만큼 머릿속에서 커지던……
“…….”
“…….”
핸드폰을 들고 있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태섭은 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손에 든 핸드폰 역시 그랬다. 대만은 고개를 조금 숙여, 목도리 안으로 입술과 코를 숨겼다. 신발 끝에 눈송이가 떨어졌다. 스르르 녹는 눈송이가 많아졌다. 눈송이는 신발 끝을 물들였다. 이 물들임이 짙어진다.
하나씩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남기는 어떠한 흔적이 새겨지고 있었다.
대만은 고개를 들었다. 오로지 저 하나만 비추고 있을 태섭의 오너먼트를 향해 웃었다. 어떤 셔터음이 들렸다. 셔터음이 사라진 뒤에는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흔적이, 어떻게 새겨졌을까. 물어보지 않아도, 제대로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구라도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송태섭이… 지금 이 순간, 나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송태섭이…… 진짜라고.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랬다. 1층입니다- 안내음을 듣자마자 문이 열렸다. 바로 타지 않고 문이 닫힐 때쯤 타서 웃음이 나왔다. 문이 닫히고서는, 그 웃음도 사라졌다.
10층과 20층 버튼을 눌렀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 속도가 빠른 느낌이었다. 숫자가 올라갈 수록,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2, 3, 4, 5 … 빠르게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다. 대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꽉 쥐었다. 문이 열렸다. 속으로 욕을 삼켰다.
“들어가라.”
“…….”
“잘 자고. 내일 보자.”
목소리, 형편 없었을 것 같은데. 한 걸음 내디딘 대만은 다시 속으로 욕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좁았나. 몇 발자국 안 딛은 것 같은데 벌써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었다. 후. 짧은 숨을 내쉬고 뒤로 돌았다. 태섭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기대고 서 있었다. 엉성하게 매준 목도리를, 그 목도리 안에 입술을 숨기고 있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코트 밖으로 꺼낸 손이 축축했다. 억지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천천히 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태섭이 보였다. 조금씩, 빨리,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태섭을 본 순간, 대만은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
“…….”
태섭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욕을 집어삼키고, 신발 끝을 쳐다보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태섭은 그때까지도 아무말이 없었다. 대만은 축축한 손으로 마른얼굴을 쓰다듬었다. 심장이, 미칠듯이 뛰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말들이 뻥- 하고 터져서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태섭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무표정했다. 웃지 않으면 하나도 다정하지 않은 얼굴이다. 대만은 이 무심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을. 목도리 밖으로 살짝 나온 입꼬리를.
어쩌면… 뜨거움일지도 모르는 무심함을 마주한다.
대만은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탔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섭의 옆에 다시 선다. 움직이지 않던 시선이 움직이고, 문이 닫히자마자 무심함을 목도한다. 그 증거라면, 잡아 오는 손이다. 태섭의 손이 뜨거웠다. 대만은 아무 말 없이 태섭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얽혀오는 손이 단단했다. 11, 12 … 올라가는 숫자를 본다. 그 숫자만큼, 맞잡은 손에 힘이 세진다. 대만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흉곽이 부풀어 오르고, 심장이 조금 더 쿵쿵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 멋대로 생각할 거예요.”
“…어.”
“그게 뭔지 알고 하는 대답이에요?”
“대충은.”
“…안 떨어져요.”
“…어.”
“가까이 있을 거예요.”
“어.”
“지금 이 시간부터. 다음 날까지.”
“…어.”
“…눈치챘잖아요.”
“…….”
“내가 정말 어떤지… 알게 될 거야, 선배.”
“어.”
“…장난이면 그만해요. 기회 줄게요.”
20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려서 켜진 센서등이 반짝인다. 센서등으로 반짝이는 복도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열린 문이 시간이 지나 닫히기 시작한다. 대만은 짧은 숨을 뱉었다. 그만하라는 주제에 놓지 못하는 손을 꽉 잡았다. 닫히는 문 틈 사이로 발을 집어 넣고, 태섭의 손을 끌어당겼다.
“좆까, 이 새끼야. 기회는 내가 주는 거야.”
하. 터지는 웃음이 반가웠다. 뜨거움이 발산되는 순간은 언제나 좋았다. 그게 코트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어떤 것에서든.
꺼진 센서등이 다시 반짝였다. 도어락 비빌번호를 누르는 손이 엉킨다. 잡고 있는 엉킨 손가락에 바싹 힘이 들어갈 때쯤, 문이 열렸다. 태섭은 그 문 안으로 대만을 밀어넣었다. 대만을 문으로 끌어당기고, 밀었다.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제 두 팔 사이에 대만을 가두고, 몸을 붙인다. 대만이 하고 있는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뒷덜미를 손으로 잡는다.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대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제 눈을 빤히 쳐다보는 태섭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 트리에서 봤던 오너먼트처럼 반짝이는 태섭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일 지는 태섭만이 알 것이었다.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또, 관찰하면 되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정대만. 당신 이제 어디 못 가.
태섭의 늦은 크리스마스 인사는 대만의 입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아주 느린, 크리스마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