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쿼터가 끝났다. 승부는 대만의 팀이 13점 차로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만은 거친 숨을 뱉으며 땀을 닦고, 포카리 스웨트를 마셨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2 쿼터까지 치른 데다가 최근 잠을 못 잔 여파가 오늘에야 밀려들어서 머릿속이 무거웠다. 마치, 안개가 잔뜩 낀 도로를 운전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럼에도 늘 해오던 것이 농구라 몸이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주장이라는 타이틀은 부담감도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었다. 내가 핸들 한 번 잘못 꺾으면 바로 사고가 날 수 있는 거잖아. 그러지 않으려면,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내가.
“피곤해요?”
포카리 스웨트를 막 다 마셨을 때쯤, 옆에 있던 태섭이 물었다. 대만은 태섭에게만큼은 죽어도 제 컨디션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했더니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조금 나빴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웃음인 것 같아서. 어느새 차분한 숨을 고르고 있는 태섭은 땀을 다 닦은 뽀송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눈으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잠 제대로 못 잤죠?”
“아니거든?”
“내가 선배를 몰라요?”
대만은 태섭이 저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할 때마다 가끔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그렇다. 네가 나를 아냐? 이렇게 물어보고 싶은 걸 참았다. 저 입에서 무슨 대답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안 됐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라면, 저 코트장이라면 아마도, 오랫동안 봐왔던 놈들보다는 태섭이 더 잘 알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농구를 하며 자연스럽게 늘어난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완전한 태섭의 스타일로 자리매김을 한 스타일은 예전에도 있었으니까. 팀원들을 파악하고, 위치에 있을 수 있게 하며, 적당한 자리로 치고 들어가 패스를 하고, 경기를 가지고 노는 플레이를 하는 태섭이라면 아마도, 기민하게 눈치를 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은 짧은 숨을 뱉으며 두 팔에 무게를 지탱하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경기 끝나면 뻗을 것 같다.”
“밥은 먹고 뻗어야죠.”
“먹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안 먹으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운동선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귀찮아. 그냥 자고 싶어.”
“진짜 손 많이 간다, 선배.”
“뭐가 또. 왜 시비야.”
“차 가져왔죠.”
“어.”
“놔두고 내 차 타고 가요.”
“왜?”
“골골 거리는 어르신 대접하고 재워 드리려고요.”
“이 새끼가 진짜 못하는 말이 없지. 야 송태섭,”
“3 쿼터 시작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실 수는 있으세요?”
“즉등히해라이새기야……”
태섭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열이 뻗쳐서 잡지 않으려다 손이 민망할 까봐 잡았다. 송태섭이 민망한 게 아니라, 송태섭의 저, 손이. 잡자마자 꽉 잡아오는 태섭의 손이 뜨거웠다. 대만은 헛기침을 하고 태섭의 옆에 서서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 태섭 때문에 뻗친 열을 내릴 타이밍이었다.
대만은 구호를 외치고 코트로 돌아가는 동안 태섭의 등을 쳐다보았다. 넘버 7을 달고 있는 등을 코트에서 믿지 않은 적은 없다. 농구가 재미있다고 느낀 최초의 순간에 있었던 태섭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코트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녀석. 새삼 이 믿음이, 시간이 지나 다시 한 팀에서 함께 농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선수를 하는 동안 너만 한 놈은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야, 송태섭.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태섭의 머리를 헝클었다. 답지 않게 놀란 태섭이 뭐 하는 거냐며 손을 쳐냈다.
“네가 날 열받게 안 하는 게 딱 하나 있거든.”
“…농구라고 할 거면 말하지 마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래서 맞추는 거지?”
“…….”
“송태섭 코트에서는 진-짜 좋은데. 왜 코트 밖에서만 보면 열받지.”
“…닥치고 경기에 집중해요. 주는 패스 못 받으면 죽여버릴 거야.”
“너 진짜 선배한테 하는 말본새. 네 말투 교정 좀 해주랴?”
“선배한테만 이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각자 위치로 가서 섰다. 또 열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아니, 네가 왜 화를 내냐고, 네가 왜. 저 말이 닥쳐야 될 말이야? 농구할 때 열받지 않는다는 건 최고의 칭찬 아닌가? 근데 뭐? 나한테만 싸가지가 없다고? 저 새끼가 진짜. 이 열은 휘슬을 분 순간 그리고, 경기 도중에 마주치는 태섭의 눈과 패스로 잊혔다. 가, 경기가 끝나자마자 또 올라왔다.
“오늘 우승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우승 소감을 말하는 태섭의 옆에서 다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옆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태섭이 하는 말이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해 보였다. 아-주- 화기애애. 대만은 이 지점이 어이가 없었다. 방금 나도 받은 말이고, 질문이고, 거기에 비슷한 대답을 했는데. 그럼 나도 화기애애하게 보이려나? 근데 쟤는 안 그러는데 왜 나만 힐끔거리고 있는 건데.
“최근 KBL에서 한 투표 때문에 송태섭 선수의 경기 영상이나 인터뷰가 화제가 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세요?”
“아뇨. 경기 영상 빼고는 잘 안 봐서 몰랐는데. 그래요?”
“아무래도 연말이라 그런 것 같아요. 1등을 한 주제 자체가 워낙 핫해서. 그래서 1등을 한 당사자 송태섭 선수가 하룻밤을 같이 지낼 사람이 있는지를 다들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 말을 듣자마자 대만은 고개를 돌렸다. 앞에 있던 인터뷰어가 당황하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송태섭이 하룻밤을 같이 지낼 사람이 있는지가 왜 궁금해. 그 사람은 여기 없는데. 왜 상처를 들쑤시려고 해! 무언가의 사명감으로 넘치던 대만의 기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마주친 태섭의 시선 때문에 비 맞은 강아지처럼 파르르 떨다 사라졌다. 송태섭의 저 눈은 마치, 헛소리하면 죽여 버린다- 로 보였다. 이 기세가 저 눈에 졌다. 대만은 며칠 전에 태섭이 보낸 연애 고자 문자를 떠올렸다. 믿는데 못 믿는다고 했던, 버르장머리 없었던 그 문자를.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던 게 분명해서 태섭의 시선을 외면하며 헛기침을 했다. 내가 헛소리를 했다면 큰일 날 타이밍이었구나…. 농구를 할 때는 눈치가 끝내준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어째서, 연애에 관해서는 저런 소리를 못 듣는 건지. …그래서 송태섭이 연애 고자라는 말을 했나? 그걸 쟤가 어떻게 알고?
“하룻밤을 같이 지낼 사람이 궁금하신 걸까요 아니면, 하룻밤을 어떻게 지낼지가 궁금하신 걸까요? 후자겠죠?”
“어머어머. 이제 봤더니 송태섭 선수, 엄청 위트가 있으셨네요.”
“궁금해하는 건 대부분 비슷할 테니까요.”
“그럼 둘 다 여쭤보면 대답해 주실 거예요?!”
인터뷰를 끝내고 뒤에서 물을 마시던 대만은 뒤돌아보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태섭의 건조한 눈을 쳐다보며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뭐야, 왜 저렇게 쳐다봐? 대만은 무표정하던 태섭의 얼굴이 점점, 장난스럽게 변하는 걸 보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눈치는 굉장히 좋았다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곤란해질 것 같은 그런, 상황 파악.
“크리스마스에 약속이 있어요.”
“그날 경기 없으시죠?”
“네.”
“어머어머. 어머어머. 그 말은, 애인…”
“은 아니고요. 어쨌든, 약속은 있어요. 애인보다 더 골치 아픈 사람이랑요. 말하자면, 원수려나.”
“네…?”
대만은 저 말에 바닥에 그대로 물을 뿜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지다 못해 얼어붙었다. 태섭만이 조용히 대만의 옆에서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괜찮아요? 되묻는 태섭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내가 언제, 무슨 짓을 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태연해서 도리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런 제 얼굴을 힐끔 본 태섭은 시선을 돌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있는 인터뷰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빙-긋. 대만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물병을 세게 잡았다. 저 얼굴이 얼마나 다정해 보이는지, 인터뷰어조차 시선을 피할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다. 뭐야, 진짜…. 사람이 몰려든 게 아니라, 꼬시고 다닌 거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인터뷰어가 이렇게 허둥댈 이유가 없다. 그랬는데, 그 허둥은 태섭이 뒤이어 한 말에 대만도 같이 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죠? 원수를 사랑하라. 크리스마스잖아요.”
대만은 조수석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집으로 가는 내내 들리는 건 라디오에서 흘려 나오는 캐롤 뿐이었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어째서, 기어이, 송태섭의 차를 타고 가고 있는 건지. 분명히 키로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닫고 이리 와요, 라는 송태섭의 말과 함께 키를 빼앗겼다. 이 새끼가 진짜. 별 짓을 다 했다 진짜. 어쩐지 심통이 나서 말한마디 꺼내기도 싫었다.
“선배.”
“…….”
“말 안 할 거예요?”
“…….”
“우리 집에 가서 간단히 먹고 가요.”
“…….”
“집에 수면 안대 있어요?”
“…….”
“진짜. 말 안 해요?”
“…….”
“원수라고 한 게 그렇게 억울해요?”
“그래, 억울하다 이 새끼야.”
마침 차가 신호에 걸렸다. 대만은 팔짱을 끼고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태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 시선도 열받았다. 돌 던진 인간은 자기가 돌을 던진 지도 모른다는데, 딱 그 꼴이었다.
“들어나 봅시다. 뭐가 그렇게 열받는데요. 근데 열을 내야 되는 사람은 나 아니냐고요.”
“네가 왜.”
“아까 인터뷰 할 때, 내가 안 쳐다봤으면 헛소리 하려고 그랬죠?”
대만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괜히 심장이 콩닥거렸다. 진짜 말 잘못 놀렸으면 이걸로 몇날 며칠이고 뜯김을 당했을 거다, 분명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수놓여진 건물들과 가로수가 보였다. 제 마음과는 상관없이 반짝이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태섭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책임감을 좀 가지라고요.”
“무슨 책임감.”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책임감.”
“…그거 네가 먼저 말했다고.”
“물어본 사람이 누군데요.”
“물어봐 달라며 네가. 그리고 그런 건줄 몰랐어. 알았으면,”
“알았으면. 뭐요. 말 안해도 된다고 하려고 했어요?”
“그랬겠지.”
“확신해요?”
“어.”
“그래요. 그럼 못 들은 걸로 해요.”
“얌마. 이미 들었는데 뭘 모르는 척을 해.”
“그럼 책임감 가져요.”
“와……”
이 새끼 말본새 이거 진짜 어떡하지? 대만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한 것도 맞는데, 송태섭이 말한 것도 맞아. 이 무슨, 뫼비우스의 띠가 굴려가는 이야기야? 원수가 되는 거라는 말에 열받았다고 했다면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했을 텐데. 다시 말이 없어진 차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와중에 캐롤은 밝기만 했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차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주차를 하고 차에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또 말이 없다. 대만은 10층을 누르려다 말았다. 내 집인데도 누르지도, 가지도 못하고, 이게 뭐람. 20층 하나만 반짝이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이 어색하다. 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면 갈수록, 10층을 지나치자마자 손에서 땀이 났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태섭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머릿속을 뒤져 태섭의 집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아무 것도 없던 집에 들어가고 난 뒤에 처음이다. 집들이를 하지 않아서 가본 적이 없다. 20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먼저 내리는 태섭을 뒤따라 내렸다.
“야.”
“네.”
“…진짜 들어가도 되냐?”
“왜 그런 말을 해요?”
“아니… 어… 그…”
좋아하는 사람 사진을 넣은 액자라도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을 보게 되는 거잖냐! 대만은 부러 이 말을 숨겼다. 송태섭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본새를 비치는 게 싫었다. 아무 말 없이 볼만 긁적이고 있자 카드키를 태그 한 태섭이 문을 활짝 열며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어어…. 대만은 어색하게 말을 하고 어색하게 움직여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가 재빨리 신발을 벗고 집을 둘러본다. 마치, 스캔을 하듯이.
집이… 지나치게 깔끔하다. 지나치게. 이렇게 뭐가 없을 수도 있나. 처음에 왔을 때와 다른 게 있다면 커다란 티브이, 소파, 테이블, 그 위에 농구 잡지와 책(책?), 서랍장을 빼곡히 채운 트로피와 메달… 화이트와 블랙이 적절히 섞인 가구들 사이, 액자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제 집과 똑같은 구조라 돌아다니는데 거침이 없다. 거실을 지나 부엌, 손을 씻는답시고 들어간 화장실에도 뭐 하나 없이 깔끔하다. 대만은 젖은 손을 세면대에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설마, 침실에? 화장실을 나와 문이 닫혀있는 안방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긴 차마 들어가기가… 그래, 그건… 아니지……
앉아요. 태섭이 턱짓을 했다. 식탁에는 이미 무언가가 차려져 있었다. 언제 이런 걸 다 했대. 닭가슴살 샐러드와 단백질 쉐이크로 보이는 것이 하얀 컵 안에 가득 있었다. 대만은 태섭의 앞에 앉으며 눈치를 보았다. 식탁 위도 깔끔하다.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다, 젖은 손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앉은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포크를 쥐면서 후회했다. 시선을 왜 피하냐고, 왜.
“쉐이크 먼저 먹어요. 그래야 소화에 도움 돼요.”
“어….”
괜히 찔려서 그런가. 태섭의 말투가 굉장히 나긋나긋하게 들렸다. 대만은 태섭을 따라 쉐이크를 먼저 먹고, 샐러드를 먹었다. 캐롤이 나왔던 차 안과 다르게 집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이 침묵이 어색했다. 먹다가 체할 것 같아서 뭐라도 말하려고 했다가 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태섭을 보며 눈만 깜빡일 뿐. 깜빡, 깜빡.
“일단 다 먹고 이야기해요.”
“어?”
“하고 싶은 말 있잖아요.”
“어떻게 알았냐?”
“얼굴에 다 티 나거든요?”
어떻게 그걸 몰라. 덧붙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 다 먹고 이야기하자더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다 먹고 이야기하자니까.”
“너무 조용해서 체할 것 같으니까 뭐라도 말해야겠어. 그러니까 대답해.”
우물거리는 입이 느려진다 싶더니 그 입만큼, 쳐다보는 눈도 느리게 깜빡인다. 대만은 저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움직이는 눈동자를. 한참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후드티 앞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낸다. 몇 번 터치를 하더니 핸드폰에서 음악이 나왔다. 또 캐롤이다. 대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음악은 왜 틀어.
“조용해서 체할 것 같다면서요. 그래서 틀었어요.”
“…일단 먹어라?”
“다 안 먹으면 이야기 안 해요. 알죠? 말 한 번 꺼낸 건 무조건 하는 거.”
“진짜 까다로운 새끼…. 못 먹여서 억울한 귀신이 씌었나. 알았어. 먹는다. 먹어 준다. 대신 이 드레싱 어디서 산 건지는 말해. 나중에 못 물어볼 것 같으니까.”
태섭이 픽 웃는다. 대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웃는 얼굴을 보는 제 모습이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분명히 같잖다는 듯이 웃고 있는 게 확실한데, 웃는 걸 보자마자 꽁한 게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하면 송태섭이 비웃을 게 확실했다.
샐러드를 다 먹고, 태섭 때문에 거실 테이블로 쫓겨났다. 식탁 정리하고 설거지하고 갈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요. 뭐야, 밥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입술을 댓발 내밀고 구시렁거리고 있으니까 입술 집어넣으라고 말하는 태섭이 손에 컵을 들고 테이블 대각선에 앉았다. 이게 뭐냐고 물으니까 매실차란다. 소화에 도움 되니까 마시라고 컵을 내려놓으면서, 손잡이를 잡기 편하게 돌려준다. 이야… 송매너…. 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것처럼 눈썹을 올린 태섭이 소매를 조금 더 걷는다. 저게 꼭,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자는 것처럼 보였다. 대만은 양반다리를 한 채로 머그컵을 들었다. 뜨거우니까 불어서 마셔요. 입에 갖다 대기도 전에 떨어지는 말에 입술이 다시 튀어나왔다. 내가 애냐? 애야?
“며칠 전에 붕어빵 먹다가 뜨거워서 죽을 뻔한 거 벌써 까먹었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속 편해서 좋겠네요.”
“시비 걸지 마라….”
“그게 선배 장점이에요. 보는 사람 속만 터지는 거 빼면 좋은 거예요. 칭찬이에요, 칭찬.”
“칭찬이면 칭찬하듯이 말해라. 이건 뭐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애 맞네. 칭찬 제대로 듣고 싶어 하는 게.”
“이걸 진짜.”
콱, 씨. 결국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마자 현타가 찾아왔다. 무릎을 들어 이마를 갖다 대고 있으니 태섭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억울했다. 왜 쟤는 날 열받게 하다 못해 결국 옛날 버릇이 나오게 하냐고. 송태섭은 안 이러는데. 쟤는, 여유롭다 못해서 마시고 있는 매실차가 커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야….”
“네.”
“너 아까 뭐가 열받게 하냐고 물었지.”
“네.”
“이런 점이 열받는 거야.”
“주먹 들도록 만드는 게?”
“그래! 너랑 있으면 자꾸 옛날 버릇이 나와서 짜증 난다고. 너는 안 그러는데 나만 이러잖아, 나만!”
으음…. 태섭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저 속 편한 자세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 대만은 다시 양반다리를 하며 본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나한테만 너무 건방져. 아까도 그랬지, 나한테만 말본새 지랄같이 한다고.”
“지랄 같다고는 안 했는데요.”
“말 끝 붙잡고 늘어지면 죽는다, 진짜.”
“알았어요. 계속 말해봐요.”
“왜 나한테만 그래? 왜 나한테만 싸가지가 없냐? 다른 사람들은 네가 다정한 것도 알고 리드를 잘한다는 것도 알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도 아는데 왜 나는 그걸 몰라?”
“…….”
“내가 왜 아직도 네 원수냐. 이거 진짜 억울하니까 제대로 대답해.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약속 만들라고 한 거냐?”
“선배.”
“너랑 나 사이좋잖아. 싸우는 거 빼고. 아니, 말로 이러는 건 싸우는 것도 아니지 않냐, 너랑 나 사이에?”
태섭이 컵을 내려놓고 턱을 매만진다. 대만은 씩씩거리며 조금 식은 매실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자마자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태섭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쳐다본다. 뭐, 왜, 또. 퉁명스럽게 묻자 픽 웃는다. 아 왜 그렇게 웃냐고. 차나 더 줘. 태섭이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저 얼굴에 여유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것 같다. 대만은 괜히 구시렁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꽤 신경 쓰였나 봐요?”
“뭐가.”
“내가 하룻밤 보내고 싶은 사람 1등을 한 이유가?”
“…뭐. 뭐가. 아니거든?”
“근데 왜 하나는 더 이야기 안 해요?”
“…….”
“그건 안 궁금해요?”
“…차나더달라고이새끼야그리고묻는말에대답이나해……”
다시 식은땀이 난다. 일부러 말 안 했는데 그걸 굳이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냐? 대만은 테이블에 거의 엎드리듯이 몸을 숙인 채로 제 얼굴을 보는 태섭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다. 식은땀이 나다 못해 송골송골 맺힐 것 같다. 아 왜 저렇게 쳐다보냐고, 진짜.
“근데 선배 말이 맞아요.”
“뭐가. 원수라서 굳이 크리스마스날 만나자고 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그럼 뭐가 맞는데.”
“말로 이러는 거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 우리. 사이에.”
“…그렇지?”
“그러니까 주먹도 올라오는 거잖아요. 나한테만. 그렇죠?”
“…어.”
“그래서 아직 원수 맞는 거잖아요.”
“…야. 그게 어떻게 원수냐? 나는 네가 편하니까,”
“나도 그래요.”
“…….”
“나도 선배가 편하니까 이래요. 선배한테만 이러는 게 별 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나를 선배만 알고 있는 것도 있어요.”
“…….”
“근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는 나를 선배는 몰라서 억울하다는 거. 맞아요?”
얘…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청산유수로 흘려 나오는 말에 거의 홀릴 때쯤, 태섭이 긴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목이 바짝바짝 마른다. 저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서 조마조마할 때쯤, 제 마음은 모르는 것처럼 태섭이 웃었다. 대만은 또 열받았다. 아까는 얼굴에 다 티가 난다며. 그럼, 지금의 나도 어떤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알면, 웃음이 나올 수가 있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잊지 마요.”
“왜.”
“크리스마스에 알게 될 거예요.”
“…뭘.”
“선배가 궁금하다는 나?”
“굳이 크리스마스에 안 그러고 평소에 그래도 되는 거 아니냐고.”
“응, 싫어요.”
“뭐가 싫어.”
“그런 게 있어요.”
“…말 안 할 거면 아예 하지를 말던가. 괜히 궁금하잖아.”
“그러면 더 좋고요.”
“뭐가 좋아. 뭐가! 난 싫어. 궁금한 거 싫다고!”
…미친.
나 지금 무슨 소리. 한. 거냐?
“오케이…. 선배 마음 알았어요.”
“…말 잘못 나왔어.”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있어요?”
“…잘못… 나왔다고.”
“정대만 가오 어디 갔냐.”
“여기서 가오 이야기가 왜 나와?”
“차 더 줄게요.”
“아니라고, 진짜. 야 송태섭. 내 말 듣고 있냐?”
“듣고 있어요.”
“나 집에 갈 거야.”
“선배가 차 달라고 했다, 분명히. 두 말하기 없다고 했어요.”
“송태섭 진짜 싫다. 와. 진짜 짜증 난다 진짜. 너만큼 나 빡치게 하는 인간 만나기도 힘들 거다. 와… 어지러워……”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쳐다본다. 천장이 빙글 뱅글 돈다. 지 욕을 하고 있는데도 뭐가 좋은 건지, 웃는 송태섭의 웃음소리가 섞인다. 대만은 손등으로 눈과 이마를 가렸다. 태섭이 재생한 익숙한 캐롤이 이제야 들린다. 산타 베이비 어쩌구… 한숨을 폭 내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산타 베이비 저 싹바가지 없는 송태섭 좀 곤란하게 해주세요… 내 소원이에요, 진짜… 제 선물은 저거면 돼요 진짜……
“울어요?”
“겠냐?”
“이거 마셔요.”
“…내가 제명에 못 살면 너 때문일 거다….”
“지옥 가서도 생각나고 좋겠네요.”
“지옥 같은 소리 하네. 천국 갈 거거든?”
태섭이 웃었다. 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창밖으로 펼쳐진 스카이라인을 쳐다보며 차를 마시다 결국 혀를 데었다. 진짜 손 많이 간다니까, 선배. 대만은 휴지와 물티슈를 건네는 태섭을 죽도록 노려보았다. 너 때문이잖아! 이 말에 태섭은 웃기만 했다.
“아니, 너 때문이라고. 웃을 때가 아니야, 네가.”
“알았어요. 전부 내 탓이라고 해요. 내 생각하고 좋겠어요.”
“그게 좋겠냐? 어? 좋겠냐고.”
“네.”
“도대체 뭐가? 진짜 웃기는 놈이네, 이거. 줘, 내가 닦을게.”
태섭이 입 주변을 닦으려고 해서 시선을 피하며 휴지와 물티슈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제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태섭에게 뭘 그렇게 쳐다보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목구멍을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느리게 입술을 닦았다. 뭐라도 해야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태섭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벽 한 켠에 자리잡은 전자시계가 보였다. 대만은 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날짜와 시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제 정말, 곧, 크리스마스다.
눈이 깜빡일 때마다 초가 바뀌었다. 한 번 깜빡일 때마다 1초씩 늘어나던 것이 2초, 3초… 점점 빠르게 흘렸다. 그런데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제 옆에 있는 태섭 역시 그랬다. 느리게 가는 것들이 나쁘지 않았다.
매실차 정보 공유 좀.
대만은 그제야 자연스럽게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