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있잖아,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각자의 방 앞에서 가만히 선채로 마주쳤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쳐다보기만 했다. 잘잤냐거나, 자는데 불편한 건 없었냐거나, 잠과 뒤바꾸고 아침에 마주치면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인사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 잘자라는 인사를 먼저 건넨 대만조차도. 이 조용함은 태섭이 오기 전과 다를 게 없었다. 태섭이 먼저 방으로 들어간 뒤 거실불을 끈 다음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뒤에도, 문을 닫고 나서도 그 앞에 한참동안 서있다가 이불을 걷으며 침대로 들어가 누울 때도, 내일 할 인사를 생각하면서 물끄러미 천장을 봤을 때도.
“…….”
“…….”
누군가 있어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같이 있어도 없는 것과 똑같은 걸까.
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미동없이 조용하던 태섭이 먼저 인사를 했다. 잘잤어요?
“어. 너는?”
“잘잤어요.”
“…잘 잔것 치고 머리가 상당히 깔끔하다?”
정곡을 찔린 태섭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저 말을 하면서 옅게 웃은 대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대만에게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한 시간이라던지, 그렇게 하기 전, 아니 몇 시간 전부터 대만의 냄새가 가득한 방에서 누워 있다는 사실과 수많은 생각 때문에 잠을 못잔 거라던지, 이런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걸 안다는 듯이 들렸다. 들키고 싶지 않다던 생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것이 느껴지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침, 먹어요?”
“어.”
“바로? 아니면, 아침 운동 하고?”
“보통은 아침 운동 하고 먹어.”
“오늘은요?”
“오늘은, 쉬려고. 구단에서 특별 훈련이 있기도 하고.”
태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더 하지 않은 것처럼 들렸으나, 일부러 더 묻지 않았다.
정신 차려, 송태섭. 쉽게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기로 다짐했었잖아.
“아침, 어떻게 먹어요?”
“…일부러 맞출 필요는 없는데.”
“비슷하면 좋잖아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는 태섭의 뒷모습을 보면서, 대만은 머리를 매만졌다.
“같이 먹을 필요는 없는데.”
앞치마를 하려던 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어마무시했다.
“음식은 나더러 하라면서요.”
“…그랬지.”
“그랬는데. 음식은 내가 하고, 먹는 건 각자 먹자?”
대만은 끙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태섭이 당장이라도 뭐 하나 깨부술 것 같은 얼굴로 무시무시하게 말해서가 아니라(이런 건 이미 애초에 적응 끝이었다), 정말 싸가지가 없는 말이었다.
“미안. 실수했어.”
“…여전히 사과는 빠르네요.”
“당연하지. 나 째째한 사람 아니다.”
태섭이 앞치마를 마저하며 옅게 웃었다. 정대만이 째째하지 않은 사람인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사귀기 전보다 사귀고 난 뒤에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가끔, 언젠가는 자주, 스스로가 밉고 싫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 역시.
“뭐냐, 그 웃음? 인정 못 한다는 뜻이야?”
“그럴 리가요.”
태섭은 여전히 웃었다. 진심이었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만은 조용했다.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 얼굴이 또 옛날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맞추려고 본다 왜.’ 입술을 댓발 내민 정대만이 시위하듯이 하던 말이 떠올랐고 이건 행복하게도, 초라하게도 만들었다. 눈 앞에 있는 대만을 보고 있자니 더 그랬다.
그래서 깨달았다. 너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작정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헤어진 이상, 과거에는 힘이 없다. 그럼에도, 힘의 원천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말이 없는 대만을 보면서, 어떤 예감이 들었다. 오래된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할 거라고. 어떤 기억과 말이 끊임없이 다짐한 시간을 좀먹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발목을 단단하게 만들 작정으로 왔다. 그 누구도 아닌, 정대만의 곁에서.
“뭐 먹어요? 말만 해요, 다 해줄게요.”
줄곧 일자였던 대만의 입술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태섭이 냉장고 문을 열며 한 말에 자신감이 가득차 있었다. 전문 쉐프처럼 구네. 어이가 없어져서 아침부터는 절대로 할 수 없을 법한 음식을 말하려던 찰나, 미간을 구긴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주는 대로 먹어요.”
“갑자기 뭐냐?”
“있는 게 없어요.”
“어제 장 봤잖아.”
“맛있다고, 다른 거 더 해달라던 사람 어디 갔어요?”
“…그랬는데 다 먹은 건 너잖아!”
“해달라고 했으면서 안 먹은 사람 어디 갔어요? 같은 음식 재탕 하는 거 별로라고 한 사람 어디 갔냐고요.”
“…….”
“몇 시에 와요? 같이 장 보러 가요.”
앞치마 끈을 묶는 팔이 팽팽해진다. 대만은 보란듯이 끈을 잡아 당기며 꽉 묶는 태섭을 보면서 눈만 깜빡였다. 무언가 잡을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몇 시에 오냐고요. 퉁명스럽게 하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마주 잡고 잠들기 전까지 했던 다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멋대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거 금지. 멋대로 판단하는 거 금지. 멋대로 실망하는 거 금지.
어떻게 같이 지내지. 무슨 말을 하지. 어떤 얼굴로 봐야 하지.
잠을 설친 게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시간이 흘렸다. 아무리 미친 전 애인이어도 봐왔던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어색하기만 했던 태섭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얼마나 익숙해졌냐면,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태섭이 음식을 할 때 입고 있던 앞치마를 바톤 터치 하듯 입어도 아무렇지 않아졌다.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앞치마도 옷이라고, 같은 옷을 번갈아가면서 입는 것 같아서였다. 저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캐치한 태섭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뭐 때문에 이러는지를 눈치챈 건지 ‘같은 앞치마 입으면서 지내니까 기분 이상하네요.’ 이랬다. ‘미친놈. 너는 헌 앞치마 가져라 나는 새 앞치마 가진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한 말에는, ‘사이 좋은 것 같은데 왜요.’ 지랄을 했다. 절대 사서 돌아온다. 절대. 다짐은 이루지 못했다. 마트에 갈 때마다 앞치마를 사러 가자는 말에 돌아오는 건, 입은 웃는데 눈은 안 웃고 있는 무시무시한 송태섭이었다. 그래도 무시할 수 있었다. 네가 뭔데? 할 수도 있었으나, 그럴 때마다 미친 전 애인 새끼가 스킬을 걸었다. ‘사지 마요. 네?’ 어찌나 애틋하게 쳐다보는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났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성질이 났다. 사귈 때도 안 이랬다. 눈썹만 삐뚜름하게 올리기만 했지.
태섭은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 꽤 여유로워진 모습이 자꾸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이랑 사귄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다른 건 몰라도 말로 하는 표현이 확실히 늘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러는 본인이 다른 사람이랑 사귄 건 머릿속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성격 어디 가나요.’ 이 말을 했던 송태섭의 유일한 절친인 달재조차 모르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상상은 끊임없이 부피를 키워갔고, 그럴 수록 불쾌해져서 멱살 잡고 물어볼 뻔했다.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어줄 때는 진짜 그럴 뻔했다. 누구한테 남자짓을 하냐? 너 한 번도 나한테 이런 적 없었잖아?
그러다 갑자기 이런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고. 이 생각에 머리가 새하얘진 대만은 모든 것을 실토할 뻔했다. 나 사실 너랑 헤어지자는 말 할 때 울고 싶은 거 엄청 참았어. 왜 그랬냐고? 널 좋아해서 이 새끼야. 그러지 못했던 건,
“나 범인 누군지 아는데. 알려줘요?”
아주 가끔, 애인이었던 시절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고 스포 다 보고 봤었잖아요. 이제는 잘 참을 수 있어요?”
“어. 그러니까 말하면 가만 안 둬.”
“선배, 조금 변했네요.”
곧바로 후배처럼 굴긴 했지만.
선배 소리를 곱씹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대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변해? 내가? 네가 아니라?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면서 태섭을 노려보았다. 태섭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방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지고 온 짐이 어찌나 많은지, 아직 정리 중이었다. 성격 급한 놈이 이런 건 빨리 못하네. 삐죽 나온 입술이 점점 더 튀어나왔다.
“나도 곧 서른인데 당연히 변했겠지.”
“그럼, 나도 그런 것 같아요?”
고개를 든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야 되는데. 쳐다보고 있어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 때문이었다. 하는 말에 무조건 점을 찍으랬다고 혼잣말까지 그랬다.
“그리고 서른은 곧이 아니라, 2년 뒤에나 그렇잖아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섭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만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 빨리 가잖냐.”
“안 그렇던데.”
대만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태섭이 찍은 점이 무겁게 느껴졌다. 혼잣말이었으면 좋겠다가도 아니었으면 했다.
“선배.”
아니면 어떤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옷걸이가 부족해요.”
대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느리게 돌아가는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당당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게 짐을 왜 많이 가져 왔냐?”
“남는 서랍장 없어요? 헹거나.”
“알잖아, 나 옷 많이 사는 스타일 아닌 거.”
대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속으로는 미친듯이 욕을 했다. 알잖아? 알잖아아?? 이 말이 퍼즐 조각처럼 대만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네. 알아요.”
“…….”
“없으면, 주문해도 돼요?”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 대만과 달리, 태섭의 얼굴은 말랑해졌다. 마치, 없는 조각 하나를 찾은 사람처럼.
대만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을 쥐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영화는 이제 막 절정에 돌입했다. 긴장감을 일으키는 음악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거실 전체에 퍼졌다.
“선배가 주문하려고요?”
“내 집이잖아.”
“내가 쓸 거잖아요.”
“가져갈 거 아니잖아.”
그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순간 속에서,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대만은 눈을 깜빡였다. 티브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건, 제 자신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태섭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어떤 것을 참을 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목울대 역시 그랬다. 태섭이 대만을 아는 것처럼 대만 역시 그랬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손에 쥔 퍼즐을 잃어버린 것처럼 시선을 내리는 태섭을 보자마자 기분이 가라앉았고 조금, 서글퍼졌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이 기분은, 다시 시선을 마주치는 태섭과 마주쳤다.
“그렇게, 선 안 그었으면 좋겠어요.”
태섭의 시선은 단단했다. 거짓말 아니라고 말했을 때처럼. 대만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가라앉은 기분이 자꾸만 그랬고, 서글픈 감정 역시 그랬다. 이것이, 대만의 마음 속에 있는 다짐한 것을 점점 쪼그라들도록 만들었다. 목구멍이 갑갑해졌고, 아까 전에 태섭이 그랬듯, 목울대가 자꾸만 움직였다.
죽을 때가 다 된 건 송태섭이 아니라, 난가.
나 아무래도 거짓말 한 것 같아. 나 지금 째째해. 너무 째째해서, 쪽팔려서 사라지고 싶어. 이 말을 실토하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하게 된다면, 헤어지기 전에 솔직하게 말했다면, 안 헤어질 수도 있었잖아. 그야말로 쪽팔리는 말이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알았어. 안 그럴게.”
“고마워요, 선배.”
너야말로 선 그으려고 선배라는 말 하지 말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하면 안 되는 말을 삼키기 위해 심호흡을 뱉은 대만은 태섭에게 손짓을 했다. 일루 와 봐. 종류 되게 많은데. 어떤 게 좋냐?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섭을 보며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나는 네가……. 어떤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빨래 바구니에 쌓이는 옷들은 늘 뒤집어져 있다. 티셔츠, 바지, 상관 없이 모두 다. 양말은 뭉쳐 있는 상태로 두지 않는다. 여름인데다가 두 명이라 그런지, 매일매일 바구니에 가득 쌓인다. 재활 센터에 다녀온 태섭은 집으로 들어오면 곧장 샤워를 하러 들어간다. 벗은 옷을 바구니에 넣으려다 위에 있는 대만의 속옷을 본다. 그것을, 있는 힘껏 모르는 척한다. 재빨리 옷을 벗고, 그 옷들로 대만의 속옷을 감춘다. 제 속옷은 감추지 않는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대만이 땀에 젖은 옷을 바구니에 넣으려다 입술을 말아문다.
바지부터 널어야 된다, 티셔츠는 뒤집어서 널어야 된다, 옷걸이를 걸어야 된다, 안 걸어도 된다. 끊임없이 내뱉는 말이 멈추는 건, 속옷을 널 때. 각자 속옷을 눈치 보듯 순서대로 너는 동안, 절대로 쳐다보지 않는다. 약속을 하지 않은 건데도.
씻은 그릇은 모두 두 개. 숟가락, 젓가락, 포크 모두. 잘 마른 그릇을 원래 있는 곳에 두는 내내, 태섭이 재생한 음악을 듣는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영어 노래만 튼다. 가끔 허밍음도 들린다. 무슨 노래인지 궁금해서 몰래 음악 찾기도 해봤다. 웬 사랑 노래다. 가사를 찾아봤다. 언제나 너를 좋아할 거고,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가기 싫다는 노래다. 그걸, 운전하면서 듣는다. 언제는, 같이 마트에 가려고 차에 타는 순간 자연스럽게 연결된 블루투스 때문에 태섭도 듣게 되었다. 선배도 이 노래 좋아해요? 태섭이 기쁜 듯이 물었다. 대만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어. 좋아해.
신발장에 자리가 없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구단에서 신는 신발을 가져 온 대만이 현관문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 이 신발 다 신냐? 매일 바꿔 신어? 난 그런 거 못 봤다? 태섭은 씩씩거리는 대만의 잔소리를 들으며 신발을 놓을 자리를 마련한다. 나한테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뜨끔하며 구시렁거리는 대만은 놓으라고 마련한 자리가 제 신발 위에 겹쳐놓으라는 걸 안 순간, 소리를 빼액 지른다. 여긴 자리가 아니잖아아! 그럼 내 신발 위에 올려 놓을래요? 그런 말이 아니라! 어. 마구 더럽혀준다. 그래놓고서는 신발 바닥이 닿지 않도록 정성들여 올려놓는다. 태섭은 소리없이 웃는다.
할 일이 없으면 같이 티브이를 본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저건 아니지 않냐며 동의를 바라기도 하고, 의견이 안 맞아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다 누군가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자리를 물끄러미 보다 일어선다. 푹 꺼진 소파 자리 두 군데와, 소파 앞 테이블에 있는 컵 두 개, 살짝 열려져 있는 문 두 개를 본다.
집에서 무슨 냄새인지 정의할 수 없는 향이 날 때마다, 대만은 태섭의 방을 훔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 집인데 봐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그래도 남이 쓰는 방이라는 생각이 싸운다. 남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서게 되지만. 그러다, 예전에도 그랬다는 걸 깨닫는다. 예전에, 같이, 가까이 있었을 때. 태섭에게서는 늘 좋은 향이 났다. 답지 않게 어깨에 기대오거나, 어깨를 감싸고 끌어 당길 때마다 나던 향이 있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을 때마다 뭐하는 거냐고 툴툴거렸다. 그래놓고서는 얼굴이 새빨갰다. 코가 닿은 곳을 벅벅 문지르기나 했다. 간지러울 짓은 하나도 안 했는데. 남이라서 한 행동이 아닌데.
송*섭
헹거가 들어 있을 커다란 택배 박스에 적힌 태섭의 이름을 보는 내내, 대만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제 집주소가 적혀 있는데, 이름은 송태섭이다. 이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걸 그대로 둬야 할지, 방 안에 둬야 할지 잠시 생각한다. 재활 센터에 간 태섭은 트레이닝이 끝난 후, 달재를 만나기로 했다. 조금 늦는다는 문자가 온 건 30분 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받았다. 그 문자를 생각하면서 태섭의 이름을 쳐다본다. 한참동안 서있다가 그대로 두기로 한다. 오면, 알아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대만은 냉장고문을 열었다. 태섭이 미리 만들어놓고 간 음식을 훑어보다가, 하나씩 꺼냈다. 뭘 이렇게 많이도 만들어놨는지, 한가득이다. 전자레인지에 돌려야 될 것을 돌리고, 나머지는 조금씩 그릇에 덜었다. 삐 삐 소리가 나자마자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무언가를 씹고 있는 소리만 나는 부엌은 조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조용했다. 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먹는 속도가 자꾸 느려지는 건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입에 든 음식을 억지로 삼킨 다음 물을 마시는 걸 반복했더니 금세 배가 불렀다. 숟가락을 놓은 뒤에는 짧은 한숨까지 나왔다. 맞은편에,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였다. 이것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이게 당연한 거다. 송태섭이 있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런데도,
설거지를 하고 나오는 그릇, 하나. 어제 벗어 놓은 제 옷 위에 오늘 입은 옷을 벗어 둔다. 푹 꺼진 소파 자리, 한 군데. 말하는 사람, 없음.
손에 쥔 리모컨을 소파에 던진 대만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연락, 없음. 이 사실이 시간을 보도록 만들었다. 밤 10시 25분. 미간을 구기며 통화 기록에서 태섭의 이름을 찾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가장 위에 있지만 괜히 찾는 척을 했다. 연락을 할까말까 고민했다. 27살 다 큰 남자가 이 시간에 안 오는 걸 뭐라해도 되는 게 맞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택배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만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 전의 고민은 갖다 버리고, 망설임없이 이름을 꾹 눌렀다. 뚜르르ㅡ. 신호음이 울렸다. 헹거 언제 오냐고, 정리 안 된 옷 보는 게 싫다고 노래를 불러 놓고 아직까지 안 와? 이 자식, 받기만 해 봐.
-선배?
대만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목소리톤이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올라가서였다.
-무슨 일 있어요?
“…….”
-왜 전화 했어요?
대만은 또 할 말을 잃었다. 막상 헹거 왔다고 말하려니 조금 쪽팔렸다. 그러니 할 말이라고는,
“어디야?”
솔직한 말밖에 없었다.
-거의 다 왔어요.
대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쪽팔렸다.
“어…. 그래?”
-안 와서 전화 했어요?
“아니?”
-걱정 돼서?
“아니이이이?”
-선배는 집인가 보네요. 불 켜져 있어요.
발끈하며 자리에 일어선 대만은 태섭의 말에 눈만 깜빡였다. 몇 번이고 깜빡이다, 머리를 매만졌다. 목덜미가 따뜻했다.
“얼른 들어오지 뭘 보고 있냐?”
-그냥요.
“빨리 와. 문 안 열어 준다.”
-하하.
“뭘 웃어?”
-그냥…. 그냥요.
뜨끈한 목덜미를 만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대만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설마, 술 마셨냐? 아니지?”
-두 잔 정도?
“들어오기만 해 봐. 얼른 튀어와.”
통화를 끝낸 대만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활 받고 있으면서 술을 마셔?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대만도 안다. 태섭이 말했듯이, 태섭의 발목 상태는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같이 있으면서 계속 관찰하며 살폈고, 똑같은 부상을 입은 선배가 있어서 정말 심각하면 어떤지도 잘 알고 있다. 정말 심각했다면 감독이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에서 재활 치료를 받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마음이 편안하면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다는 태섭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섭이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대만이 잘 안다. 얼마나 독하게 하는지. 얼마나 이 꽉 물고 버텼는지도.
그걸 알면서.
“재활 받는다는 새끼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적게 마셨다고 술이 아니게 되냐? 살만 하냐? 어?”
현관등이 꺼졌다 커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태섭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대만을 빤히 쳐다만 볼뿐이었다.
“네.”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 얼굴을 붙잡고 싶은 손을 주머니 안에 감춘 채로.
“살만 해요. 아주 오랜만에요.”
대만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태평하게 말하는 저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걸 참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 꺼진 현관등은 한참동안 켜지지 않았다. 어금니를 꽉 깨문 대만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다 손으로 택배 박스를 가리키고,
“헹거 왔어.”
“…….”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조립해.”
뒤돌아서는 대만을 태섭이 잡을 때까지.
“조용히. 조용히 하면 되잖아요.”
“…….”
“같이 해요. 지금.”
시선이, 오랫동안 마주친다. 켜진 현관등이 다시 꺼졌다. 그럼에도 흐리게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아주 선명하다. 이제는 적응이 된 탓이다. 정말이지, 어떤 것에도 다 적응이 되는 구나. 이런, 어이없는 생각이나 한다. 태섭인지, 대만인지, 누가 하는 건지도 모를 생각이 센서등 아래에서 부유하던 먼지처럼 둥둥 떠다닌다.
그럼에도 이건, 대만의 생각이 확실하다.
따뜻하다. 아니, 뜨거운가. 세게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손이 더 커졌을 리는 없는데.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원래 이렇게 네 손 안에 가득 차던 거였나. 이게 이렇게도……,
그리운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