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긋난 게 아닌지 해서요.
어긋나? 뭐에 말이오?
삶에요. 남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에요.
샤를, 그러니까 인간은 정말로 사랑해야 하는 걸까요, 불행한 열정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사랑한다고 말해줘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 입은 옷으로 트집을 잡거나, 쳐다보는 눈으로 시비를 걸거나, 하다못해 왜 그렇게 앉아있냐고, 속 안 좋으니까 쳐다보고 있지 말라고 한다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렸다. 에너지가 넘쳤고. 그런 식으로 밖에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 밖에 몰랐다. 자세 똑바로 못하냐는 시비에 다리를 내리는 척하며 뻗을 수 있을 만큼 뻗어 무릎과 정강이를 건드리던 유치함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인상을 쓰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나에게 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알 수 있었다. 나 지금 너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 존나 네 생각 말고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없어. 빌어먹을 너 때문에.
나 때문에,
억지로 앞에 앉아 있는 대만을 태섭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협회장을 쳐다보고 있는 대만을. 신문이나 영상, 티브이에서 보던 것과 다른 것 같지 않으면서 달랐다. 태섭은 벗어둔 선글라스를 만졌다. 미리 말씀도 안 하시고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대만의 볼멘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 꽂혔다. 감기 걸렸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태섭은 눈을 깜빡였다. 가끔, 여름 감기에 걸려 고생하던 땀에 젖은 대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섭아, 나 물….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말을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어느 날의 정대만.
태섭아. 태서바. 야아, 송태서업…
“피곤하시죠?”
“아닙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태섭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대만에게로 움직였다.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흠칫하며 태섭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대만을 보며 태섭은 옅게 웃었다. 시간을 무너뜨리며 나타나는 기억이, 그 기억 속의 대만이 지금의 대만의 옆에 서있는 것 같았다. 자꾸만 비교를 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대만이, 잘 알고 있는 과거의 대만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태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간을 누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 가죽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피곤했다. 기억은 기억으로 묻어둬야 한다는 것. 가장 잘 알고 있는 그 시절의 대만을, 지금의 대만으로 재정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대만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허리를 숙이고, 허벅지에 팔을 올렸다. 태섭과 제 사이에 있는 테이블을 쳐다보면서 대만은 눈을 깜빡였다. 이런 식으로 태섭을 만나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태섭을 만날 거라는 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농구를 하고 있는 이상, 소식을 아예 모를 거라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농구를 한다고 해서 모든 선수들과 교류를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게다가 태섭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농구를 해왔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
대만은 생각을 멈추었다. 트리거는, 방심하는 순간 튀어나오는 고약한 놈이었다. 깊숙한 곳에 감춰둔 트리거를 잡아당기지 않기 위해서, 대만은 심호흡을 길게 했다. 협회장도 들을 만큼 큰 심호흡이었다.
“송태섭 선수가 출국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에요. 정 감독 힘들게 할 생각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제 식대로 끼어 맞춰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협회장은 대만을 보며 주먹을 쥔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툭툭 내리쳤다.
“우리로서는 송 선수의 컨택이 정말 기뻤습니다. NBA 시즌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아시안게임 출전 선수들을 도와주려고 귀국을 해줘서 정말 든든합니다. 선수들 사기가 한층 더 올라가겠죠.”
“아닙니다. 정 감독님에게 방해만 안 된다면 다행이죠.”
“그럴 리가 있겠어요? 두 사람 예전에 같이 농구를 했었잖아요. 호흡도 좋았고. 잘 지냈잖아요. 그렇죠?”
“…….”
“…….”
“할 수만 있다면 송 선수가 국대 달고 나와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하하.”
대만은 눈을 감으며 미간을 눌렀다.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속으로 욕을 뱉으며 다시 길게 심호흡을 했다. 속을 들끓는 답답함과 뜨거움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 번 호흡하고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감독이라는 이름을 단 이후, 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큰 감정 기복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꽤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기와 치기,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대만은 시간의 힘에 기대었다. 그 언젠가, 그랬듯이. 대만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시간은 사람을 무르게 만든다는 것을.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어서 모난 구석이 없이, 튀지 않게 만들어준다. 그 시간은 대만을 그러려니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뭘 해도 그러려니. 그러려니 하는 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다. 나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되니까.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 제 앞에 있는 태섭은.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오랜만에 보죠?”
협회장이 나갔다. 누구 하나 움직이지도,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거운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대만을 쳐다보는 태섭의 느린 시선이 여러 번 깜빡였을 때, 대만과 시선이 마주쳤다. 태섭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주친 시선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목이 멜 정도로 묵직했다.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데도. 예전처럼 사랑을 담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은데도. 그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도 꼼짝 못 하게 만들어버리는 대만을 보면서 태섭은, 살이 깊게 패일만큼 맞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애들 연습 봐준다고.”
“네.”
“언제까지.”
“출국 날짜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태섭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잘 모르겠지만 태섭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대만의 말투는. 감정을 꾹 누른 채로 말하는 이 목소리는. 헤어지자고 말할 때와 비슷하다는 것.
대만이 지금, 화가 났다는 것.
“안 물어봐요?”
“나 말고 유 코치랑 프로세스 이야기 해.”
“안 궁금해요?”
“애들 주로 봐주는 것도 유 코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유 코치한테 물어보고.”
“화났어요?”
대만의 입술이 다물렸다. 태섭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태섭을 보면서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섭은 대만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 눈에 담았다. 어디를 보는지, 입꼬리가 떨리고 있는지, 화를 낼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 그대로인지, 손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목소리는 어떤지.
소매를 걷은 대만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태섭을 쳐다보았다.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저와는 달리 태섭은 평온해 보였다.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을 했다. 지금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는 건 태섭이라는 걸 대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너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너의 습관이. 너의 얼굴이. 너의 말투가.
“잘 들어.”
“…….”
“일 할 때. 경기장에 있을 때는 최소한의 말과 행동만 할 거야. 분위기 이상해지면 곤란하니까.”
“…….”
“나한테 그 어떤 사적인 이야기도 꺼내지 마.”
“선배.”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하지 마. 멋대로 나한테, 다가오지 마.”
“형.”
“그 호칭.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꺼내지 마. 알겠어?”
“만족해요?”
대만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언젠가 태섭이 그랬듯, 주먹을 쥐고 주머니 안에 오른손을 넣었다. 천천히 일어나 제 앞으로 걸어오는 태섭을 쳐다보며 대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보는 태섭을 보면서, 대만은 입 안의 살을 어금니로 깨물었다. 태섭이 제 앞으로 왔을 때, 태섭의 체향을 맡은 순간, 대만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태섭의 체향은 대만을 어느 날로 데려다 놓았다.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그날의 추억과 잔상이 떠오르는 것처럼.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에 아주 오래 전의 태섭이 떠올랐다. 제 뒤에서 백허그를 했을 때, 제 허리를 감싸는 손이 천천히 얼굴 쪽으로 올라왔을 때, 손가락이 움직이며 볼과 입술을 만질 때. 포옹을 할 때.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을 때. 그 손과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 공기처럼 들이마시던, 나의 목숨과도 같던 향기.
“형이 원하는 대로 성공했어. 형이 원하는 대로 나, 누구도 날 끌어내리지 못할 만큼 올라갔어요.”
“…….”
“내 사랑과 형의 소원을 바꾼 대가로 성공했다고요, 나.”
“…….”
“멋대로 귀국해서 멋대로 하겠다는 거에 두 손 들고 환영해 줄 사람들이 많아질 만큼.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그 누구도 허투루 넘기지 못할 만큼.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못할 만큼.”
“…….”
“형이 원하는 대로 했어요. 그래서 만족하냐고.”
“…까불지 마.”
“내가 어떻게 형한테 까불어요. 형이 원하면 군말 없이 다 하는 내가 어떻게 형한테 까불어. 내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는데 어떻게 내가 형한테 그럴 수 있어.”
대만은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서 조그마한 균열을 느꼈다. 태섭은 한 발자국 더 대만의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엉킬수록, 욕심을 내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또 죽였다.
“형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형이라고 안 부를게요 대신. 둘만 있을 때는 부를 거야.”
“야.”
“형이 헤어지자는 말에 나 아직 대답 안 했어요.”
“너!”
“형이 할 건 단 하나야.”
손을 뻗었다. 왼손의 손가락 끝이 닿았다. 뿌리치려고 하는 손을 낚아챘다. 손가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 온기에, 눈을 감을 뻔했다. 제 손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손을 꽉 잡으면서 태섭은 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얼굴을. 아닌 척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을.
“내 사랑을 돌려줘요.”
결국 미간을 찌푸리는 대만의 얼굴을 보며 태섭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점점 가쁜 숨을 내쉬는 대만을 보면서, 태섭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 대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붉어지는 대만의 눈동자를 보면서 태섭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서있던 나를 잡아줘.
수많은 함성 소리를 들으면서도 텅 비어 있던 나를 채워줘.
빛바랜 기억들로 버티고 버틴 나에게 사랑을 돌려줘.
내가 제대로 살 수 있게,
“형이 가져간 내 사랑… 이제는 돌려줘.”
사랑한다고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