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ME. ZEro.

태섭대만

9





 쿨럭. 팔로 입을 가린 대만은 낮게 기침을 뱉었다. 호된 여름 감기에 걸린 뒤 남아있던 잔기침이 사람들이 일으키는 먼지 때문에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억지로 침을 삼키고, 가방에서 물을 꺼내어 마셨다. 그제야 기침이 멎었다. 대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괜찮냐고 묻는 준호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저런. 짧게 혀를 차는 준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만은 무거운 눈두덩이를 눌렀다.



-차는 아직 안 고쳤어?

“어. 부품이 없어서 주문을 해야 한대.”

-하필 이럴 때 차가 터지냐. 회사차는 못 타?

“안 물어봤어.”

-물어나 봐. 너도 몸관리 해야 하잖아. 괜히 스트레스 받지말고.

“어.”



 전 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아팠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대만은 다음 역을 확인했다. 아직 조금 더 가야 했다.

 출근길, 만원인 지하철을 타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테트리스 부품이라도 된 것처럼, 열차 안의 빈 공간에 끼어진 채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붙어 있는 사람들 때문에 지하철이 흔들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당연하다는 듯,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 똑같았다. 무표정한 얼굴. 핸드폰이나 킨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그 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보는 나는 어떨지, 대만은 조금 궁금해졌다. 

 


-태섭이 만났어?



 반갑지 않은 이름이 들렸다. 대만은 고개를 들었다. 공기가 답답했다. 어, 라는 한 마디를 내뱉는 게 힘들었다. 대만은 고개를 숙였다. 준호는 대만의 대답 유무는 상관하지 않고, 답지 않게 요란하게 귀국을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대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요란, 이라. 대만은 어젯밤, 잠을 못 자게 만든 태섭의 기사를 떠올렸다. 첫사랑을 만나요, 가슴에 품어온 첫사랑을 만나나, 송태섭 선수의 첫사랑은 누구인가 … 자극적인 헤드가 대부분인 기사들. 정작 그 기사 안에 있는 태섭은 무표정이었다. 대만은 그 얼굴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의 얼굴임을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던 시간을 떠올렸다. 



-대만이 넌 아냐?

“뭘?”

-태섭이 첫사랑.



 대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차 소리로 시끄러우니 한숨 소리를 못 들을 게 뻔했다. 대만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화 주제를 바꾸고 싶은데, 그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몰라.”

-너도 몰라? 그러면 다 모르겠네.

“회사 도착 했어?”

-아직 조금 남았어. 태섭이 들어온 김에 같이 보자.

“…뭘 굳이.”

-태섭이 생일이잖아, 곧. 겸사겸사 모이는 거지 뭐. 



 다음 역은 … 안내음이 나왔다. 대만은 한 손으로 마른 얼굴을 쓸었다.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도 계속 태섭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온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준호에게 제발 그만 말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잠 못 들게 한 장본인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대만은 앞으로 멘 백팩을 꽉 껴안으며, 신난 목소리로 말하는 준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좀 알아야겠다, 송태섭 첫사랑. 얼마나 좋아했으면 헤어졌는데도 말이야. 꽤 순정남이었어?

“…….”

-그런데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닌가 봐? 헤어졌는데도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런 거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난 잘 모르겠는데.”

-그래. 물어서 뭐 하겠냐, 여태 연애도 한 번 안 해본 놈한테.



 그 말에 대만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웃어, 나 몰래 연애라도 했나 봐? 준호의 말에 대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닌데? 준호의 추궁에 대만은 고개를 들었다. 지하철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대만은 사람들 틈에 휩쓸려 지하철에서 내렸다. 준호에게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진짜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만은 경직된 목을 손으로 만졌다. 준호의 말을 계속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다 맞았다. 네가 아는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으나, 네가 모르는 연애는 한 적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연애. 세상을 다 가졌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하나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던 그런, 연애. 대만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계단을 딛으며, 환승을 해야 할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무런 표정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느리게 훑었다. 대만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큰 보폭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고 곧, 걸음이 멈추었다. 그 사람들 속에서 혼자 멈춰서 있자니, 다들 가야 할 길을 잘 찾아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만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들 속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걸음은 멈추었어도, 그들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어딘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만은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여기가 아닌데.

 분명히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는 제 발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환승을 해야 하는데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개찰구 바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떤 곳에서 멈추었다.



“준호야.”

-응?

“요즘 지하철 광고…. 본 적 있냐?”

-잘 안 보는데 왜? 아! 태섭이 광고 엄청 크게 났다던데! 무슨 역이었지 Z역 맞나? 치수가 그 근처에서 일하잖아. 그 역에서 환승하는 거야?

“…어.”

-태섭이 좋아하는 팬들이 한 것 같다더라. 요즘 팬들은 그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한대. 



 태섭의 생일 전광판을 보고 선 대만은 고개를 든 채 물끄러미 전광판 속의 태섭을 쳐다보았다. 농구공을 옆에 끼고 환하게 웃고 있는 태섭의 얼굴. 땀을 흘리고 있는 걸 보니 경기가 끝난 직후일 것이고, 웃고 있는 걸 보니 이긴 경기일 것이다.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태섭이 꿈만 같았다. 이 얼굴을, 수도 없이 본 적이 있었다. 평소에 잘 웃는 편도 아니면서. 같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옆에 있으면 치근덕거리며 웃기 바빴던, 사랑한다고 알려주기에 바빴던 얼굴을 수도 없이 본 적이 있었다. 

 형. 나 좀 봐요. 형. 혀엉. 



-그 역이 환승역으로는 가장 큰 역이니까, 술 마실 거니까 다들 차는 안 가져 올 거고. 집에 가기 편하게 거기서 보면 되겠다. 태섭이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

“…아니.”

-그럼 전화번호는.

“…모르는데.”

-뭐? 번호 바뀌었어? 너 일하는 동안 태섭이도 같이 있는 거 아니야?

“…….”

-정대만. 대만아?



 대만은 눈을 감았다. 가방끈을 꽉 붙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손을 뻗을 것 같았다. 준호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쯤, 대만은 천천히 눈을 떠 전광판 속의 태섭과 눈을 마주쳤다. 앞에 있을 때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던 반짝이는 태섭의 눈을 보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분명히 알고 있던 길이 사라진 것 같다. 발을 움직일 수가, 눈을 뗄 수가 없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 끝이 태섭에게 닿으려는 순간 곧, 허공 아래로 떨어졌다. 대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밤에 너에게 기도를 했다. 그날 이후, 너의 인생에 있어서 진 경기는 나 하나뿐이기를.

 정말 나를… 보내고 싶어요? 형 없이 성공하는 게 진짜 성공일 것 같아요?

 내가 너에게 있어서 유일한 실패이기를. 

 형 없이 농구하는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된다면,

 형 없는 내가 정말, 나라고 생각해?

 내가 옆에 없어도, 나는 너의 곁에 있는 것이 될 테니까. 


 그래서,



“따로 단톡방 하나 만들 테니까, 거기서 날짜 조율하자.”



  내 사랑을 돌려줘요

  사랑으로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태섭아.







“진짜…. 송태섭 선수예요?”

“보고도 모르냐 이것들아.”

“진짜. 진짜 그, 송태섭 선수? NBA 제왕… 송태섭 선수?”

“내가 언제 왕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송태섭은 맞습니다.”

“우와 씨발 대박!!!!!”



 대만은 욕을 해대며 난리를 치는 녀석들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뱉었다. 사기가 올라가다 못해 감당 못할 수준으로 흥분을 해대는 걸 보고 있자니, 태섭이 미국에서 정말 성공한 것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은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태섭을 쳐다보았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봐도, 몸 봐 미친 하며 손으로 쿡쿡 찔러대도, 생각보다 잘생겼다는 예의 없는 말을 들어도, 태섭은 그냥 웃기만 했다. 옛날이랑 같은 듯 다른, 조금 더 깊어진 눈매로 웃고 있는 태섭을 보고 있자니 대만은 기분이 묘해졌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인부터 하자며 빨리 종이랑 펜을 가져 오라는 말이 듣고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너네 연습 안 할 거냐고 소리를 지르자마자 태섭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만은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허리에 두 손을 올렸다가 고개를 틀어 팔에 입술을 묻고 잔기침을 했다. 



“괜찮으세요?”



 옆에 있던 유 코치가 물었다. 대만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감기로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유 코치의 말에 대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인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시선을 돌리며 몇 번 더 잔기침을 했다. 넥타이를 끝까지 하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태섭이, 여전히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서였다. 대만은 그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유 코치를 보았다. 상황을 정리하려고 박수를 치는 걸 보고, 얼른 준비하자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언젠가부터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과 어깨가 아팠다. 태섭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억지로 생각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다. 대만은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눌렀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외쳐대고 있었다. 

 한 때 너의 전부였던 사람이잖아. 왜 모르는 척을 하고 있어?



“오늘은 실력만 볼게요. 팀 나눠서 경기해도 괜찮겠어요?”



 태섭은 일부러 대만을 보며 물었다. 유 코치와 진행하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대만은 그런 태섭을 쳐다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의 끄덕임에, 태섭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태섭은 유 코치에게서 농구공을 전달받은 뒤, 공을 튕기기 시작했다. 퉁, 퉁. 태섭이 농구를 시작하자마자, 시끄럽던 녀석들이 조용해졌다. 모두, 태섭의 농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그런 녀석들을 보다,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진지한 듯했으나, 여유 있는 얼굴로 천천히 드리블을 시작했다. 공이 튕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점프를 하고, 공을 던졌다. 림으로 들어가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녀석들이 입을 쩍 벌리고 태섭을 쳐다보았다.



“저 별 거 안 했습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그런데 왜… 별 걸 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굉장히 가벼운 느낌 아니었냐? 그렇지?”

“어. 무슨 느낌이었냐면, 공이 있잖아, 송태섭 선수의 마법 지팡이 같았어.”

“미친놈 그게 무슨 표현이야?”



 대만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대만은 태섭의 움직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짧은 순간, 태섭의 말대로 별 거 안 한 그 움직임에. 녀석이 표현한 대로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 마법을 공이 부렸는지, 태섭이 부렸는지는…. 멍하게 있던 대만은 감독님, 하고 저를 부르는 태섭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가까이 와있었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 태섭을 쳐다보았다. 



“감독님이랑 저, 농구하는 거 보여 달라고 하는데요.”

“뭐?”

“감독님…. 보여주십쇼….”

“송태섭 선수랑 감독님이 같이 농구하는 거 보면, 그 기운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닙니다. 별 거 안 했다고 하는 송 선수님 농구에 지금 저희 가슴 팔딱팔딱 뛰고 있다구요.”

“그런 송태섭 선수님이랑 전설의 감독님이 농구를 하는 걸 본다? 저희 그냥 닥치고 시키는 거 다 하고요, 알아서 연습도 잘하고 가고요 예, 따까리가 되겠습니다.”

“두 분 호흡 좋으셨잖아요. 저희 감독님 옛날 경기 비디오 다 봤습니다.”

“송태섭 선수랑 감독님. 빛이 나보였습니다. 서로가 원하는 곳에 계시더라구요. 보고 배워야지 했습니다.”

 


 대만은 한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말이라면 지겹도록 들었다. 늘 싸우는 주제에 농구만 하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패스를 주고받고, 경기를 이끌어가는 것에 너희 둘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선수들을 본 적이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서든, 당시 감독에게서든 그리고,

 계속 나만 보고 있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한다, 너.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패스를 하고 싶은 순간에 거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슈팅가드인 내가 네 녀석 움직임을 보고 좋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하지 말고요.

 뭐 또. 

 앞으로 내가 잘해야지.

 뭐가 또.

 형의 시선에 내가 있도록.

 아 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형의 인생에 나만한 포인트 가드가 없도록 내가 더 잘할 거야.

 쓸데없이 낭만적이던 태섭에게서든.

 대만은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무표정이었다. 대만은 태섭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시선에, 태섭은 농구공을 몇 번 튕긴 뒤, 대만에게 던졌다. 대만은 그 공을 받았다. 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 만에 태섭에게서 패스를 받은 거지. 대만은 차마, 태섭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일 것 같았다. 너에게 패스를 하고, 너에게 맞추어 몸을 움직이고, 네가 어떻게 할 건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어떻게 슛을 날릴지 결정하게 되는 이 모든 과정들이 다시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돌아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걸, 대만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원온원.”

“…….”

“괜찮죠?”



 내게 공을 달라는 너의 사인을 무시할 수가 없다.



“오랜만에 농구하는 거니까 살살해줘라.”

“제대로 해달라고요? 알았어요.”

“아니라고, 그거.”

“와, 대박. 감독님 이거 녹화해도 돼요?”

“하지 마라.”

“저희에게 백퍼 도움 되는데도요?”

“제대로 하는 거 아니라고.”

“아닐걸?”

“뭐?”

“선배 눈, 농구할 때의 눈이에요.”



 몸에 새긴 기억은 태섭을 기억한다.



“다들 잘 봐요. 지금 너희들의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를.”

“대박. 진짜 제대로 하시는 거예요?”

“입 쩍 벌어지게 멋진 사람이니까, 보고 많이 배우라고. 알겠어요?”

“네!!!!”



 그 기억은, 우리를 시작으로 되돌린다.

 좋아해요.

 그 어떤, 시작으로.




 태섭이 연습을 봐주기 시작한 이후로, 선수들의 집중력이 올라갔다. 언제 또 NBA에서 활약 중인 사람에게 코치를 받아보겠느냐며, 태섭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실력을 끌어 올리겠다고 다들 열심히였다. 대만은 벤치에서 유 코치와 태섭이 함께 움직이는 선수들의 기량을 분석했고, 그 분석에 따라 연습량과 내용을 조절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직접 나서서 같이 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 어느 때보다 선수들과 코치들의 호흡이 좋은 게 느껴졌다. 확실하게 느껴져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마음이, 편했다. 농구를 하는 태섭을 본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한때 한 팀에서 같이 농구를 했다는 것. 태섭이 어떤 농구를 하는지 아는 것. 태섭이 어떻게 팀원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지를 알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묵묵히 제 농구를 하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직접적으로 터치를 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태섭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한 것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언젠가 말한 대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곤란했으니까.

 어떤 것 때문인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는 너와 나밖에 모르는데도.

 팀의 포인트 가드인 녀석에게 좀 더 신경을 써줄 것을 부탁했을 때 태섭은 대답 대신 웃었다. 대만은 그 웃음을 모르는 척했다. 직접 하는 부탁이 태섭이 오고 나서 처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맡겨 줘요. 손목 아대를 만지며 선수들과 같이 땀을 흘리고, 공을 가지고 움직이는 태섭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오래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을 느꼈다. 대만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팔에 입을 묻고 기침을 한 뒤, 물을 마셨다. 그러자마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태섭은 무표정한 얼굴로 제 얼굴을 보고 있었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태섭이 이내 살짝 웃었다. 

 씨발. 

 속으로 욕을 뱉으며 뒤돌아섰다. 대만은 눈을 감았다. 감독님, 이것 좀 봐주세요!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허공을 보면서, 몇 번이고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다는 사인. 그 사인을 알아차린 너.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던, 아주 오래 전의 우리,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맞추지 않고 있던 뒤섞여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시선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대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꼿꼿해지면 도리어, 꺾이기 쉬워진다는 것을.






 모임 장소로 가는 동안, 태섭과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만의 차는 아직 고쳐지지 않았고, 회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리스차 중 하나를 타게 된 태섭도 차를 가져오지 않아서 함께 택시를 탔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창밖만 보았다. 스치듯 지나가는 야경은 평소와 똑같은데,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르게 보였다. 대만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 한숨에, 태섭은 대만을 쳐다보았다. 대만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태섭은 대만과 똑같이 머리를 기대고, 대만을 쳐다보았다. 간간히 대만의 얼굴이 창에 비쳐 보였다.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은, 고요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태섭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창에 대만의 얼굴이 비쳐 보일 때마다, 그 그림자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림자에도 온도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차마 거두지 못하는 손이 허공에서 맴돌았다.



“야 송태섭 이 미친 자식!”

“준호 선배, 선배 와 잠깐만!”



 준호가 예약한 식당 안에 있는 룸으로 들어오자마자 준호에게 목이 잡힌 태섭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준호의 옷깃을 붙잡았다. 준호의 옆에 있던 치수는 태섭의 머리를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는 대만과 악수를 했다. 대만은 준호와 눈인사를 하고,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대만의 맞은편에 앉은 치수는 대만을 살피며 물을 내밀었다. 수고했다. 치수의 인사에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 인사가 끝나고,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태섭과 대만의 얼굴을 알아본 직원이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직원의 손에 있는 술과 기본 안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우리가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정대만, 너 늘 가지고 다니는 레포트지 있지? 그거 꺼내서 사인해 드려. 태섭이도 같이.”



 대만은 준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너 진짜 사회생활 잘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부장 감투 단 거 아니야.” 



 대만의 옆에 앉은 준호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대만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태섭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레포트지 한 장을 찢어 태섭에게 내밀었다. 손이 닿지 않도록, 종이의 끝을 잡고 내밀었다. 태섭은 닿지 못한 대만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 손이 펜을 잡았다. 곧, 입으로 펜 뚜껑을 문 채로 사인을 했다. 그 입술을 보았다. 대만이 물고 있는 펜 뚜껑을 보았다. 살짝 벌려진 입술이….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송태섭… NBA 선수 맞으세요?”

“네. 맞습니다.”

“첫사랑은 만나셨어요?”



 사인을 받아 들며 직원이 물었다. 태섭은 대만을 쳐다보았다. 네. 만났어요.



“와, 정말요?! 이거 말해도 돼요?!”

“네. 말씀하셔도 돼요.”

“대박! 인터넷에 올려도 돼요?!”

“네. 기사로 올라온 이야기니까 괜찮습니다.” 



 대만은 조용히 소주병을 땄다. 너 벌써 시작하게? 치수의 말에 대만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일단은. 대만의 말에 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은 애초부터 취할 생각이 없었다. 혹시라도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웠다. 그 사고가, 맞은편에 있는 태섭에게 향한다면 정말로 곤란했다. 대만은 쌓여가는 술병을 쳐다보았다. 술병이 쌓여가는 만큼 혀가 꼬이기 시작했고,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피곤한 눈을 매만지며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리고, 넥타이를 조금 더 풀었다. 점잖게 술을 마시던 치수와 준호도 취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태섭은…. 얼굴이 조금 빨갰다. 어느 순간부터 웃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태섭이 신경 쓰였다. 모르는 척을 하고 싶어도 신경이 쓰여서, 대만은 팔짱을 낀 손을 겨드랑이 아래로 감추기에 바빴다. 아니라면, 술을 못 마시게 병이든 잔이든 빼앗을 것 같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그렇게, 너를 신경 쓰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 싫었다.



“태섭이 너, 광고 봤어?”

“무슨 광고요?”

“Z역 안에 있는 전광판 광고.”

“아…. SNS에서 팬들 인증샷 봤어요.”

“우리 송태섭이…. 대형 전광판에 생일 광고도 걸리고…. 많이 컸다 이 자식.”



 태섭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 그래도 한국에 있는 동안 인증샷 찍어서 올려주면 안 되냐는 팬들 디엠이 많이 온다고 말했다. 준호가 웃으면서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찍어줄 사람 필요하면 말해. 아, 대만이가 찍어주면 되겠네. 너도 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는 알 거 아니야.”



  권준호, 이 새끼가. 단번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대만을 태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대만은 태섭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태섭은 대만의 목울대를 보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손이 조금 떨렸다. 언제 봤어요? 물어보고 싶었다. 팬들이 그랬는데, 출국하기 하루 전에 걸렸다고 그랬어요. 내가 오기 전에 봤어요? 아니면, 내가 오고 난 뒤에? 대만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삼키며, 태섭은 다시 술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계속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 태섭을 보며 준호는 태섭의 손에 든 소주병을 뺏었다.



“혼자 자작하면 연애 못한다.”



 준호의 말에 대만을 빼고 모두 픽 하고 웃었다. 비웃냐? 비웃어? 준호의 말을 무시한 채 치수와 태섭은 잔을 부딪혔다. 다 마신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던 치수가 말했다. 그깟 연애 좀 못하면 어떠냐. 정작 이 녀석이 연애하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을 텐데.



“말 잘 나왔다. 야, 송태서비…. 너 첫사랑 누구냐 진짜.”



 결국 준호의 입에서 첫사랑 이야기가 나왔을 때, 대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섭은 그 한숨 소리를 들으며 테이블에 팔을 올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대만을 쳐다보았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나른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꽂혔다. 대만은 술 대신 물을 마셨다. 저를 쳐다보는 치수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너 진짜 신기하다….”

“뭐가요?”

“영상에서만 첫사랑 이야기를 하지, 다른 데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잖아…. 신문사나, 잡지나 뭐… 그런 거…?”



 준호의 말에 태섭은 웃었다. 싫어할 게 뻔하니까요. 태섭의 말에 준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보였다. 대만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몸 때문에 시야에서 태섭이 조금 더 멀어졌다. 이 거리감이 안정감을 주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 대만을 보며 태섭은 소주를 마셨다. 쓰고, 독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타오를 듯이 뜨거웠다. 태섭은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싫어하는데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한 거야? 왜…?”

“잊혀지는 게 싫었어요.”



 싫어할 거라는 걸 알면서.

 미움 받을 각오를 하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잊혀지는 게 싫어서.

 태섭의 말에 준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최악으로 헤어진 건 아닌 거지? 그래서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자꾸 이러면 내가 너한테 뭐가 돼

 글쎄. 그건 최악일까, 아닐까. 나에겐 최악이었지만, 형한테는 최선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최악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첫사랑이 누구냐고오. 너랑 제일 잘 붙어있던 정대만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



 사랑을 하면, 항상 옆에 있으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는데.



“누군데 늘 네 입에서 튀어나오냐고오. 네가 몇 년 동안 그렇게 이야기하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대단한 첫사랑이 누군데.”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의 다정함에 취해서 모르고 있었어요.



“있어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 사람.”

“…….”

“누구보다 사랑에 진심이었던 사람.”



 너 자꾸… 그래서 정말 안 가? 나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 태울 것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바보처럼.



“그래서 포기 못하는 사람.”




 술에 잔뜩 취한 준호를 먼저 보냈다. 저 자식이랑 술을 마시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중얼거리는 치수의 등을 두드리며, 얼른 집으로 가보라고 말했다. 치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섭과 대만을 쳐다보았다.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는 태섭을 보며 대만에게 정말 괜찮겠냐는 말을 했다. 대만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한국에 있는 동안은 내가 책임자야. 그 말에 치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만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치수와 헤어졌다. 대만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제 얼굴을 쳐다보는 태섭을 보았다. 태섭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긴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만지는 대만을 보았다. 피곤한지 눈을 비비는 대만이, 도로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대만이, 제 앞에 있는데도 흐리게 보였다. 망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태섭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저답지 않았다. 태섭은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X 호텔에서 지내고 있는 거 맞지? 거기로 목적지 찍어놨어. 저 택시 타고 가면 돼.”

“…….”

“정신 차려.”

“…….”

“그래야 돼.”



 비상등이 켜진 택시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대만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얼른 타. 중얼거리는 대만을, 태섭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만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새빨간 태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정도면, 어디에 있든 머리를 대면 바로 잠들 것 같았다. 대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였다. 안 타냐고 묻는 택시기사에게 대만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잠들 것 같으니까, 도착하면 좀 깨워주세요.

 그 말에, 태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빗장을 채워 놓은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이런 식으로 굴 거면. 나한테 직접 다정한 척을 해주지. 다른 사람에게 그러지 말고. 형의 시선, 손길, 뭐든 나에게로 향하기를 바라는 나를 알면서. 왜 자꾸 나를 모르는 척해.



“얼른 타.”

“…….”

“타라고.”

“…….”

“…송태섭.”

“……!”

“내 말 좀 들어.”



 태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에 온 뒤로, 처음으로 대만이 불러주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 같았다. 대만은 제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안 타시면 그냥 출발합니다! 택시 기사의 말에, 대만은 손을 뻗어 태섭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손이, 뜨거웠다. 제 어깨를 붙잡고 택시 안으로 밀어 넣는 손을 붙잡고 싶었다. 이 손을, 끌어 당기고 싶었다. 끌어 당겨, 제 옆에 앉히고, 이대로 쭉,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정해놓은 목적지를 지우고. 그곳에서, 대만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면 안 돼요?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안 돼요? 



“형.”

“…….”

“나 혼자 보내지 마요.”

“…….”

“응? 형.”




 태섭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출발하는 택시를 보며 대만은, 긴 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태섭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만은 눈을 감았다. 멀어지는 태섭을 보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다. 태섭을 태운 택시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대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으면, 태섭이 사라짐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혼자 보내지 말라는 태섭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 말에 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긴 숨을 뱉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라고 되뇌며, 주변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샀다. 편의점에서 나온 뒤, 소주 뚜껑을 열였다. 바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든 말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든 말든 절반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다시 나머지를 마셨다. 빈 소주병을 버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숨에서 소주 냄새가 났다. 숨을 고르고 서있자니, 머리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가방끈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머릿속 세상이 핑핑 돌았다. 태섭이 두 사람으로, 세 사람으로 보였다. 쪼개진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인터하이 때의 송태섭. 주장일 때의 송태섭.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송태섭. 첫 키스를 할 때의 송태섭. 사랑, 한다고 말할 때의 송태섭. 그리고,



“…태섭아.”



 대만은 지하철 역 안, 태섭의 전광판 앞에 섰다. 전광판 속 태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손을 뻗어 전광판 속 태섭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그렇게 기대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깜빡이며 신발 끝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숨죽이고 있던 말들이 혀 끝에서 느껴졌다. 태섭과 함께 있으면 숨기기 바빴던 말들이었다.



“첫사랑이라는 거. 엄청 무겁다.”


“한 번 마음먹으면 묵묵히 한 길만 가는 너여서 그런가.”


“사랑도 그런 스타일로 하는 줄은 몰랐네.”


“만족하냐고 물었지.”


“어. 네가 승리를 말할 때마다,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있잖아. 옳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을 비웠어.”


“비우고. 또 비어서.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채워 넣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너를… 욕심 낼 것 같았거든.”


“이쯤 했으면 됐으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까.”


“송태섭 너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테니까.”


“태섭아,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다 제 첫사랑 때문입니다. 

 너는 모를 거야. 네가 한 말이,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했다는 걸. 

 잡히지 않는 태섭의 손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전광판을 밝히는 형광등으로 뜨거웠다. 그게 마치, 태섭의 온도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섭을 쳐다보았다.

 대만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태섭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마음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입술을 깨물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잖아.”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서둘러 귀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찰나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쪼개진 기억들 속, 어느 날.

 윈터컵, 자신 있죠?

 자신 있어. 나 혼자 농구하는 거 아니잖아.

 나를 믿는다고 생각해도 돼요?

 당연한 거 아니야?


 널 믿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