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알람 소리를 들은 대만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늘 하던 대로 마른세수를 했다. 퍼석퍼석한 볼을 문지르며 고개를 젖혔다가 억소리를 뱉었다. 목과 어깨가 유난히 뻐근했다. 침대에서 나와 스트레칭을 했다.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는 덤이었다. 팔을 쭉 뻗으며 이렇게 된 원인을 생각했다. 합리적인 의심이 되는 상황이 있었다. 어제. 버스 안. 내리기 전까지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송태섭.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도록 하기 위해서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느라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몸.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다. 하도 안 움직여서 쥐가 났다. 심각했다. 피가 안 통해서 온 몸이 전기 통한 것처럼 찌르르 울리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 안내음 사이에 있는 태섭의 숨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는데, 창에 비친 태섭의 실루엣이 보였다. 동그랗게 접혀 있는 넓은 등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게 뭐라고.
일어났어?
노크를 하고 들어온 모친이 물었다.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럴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게 뭐라고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다른 곳을 보면서 말했다.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한 모친은 아침 준비 되었으니 얼른 씻고 나오라는 말을 건넨 뒤 문을 닫았다. 어제도 들었던 말이었다. 대만은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핸드폰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커튼을 걷었다. 이것 역시, 늘 하던 것이다. 스트레칭을 빼고는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았다. 일상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큰 변화가 있지 않은 이상, 다를 수가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
없다. 저번주 토요일 이후로 문안 인사를 하듯이 보내던 문자가. 휑한 핸드폰 화면을 보는 내내 대만은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22.
좋은 아침 입…… 주임님, 괜찮으세요?
네…. 좋은 아침 입니다.
대만은 자리에 앉기 전, 제 얼굴을 보며 웅성거리는 직원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내일 피피티 발표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신 거예요? A가 물었다. 내일 발표 자리에 오시는 이사님이 그래도 주임님 좋게 보시는 분 아니세요? C가 물었다. 뭐 도와 드릴 거 있어요? E가 물었다. 저도 오늘 야근 하겠습니다. 제가 주임님 보조해 드리기로 했잖아요. B가 말했다. 분명히 따로따로 말하는 건데 한데 섞인 것처럼 들렸다. 감사합니다. 감삼니다. 감솹니다. 감솨합니다.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주임님 어떡해… 긴장하셨나 봐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A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자리에 털썩 앉았다. 패딩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렸다. 그걸 한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눈이 아플 때까지 계속.
송태섭이 변했다. 또.
저번에야 제가 한 말로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대만은 팔짱을 꼈다. 뭐 때문에 변한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변했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 낯간지러웠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출근을 하면 출근 한다고, 헬스장에 도착 했으면 도착 했다고, 일 시작 했으면 시작 했다고, 등등. 짬이 나는 대로 하는 것 같았던 문자가 다 끊겼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다리가 달달 떨렸다. 그 다리를 잡아 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핸드폰 액정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제발 이제 깜빡여주면 안 되겠냐고 눈동자가 시린 증상을 호소해도 개의치 않고. 까만 화면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까지.
그런 대만을 보던 꺄르르 군단과 B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내일 칼퇴 할 수 있겠죠? 식당 예약 할까요. 며칠 전에 주임님이 궁금하다고 하셨던 곳으로요. 숙취 해소제 미리 준비해 놓겠어요. 안 간다고 하셔도 끌고 가자구요. 좋습니다, 힘 좀 써볼게요.
진짜 뭐하자는 거지…?
네?!
……?
아뇨아뇨, 아니에요! 곧 9시네요 오늘도 화이팅!
힘을 내세요, 주임님!
막상 하면 잘 하시니까요! 너무 잘 하셔서 문제니까요!
응원하겠습니다!
한 사람씩 말한 뒤 자리에 앉는 팀원을 보는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왜 이러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들보다 연락이 없는 태섭이 더 궁금했다. 늘 하던 대로 컴퓨터를 켜고, 수첩을 펼치고, 손에 익은 펜을 꺼내면서도 시선은 계속 핸드폰이었다. 펜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는 기도를 해야 했다. 오늘 하루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제발 일 적기를. 제발 나 좀 그만 찾기를. 그런데 이 기도가 안 나왔다. 대신 시계를 봤다. 벌써 9시였다. 태섭의 헬스장 일이 끝나는 시간. 문자가 두어개 쯤은 와 있을 시간.
…….
긴 숨이 쏟아졌다. 태섭에게서 끝내 연락이 없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23.
연락이 없는 건 점심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쯤되니 대만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 네가 아니라 난데 왜 네가 이러는 건데. 따지고 보면 그랬다. 어제 진상을 부린 건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다. 진상이 따로 있나. 어이가 없으면 진상인 거지.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오전에 일이 바빠서 하지 못하면, 그나마 여유가 생기는 점심 시간 전에는 반드시 연락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태섭이 연락이 없는 거에 꽂혀 있다. 이것 역시 깨닫지 못했으나, 깨달았어도 알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송태섭이었다. 상황이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냐는 질문에 안 취했다고 했던 동문서답을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나랑 마실 때는 한 번도 취한 적 없던 주제에, 나보다 동기들이 더 편해서 그렇게 마신 건지, 그런 거라면 내가 안 편하다는 이야기인 건지가 궁금해졌다.
…동기들이랑은 연락 했겠지?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괜찮냐. 뭐 이런 이야기, 하겠지?
이렇게 되니, 그냥 넘겼던 일도 죄다 서운해졌다. 별에 별 게 다 생각나고 그랬다.
덕분에 점심 시간 내내 꺄르르 군단과 B는 대만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대만은 오전 내내 업무에 관한 일이 아니면 입 한 번 벙긋하지 않고 일만 했다. 가끔 어딘가를 보면서 한숨을 뱉고, 머리카락을 헤집기도 했다.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지 않는데, 이상하게 티가 났다. 무슨 일 있냐는 질문에 고개를 젓더니 끄덕이는 마음과 비슷한 건가 싶었다.
주임님 주임님, 점심 드시구 태서비 카페 가실 거죠. 당 충전 하러 가셔야죠. 그쵸오.
그래서 한 말이었다. 오후에 P카페에 자리를 잡은 뒤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할 때면,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얼굴을 했으니까. 친동생이 있어도 그렇게 지내지 못할 것 같은 태섭도 있으니까. 그런데 저 말이 끝나자마자 대만이 눈을 치켜 떴다. 물어본 C는 깜짝 놀라서 숟가락을 꾹 잡았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았다. 나머지 사람들의 숟가락질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대만은 그걸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P카페가 태서비 카페가 된 건지. 아니 그것 보다, 태서비. 저 이름이 심히 거슬렸다. 태서비 카페. 태서비. 서비. 그 이름만 상투스처럼 울려퍼졌다.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내팽겨치고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을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야 송태섭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
아니요.
왜요? 오늘은 오후 커피 안 드실 거예요?
네.
…네에.
아니면 저희가 사다 드릴까요?
아니요.
…네에.
다른 카페에 가서 사 올까요? 주임님 태서비 카페 말고 다른 카페도 좋,
아 니 요. 괜찮습니다.
E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C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래도 연애 문제가 틀림 없는 것 같아요. A가 조용히 속삭였다. 갑자기 밥을 우걱우걱 씹기 시작하는 대만을 보면서 E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님 일 스타일은 우리가 잘 알잖아요.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구실 분이 아니란 말이죠. A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썸 타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 기분이 롤러코스터가 될 수 없어요. C는 코를 한 번 훌쩍였다. 그게 맞았으면 좋겠다가도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꺄르르 군단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 대만은, 당신이 있어서 그래도 회사에 다닐 맛이 나는, 나름 아이돌같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에게 애인이라니. 해도 비밀연애를 해달란 말이에요.
이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던 B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숨겨진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한 B의 기세에 숨죽이고 있던 그들은 B의 한마디에 더 이상 밥을 먹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태섭이도 알까요? 한 번 물어볼까요? 두 분 사이에는 비밀이 없는 거 아닐까요?
24.
수고 많았어요 태섭 씨.
사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오늘따라 더 많이 찾아오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벗는 태섭의 어깨를 토닥여준 사장은 곧바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태섭은 웃음을 참으며 물을 마셨다. 물도 한 잔 제대로 못마실 만큼 바빴다. 그래서 대만의 생각을 덜 할 수 있었다. 일부러 무음으로 해두고 후드티 주머니 안에 넣어둔 핸드폰을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보며 물을 마저 마셨다. 다 마셨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연락 한 통 없다. 정대만에게서.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뭐지. 아침에 일어나면서 아니, 잠 못 든 새벽 내내 생각했다. 감정이라는 게 마음의 씨앗이 아닐 텐데, 미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정말 그럴 것 같았다. 그런 만큼 더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것도. 그래도 괜찮다고 했지만, 안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쥐났어, 천천히 가자. 버스에서 내린 뒤 뒤뚱거리는 대만을 보자마자 가슴 한 구석에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져서 그랬다. 어떻게 앉아 있었으면 그럴 수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나 때문에 잘 잔 놈이 말이 많다며 툴툴거리기나 했다. 이 말을 할 때의 대만은 분명히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뭘 생각하는 건지 웃기나 했다. 이걸로 고등학교 진학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며 가져온 시험지를 내밀면서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던 16살의 대만과 비슷하게 보였다. 귀여워. 생각을 모르는 척하며 삐딱하게 걷는 대만의 팔을 잡아주려고 손을 뻗자마자, 2인 좌석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다음에 술 마신 사람이랑 2인 좌석에 앉으면 내가 먼저 편한 자세로 앉아있어야 겠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툭 떨어진 것이 바닥을 뒹굴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고 동시에, 괴로워졌다. 그래서 대만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이런 마음으로 대만에게 연락을 해봤자, 이 단어, 저 단어, 왜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보내는 지, 왜 바로 보내지 않는 건지, 이전에 나는 어떤 마음으로 형에게 연락을 했는지. 별에 별 생각을 다 할 것 같았다.
생각이라는 게, 마음이라는 게, 많고 클 수록 힘들기만 한 것 같아. 그러면, 형.
좋아하는 만큼 미워질 수 있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안 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태섭 씨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요.
태섭은 옅게 웃으며, 사장이 마실 물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사장은 아무말도 없이 물을 마셨지만, 태섭을 보고 있었다. 볼이 동그랗게 올라온 걸로 봤을 때는 웃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웃음에는 고맙다는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대만의 말이나 마음도, 이렇게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섭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럼 다행이구요. 꼭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내 생각이 과했으면 다행이죠. 말을 덧붙인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곧 대만 씨 오겠네요. 사장을 살피던 태섭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저 이름에 속수무책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와 동시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태연한 척? 아무 일도 없던 척? 이런 건 태섭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대만에게는 잘 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고백을 괜히 했다는 빌어먹을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사장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리려고 그러는 거예요? 태섭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정신 놓으려구요. 누구를 좋아하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요.
태서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태섭은 헛기침을 하며 카운터로 나왔다. 우리 왔어. 밝게 인사하는 꺄르르 군단 with B 가 보였다. 어제보다 더 환하게 인사를 하는 그들을 보는 내내, 태섭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형은요?
어어. 내일 중요한 발표가 있잖아. 그거 준비 하신다구. 응응.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태섭은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요며칠 같이 저녁을 먹지 못했고, 같이 집으로 가지 못했다. 당연하다. 당연한 건데. 하필 이런 때에도 그래야 하는 걸까? 내가 연락을 하든 말든, 형한테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야? 나만,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고 초조해?
이렇게 되니 태섭은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누굴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나를 놓으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 보니 여태 나를 너무 놓은 것 같다고. 벨도 없이 들이댄 것 같았다. 정대만은 정대만, 송태섭은 송태섭. 이게 맞는 거다. 이게, 정상인 거다.
그들의 주문을 열성적으로 받고, 질문에도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러자 쭈뼛하고 어색한 태도를 유지했던 그들이 편안해지는 게 보였다. 대만이 있을 때처럼 분위기가 화기애애 했는데, 정작 대만은 없어서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가 곧 지웠다. 아주 재빠르게. 마음에 남을 수 없도록. 대만의 스탬프 카드가 있는 곳에 눈이 가도, 저도 모르게 문을 힐끔 거려도, 대만이 떠오르기 전에 다른 것에 집중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주임님 아침부터 완전 저기압이었어.
응응. 출근 하시자마자 얼굴 보는데, 나 주임님 그렇게 가라앉은 거 처음 봤잖아.
어제 까지는 반짝반짝 하셨는데.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호옥시… 주임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태서바…?
태섭은 무언가를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제 얼굴을 쳐다보는 그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주머니 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대만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지만, 무음 모드를 해제하고 진동 모드로 바꾸었다.
어제도 만났거든요. 별 일, 없었어요.
태섭은 제 뻔뻔함에 조금 놀랐으나, 제 마음에만 별 일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맞는 말을 한 거라며 스스로를 합리화 했다.
일 하기 전부터 그랬어요?
응응. 계속 시계만 보시구. 한숨도 쉬시구.
꼭 다른 일 있는 사람처럼 말이지….
맞아…. 꼭… 뭘,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야…….
태섭은 재빨리 손을 들어 입과 턱을 가렸다. 다른 곳을 쳐다보며 턱을 문질렀다. 질문이 점점 구체적인 무엇으로 변해간다. 아주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제 앞으로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태섭은 보았다.
그럼, 제가 물어볼까요?
태섭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기는 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건 너만 할 수 있다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이런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저 말을 꺼내자마자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눈이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입을 가린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관 전부를 가리고 있는 손 안에 감추어진 입술이 난리가 났다. 말아 물었다가 풀었다가, 달싹였다가 말았다가 했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팀워크를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 같다는 말에는 결국 헛기침을 뱉었다. 이런 대의명분을 주다니. 땡큐였다. 그랬으면 다행인데, 사실은 연락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 확인한 것 같아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정말, 인정사정없이 얻어 맞는 것 같다. 대만을 생각하자마자, 다짐이 무색하게 정신을 못차리게 된다. 나를 놓아버리고 들이대고 싶다. 있는 벨 없는 벨 다 눌러가며 들어가고 싶다, 정말.
그들의 무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태섭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긴장하는 건, 입대 후 처음으로 전화를 했을 때와 비슷했다. 수화기를 잡고 있는 손에 땀이 나고, 너무 긴장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제자리를 뛰었고, 또……,
-…어.
……뭐해요?
울 것 같아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었다.
-그런 게 이제 궁금하냐?
…그러는 형은요.
-내가 뭐.
……형 진짜 짜증나요.
-내가 더 짜증나.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좀.
아무래도, 대만의 말이 맞을 거다. 입대 후에 처음으로 대만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탈영하고 싶었을 거다, 분명히. 듣는 것만으로도 당장 달려가고 싶어지는데.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닐 리가 없었다. 꿋꿋하게 잘 참아냈구나, 송태섭. 이런 거에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정말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알았다. 결국에는 좋아했을 거라는 걸.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25.
대만은 기지개를 크게 켰다. 벽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한 번 더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는 B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가지고 있는 마이쮸를 내밀었다.
주임님 이런 거 드시는 거 못 봤는데요.
아라가, 아, 태섭이 동생이요. 아라가 줬어요. 고3인데, 이런 거 먹으면서 공부한대요.
호오. 재미있다는 듯, 없다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지은 B가 껍질을 까서 입 안에 넣었다. 우물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잠이 좀 깨는 것 같네요. B의 말에 결국 껍질을 깠다. 한 입 깨물자마자 시큼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정리하고 갈까요?
그러시죠.
그러게 먼저 가셔도 된다니까.
어떻게 그럽니까. 제 전직 사수님 어깨가 축 쳐져 있는 게 보이는데.
B의 말에 뜨끔한 대만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어깨가 축 쳐져 있는 게 다른 이유였다는 걸 알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힐 것 같았다.
서류와 노트북을 정리하는 B를 보면서 입 안에 있는 마이쮸를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씹었다. 가자고는 말했지만 그럴 생각이 없었던 터라 이런 거나 하게 되었다. 씹으면 씹을 수록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여서, 목울대가 계속 움직였다. 침을 삼키면서 어지러운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찰나, 핸드폰이 번쩍였다. 문자가 도착했다. 태섭이었다.
[아직 회사예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내일을 생각해야죠 컨디션 조절 해야 돼요]
[수능도 전날에는 푹 쉰다고요]
[출발하면 연락 줘요]
[오늘…… 얼굴 못 봤어요]
웃음이 나왔다. 수능도 전날에는 푹 쉰다니. 늘 푹 쉬었던 주제에. 이렇게 문자를 하는 걸 보니, 이야기는 나누어보지 않았지만,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재미있는 연락이라도 받으셨어요?
대만은 괜히 뜨끔했다. 아니요. 어깨를 으쓱이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B는 가방을 다 정리하고 의자를 밀어넣고 있었다.
저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하.
커피 좀 사다 드릴까요? 오후에 안 드셨잖아요.
또 뜨끔했다. 대만은 일부러 손사례를 쳤다. 지금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자서 내일 컨디션 안 좋을 것 같다며 거절했다. B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사실은 다른 카페에서 마셨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혼자 일을 하다가 뭐에 홀린듯이 일어나서 회사 밖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서 집중이 잘 되는데, 이상하게 시계를 더 자주 보게 돼서 그랬다. 처음에는 10분이었다가 나중에는 7분, 5분, 3분. 시계를 보는 텀이 줄어들 때마다 깨닫는 건, 시간이 진짜 안 간다는 거였다. 이 느낌이 어떤 순간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태섭이 입대를 했을 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고, 느리네 빠르네, 태섭이 표현했던 시간 같은 것.
마시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또 시간이 안 갔다. 커피는 줄어드는데,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테이크 아웃 잔으로 변경해서 회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P카페가 있었다. 그건 알았다. 지나치면 되었다. 손에 이미 커피가 있었는데. 그런데, 들렸다. 여기에 관해서는 할 말이 있었다. 원래는 안 가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저절로 갔다.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발은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도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는 발걸음이 조금 느려지기는 했다. 이게 무엇인지를 몰랐다. 양심인 건지, 복잡함인 건지, 복잡하다면 무엇이 그런 건지. 분명한 건, 태섭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는 거였다. 그랬는데, 태섭이 꺄르르 군단과 함께 웃고 있었다. 뭘 보는지 핸드폰 하나에 바싹 붙어 있기까지 했다. 여기에 어이가 털렸다. 나는 싱숭생숭한데 너는 그렇지 않나 봐?
마음과는 별개로, 웃고 있는 태섭을 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떤 시간을 거치고, 그 시간 만큼 달라진 얼굴이 보였다. 이미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담긴 얼굴이었다. 그렇게 보다가 눈이 마주칠 뻔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종종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태섭을 보면서,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갖다대는 그 시간. 누구한테 전화를 하는 거냐는 생각이 무색하게 울리는 핸드폰. 송태섭. 그 이름 석자. 그 이름을, 한참동안 쳐다보게 되는 것. 괜히 성질이 나고, 웃어준 게 화가 나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했던 것. 가만히 있으랬더니 진짜 그러고 있다가 전화를 끊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얼굴.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 번도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던 그 순간.
B가 가고난 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창 밖을 보는 대만의 손에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아직 10시 10분.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시간을 물끄러미 보다 태섭이 보낸 문자를 보았다. 문자를 받은지 아직 10분 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이 모두에게 똑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상대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걸 태섭으로부터 확인 하는 건,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 처음으로 확인한 건, 두말 할 것도 없이 태섭이 군대에 갔을 때였다. 그때, 시간이 느리게 가던 걸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서 그 시간을 살아야 한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벌처럼 느껴질 것 같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드문드문 이어진 실고리 같아서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캘린더에 집착했던 건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 건지 모를 것들을 적어야 했다. 적어서, 확인해야만 했다.
왜 연락 안 해요?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것.
출발하면 연락하라고 그랬잖아요.
왜 나와 있어? 추운데.
내가 먼저 물었어요.
목도리를 돌돌 감고 있는 태섭의 얼굴에는 눈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만은 긴 숨을 뱉었다.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날이 너무 추워서 뽀얀 입김으로 표시가 났다. 태섭의 눈썹이 단 번에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와 있어서 싫어요?
그렇다고 대답 안 했거든.
근데 왜 연락 안 했어요.
이 집요한 새끼. 조용히 중얼거린 대만은 태섭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었다. 아, 진짜. 머리 헝클어진다고요.
어차피 밤인데 뭘 신경 써? 헝클어질 게 있긴 하냐?
…또 모르는 척하죠.
귀도리는 왜 안 하고 나왔냐?
진짜. 대답 안 하고 딴 소리만 하죠.
저 대답에 웃음만 나왔다. 웃음이 마음에 안 드는지 보는 시선이 장난 아니었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이 말 한마디 했다고 눈썹이 또 올라갔다. 정말, 눈썹에도 자아가 있는 놈이었다.
이제 화 풀렸냐?
…화 안 났거든요.
연락 싹 끊으니까 좋든?
태섭의 시선이 단 번에 돌아갔다. 이리 봤다가 저리 봤다가 헤매이는 태섭의 눈동자를 보면서, 대만은 패딩 주머니 안에 있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주머니 안에 있는데도 손가락 끝이 차가운 게 느껴졌다.
나는 좀, 별로더라. 기분이 안 좋았어. 나쁘기도 했고.
태섭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서,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코까지 올라가 있는 목도리를 슬쩍 내렸다.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그 입술을 쳐다보다, 눈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면서, 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목도리 안에 있었다고 조금 따뜻한 게 느껴졌다. 아니면, 제 손이 너무 차가운 건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내 앞에 네가 있다. 1초 전인 과거에도, 1초가 흐른 지금에도, 1초가 더 흐른 미래에도.
태섭아.
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 꺼지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거, 네 마음을 우습게 본 거 아니야.
…….
너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형, 끼어들어도 돼요?
아니.
이건, 계속, 그래야만 해.
그래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어.
잘 정리해서 말해본다고 한 거, 지금을 말하는 거 아니야.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우리가 완전히 끊어진다면, 있잖아.
내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진짜예요?
쫄지 마, 인마.
태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만은 그 미간을 보다, 엄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보드라운 촉감이 손 끝에 만져졌다.
나. 잘 기다려요. 기다릴 수 있어요. 급하게 안 굴어요 절대. 건방지게 안 굴게요. 그러니까.
그 촉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살 하나 닿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마요.
…….
내가 꽉 붙잡고 있을게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 절대로 안 떨어질게요.
대만은 고개를 들었다. 까만 하늘을 쳐다보며, 긴 숨을 뱉었다. 뽀얀 입김이 하늘로 가는 것을 쳐다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왜 말을 안 하냐고 묻는 태섭에게, 입 안에 마이쮸가 있어서 계속 침이 넘어간다고 말했다. 진짜냐고 묻는 태섭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짜, 진짜냐고 물어서 진짜, 진짜라고 말했다. 그러자마자 태섭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 어딘가를 문지르는 듯한 머리를 보다가,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쫀 건 나인 것 같다. 쪽팔리게. 그래서 네가 조금 미워. 이 말을 목울대로 끊임없이 삼켰다. 이 말을 삼키느라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이 안 나왔다. 태섭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해야 할 말보다 숨겨야 할 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제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서 였다. 네. 형. 그래도 옆에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