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섭의 관찰이고 뭐고 그런 걸 하기에는 시즌이 중요했다. 2, 3일에 한 번씩 하는 시합에 컨디션 관리하기에도 빡센데 한가롭게 관찰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10분 쉬자는 말에 바로 널브러지는 동료들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대만은 포카리 스웨트를 마셨다. 어제 경기 했는데 오늘은 조금만 여유롭게 하자, 주장. 이 말을 한 귀로 듣고 넘겼다. 지랄한다는 말에 어제 이겼잖아! 하고 소리를 지르는 터에 성질이 났다. 이겼다고 계속 이기나? 잘 아는 놈들이 이러니까 더 성질이 났다. 너네 진짜 군기가 빠졌다. 송태섭 빼고.
태섭은 경기장 구석에서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쟤 스쿼트 하기 전에 분명히 푸쉬업 했는데. 온 몸의 근육을 조지자는 뜻 아니야, 저거. 대만은 농구공을 허공에 던졌다. 대자로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 녀석들을 보다 송태섭을 보고 있자니, 팀의 유일한 구원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에 고깃집에서도 그랬다.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준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한 사람치고 놈들이 물어볼 때 빼고는 별 소리 하지 않았다. 저들의 한심함에 한숨이 나왔다. 뭐도 없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 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정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저 뭐도 없는 대화의 주인공인 태섭은, 내가 당사자라면 기분 상할 것 같은 말을 해도 웃으면서 넘겼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미국에 있다가 와서 그런 건가. 조금, 아니 꽤 달라진 태섭 때문에 왁자지껄 웃고 있는 놈들 사이에서 대만은 유일하게 벙찐 사람이었다.
관찰은 도리어 그 날 했다. 송태섭은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상추와 당근만 먹길래 혀를 찼다. 막 경기를 끝냈는데 허기가 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 몸 관리에 진심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독해도 너무 독한 거였다. 적당히, 대충 같은 건 송태섭 사전에 없었다. 옛날부터 그랬다. 옛날과 달라진 건 조금 순해진 분위기였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어색해하지 않는 송태섭. 모자란 게 있으면 채워주는 송태섭. 조용히 있는 것 같으면서 주변을 살피는 송태섭. 그럴 때마다 간간히 마주치는 송태섭, 의 눈.
대만은 짧은 한숨을 쉬고 태섭에게 걸어갔다. 이 순간이 왜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혼자 운동을 하고 있던 태섭은 제가 오는 걸 보면서 오십둘, 오십셋, 오십넷, 숫자를 세었다. 대만은 헛기침을 하며 농구공을 바닥에 튕겼다.
“안 힘드냐.”
“죽을 것, 같아요, 육십 다섯.”
“좀 쉬어.”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아요, 육십 구.”
“그만해, 너 많이 했어. 대신 나 스트레칭 좀 도와줘.”
태섭이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리를 폈다. 와, 죽겠다.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는 태섭을 힐끔 보며 농구공을 두고 자리에 앉아 다리를 쭉 폈다.
“미국에 있을 때 우리 팀 닥터가 물리치료 넘버 원이었어요.”
“이것도 배운 거에 포함이냐.”
“네.”
태섭의 손이 날개뼈 근처를 꾹 눌렀다. 억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고개를 푹 숙였다. 엄지를 써서 꾹 누르던 손이, 바닥 전체로 누르면서 문지를 때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야, 적당히. 아니 스트레칭을 하라고, 안마를 해줄 게 아니라. 이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태섭의 손이 마치 등을 탐험하듯 움직인다. 대만은 고개를 홱 돌렸다. 꽤 진지하던 얼굴이 눈이 마주치자마자 점점 웃기 시작하는데, 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대만은 한탄했다. 아니, 얘만 보면 왜 자꾸 옛날 버릇이 나오는 것 같지. 정작 송태섭은 옛날 같지 않은 것 같은데.
“아파.”
“뭉쳐 있으니까 아프죠. 근육도 잘 풀어줘야 된다고. 모르는 거 아니잖아요.”
“…그래도 아파.”
“하여간 아픈 거 진짜 싫어해요.”
“너는 좋아하냐?”
“뭐냐에 따라서 다르죠.”
“그런 게 있을 수가 있냐…?”
태섭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대만은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척추를 타며 멈추지 않는 태섭의 손 때문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분간이 안 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드럽게 꾹꾹 누르는 손 때문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아프게 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까보다 압력을 빼고 눌러서 이거야 말로 안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태섭의 얼굴을 진짜, 읽을 수가 없어졌으므로. 그러다 태섭이 물은 알고 싶어요? 때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네가 뭐에 아픈 걸 좋아하는 지를? 이렇게 묻자마자 싹 굳는 태섭 때문에 머쓱해졌다. 미안. 변태 같았다.
“아무한테나 그런 거 묻지 마요.”
“내가 뭘. 그걸 이렇게 정색하면서 말할 정도냐?”
“나니까 정색만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손절해요, 진짜.”
“뭘 손절까지 하냐?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겠지.”
“하여간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요.”
“알았어. 거 되게 뭐라하네 민망하게. 지 취향이야 뭐야. 들켜서 성질내는 거냐고.”
태섭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침묵 때문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냐?”
“뭘 생각하는 건데.”
“아픈 거 즐겨…?”
“뭐라고 하는 거냐고요. 미쳤어요, 진짜?”
“야 태섭아. 우리 나이를 먹긴 먹었다. 취향 이야기도 하고.”
“그 취향 아니라고. 아, 진짜.”
대만은 몸을 돌렸다. 환장 하겠다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태섭은 화가 나보였다. 오랜만에 보네, 송태섭 빡친 거. 늘 여유롭게 웃으면서도 성질을 내야 할 때는 조용해서 성인군자라도 돼서 온 줄 알았더니. 송태섭은 빡이 쳤는데 웃음이 나오는 제 자신이 웃겼다. 이런 대화를 하고 있자니 좀 어색했던 태섭이 가까운 사람 같고 그랬다. 이 거리감이 예전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엄청 친했던 건 아니지만, 성질을 내고, 받아주고 하면서 따로 가듯, 아니듯 하던 어느 날의 송태섭.
마냥 베실베실 웃고 있는 얼굴이 기가 막힌 건지, 태섭이 긴 숨을 뱉었다. 그러면서 대만의 앞에 똑같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면서 대만을 본다. 그렇게 얼굴만 빤히 보고 있자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섭이 천천히 입술을 연다. 대만은 태섭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마음이 한없이 넓어졌거든. 그 한없이 넓어진 마음에, 선배도 취향이 있어요? 라는 돌이 던져졌다.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 돌이 일으킨 파장은 생각보다 미미했다.
“없는데.”
“없을 수가 있어요?”
“…많이 해봤어야 알지.”
“선배 연애 안 쉬었다면서.”
“사귈 때마다 안 했, 야 우리 왜 이런 이야기 하냐?”
“나이를 먹어서 취향 이야기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어… 그래…”
“그래서. 왜 많이 안 해봤는데요.”
“그냥…. 할 마음이 안 들었고, 또…”
그랬는데, 조금씩 파장이 커진다. 송태섭이 던지는 돌이 조금씩 커진다. 대만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진지한 표정 때문에 더 그렇다. 아니, 이런 걸 뭐 이렇게, 진지하게 들을 일이야?
“연애랑… 그건 뭐… 좀 다른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난 날이 가엽게 느껴진다.”
“뭐래?”
“이러니까 선배가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1위만 하는 거예요.”
“뭐 이 새끼야?”
“내가 왜 하룻밤 같이 있고 싶은 남자 순위에 뽑혔는지 모르겠다고 그랬죠.”
“…그랬지.”
태섭은 조금 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태섭이 조그맣게 한숨을 뱉었다. 이게 어른 앞에서. 바로 짜증난다는 표정이 날아왔다. 대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인데, 뭐. 태섭은 백 번 양보 한다는 얼굴로 눈을 감고 긴 숨을 뱉었다. 그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거 같잖아. 내가 참는다. 내가, 참아준다.
“생각해 봐요.”
“어.”
“선배가. 나를. 좋아해.”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그냥 생각해 보라고요. 다른 사람은 안 떠올라서 하는 말이니까.”
“…….”
“선배가 나를 좋아해. 나도 선배를 좋아해. 그래서 사귀었어. 좋으니까 데이트를 해. 같이 밥도 먹고, 좋은 데도 가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
“…….”
“같이 뭘 하니까 좋긴 한데, 재미있는 건 모르겠어. 그럼, 그 날 데이트는 그렇게 끝나. 여기까지가 선배인 거예요.”
미쳤냐, 진짜? 대만은 발끈했다. 야, 데이트도 재미있어서 하는 거거든?! 이 말에 태섭은 코웃음을 쳤다. 아주, 가소롭다는 듯이. 이 웃음에 뒷목이 당겼다. 나 무시 당한 거 맞지? 발끈해서 입을 열러던 찰나, 태섭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당겼다. 대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신발 끝과 끝이 닿았다. 제 얼굴을 보며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나른하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무릎을 만지는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그 무릎을 살살 매만졌다. 태섭은 여전히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미쳤나… 진짜….
“데이트를 할 때마다 좋아. 만날 때마다 좋아 죽겠어.”
“…….”
“헤어지는 게 점점 아쉬워져. 같이 밥 먹는 거, 좋은 데 가는 거, 맛있는 디저트 먹는 거. 다 좋아. 안 헤어지려면 뭘 더 해야 하지? 늘 하는 거 다 했는데. 그런데, 헤어지기 싫어.”
“…….”
“오늘도 그래. 그런데 시간은 계속 가.”
“…….”
“떨어지기 싫어.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
“…….”
“더 있고 싶어. 계속 있고 싶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
“이게, 나예요.”
“…….”
“알겠어요?”
멍하게 듣고 있던 대만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유로운 얼굴로 일어서서 손을 내밀고 있는 태섭 때문이었다. 대만은 그 손을 쳐다보다 빙-긋 웃고 있는 태섭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어. 거-의 뭐 저 분야의 원 앤 온리 인 것처럼 말하네.
“너 애인 안 사귀었다고 안 했냐?”
“그랬죠.”
“그런데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는데.”
“뭐…. 안 사귀어도 사람은 만났으니까요.”
손을 잡자마자 힘주어 끌어당기는 태섭이 또 빙-긋 웃었다. 대만은 정색을 하며 태섭을 쳐다보았다. 안 사귀어도 사람은 만났다는 말에 여러 뜻이 있다는 건, 지금까지 한 말로도 알겠다. 이거 진짜 카사노바 새끼 아니야? 그럼 그, 취향이라는 것도?
“태섭아. 나 그런 놈으로 너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다.”
“그런 놈이 뭔데요. 뭐 어떻게 보는 거야?”
“너 말하는 거보면 천하의 바람둥인데.”
“미쳤나, 진짜.”
태섭은 정색을 했다. 그러면서 제 손을 놓을 생각은 없는 태섭 때문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놔라고 했더니 싫댄다. 뭔가 좀, 억울해 보이는 얼굴이다. 싫긴 뭐가 싫어.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징그러울 정도로 어색했으면 바로 뺐을 텐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
“누구 덕분에 죽상 부렸더니 왜 그러냐며 사람이 몰려들었다고요.”
“죽상은 왜 부렸냐?”
“말해요?”
“하기 싫음 하지 말던가.”
“두 번은 잡아 줘라, 좀.”
“그럼 그냥 말하지 묻긴 왜 물어?”
“잡아줬으면 해서 묻는 거지 그것도 모르냐.”
“진짜 까다롭다, 니 새끼. 그래. 물어봐 준다. 죽상은 왜 부렸냐? 말해줘라.”
태섭이 아무 말도 없다. 대만은 어이가 없었다. 물어봐 달라고 해서 물어봐줬더니 말 안하는 건 도대체 뭐야. 이런데 뭐? 원하는 건 다 해줄 것 같다고? 거 봐, 송태섭은 내가 원하는 건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뭐가 도대체. 어이가 없어서 노려 보려는데, 태섭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턱을 슬쩍 들더니,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다. 뭘 이렇게 준비를 해. 이런 태섭은 아주 오래전에 보고 오랜만이다. 괜히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선배한테만 말할게요. 이걸 아는 사람 나 빼고는, 선배가 유일해요.”
“뭔데 이렇게 거창하게 운을 떼.”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
“아주 오래. 좋아했어요.”
“…….”
“그 사람 때문에 그랬어요. 근데도 바람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야 주장! 10분 넘었는데 네가 노냐! 송태섭이 빨랑 안 와?!”
……주머니에서 손을 못 빼겠다. 손이 덜덜 떨려서.
-
대만은 본의 아니게 본격적인 관찰을 시작한다. 시즌이 중요한 건 잊지 않았다, 다만. 송태섭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오래 된. 이것이 대만의 머리를 지배해 버렸다. 어떤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이것만 생각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 날 대만은 태섭과 함께 집으로 갔다. 집이 망할, 층만 다른 같은 아파트였다. 각자 차가 있어서 출발은 같아도 도착은 다를 수 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똑같이 도착해서 똑같은 지하 주차장의 다른 구역에 주차를 했다. 그러면 엘리베이터는 다르게 탈 수 있는데 망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태섭의 집이 20층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0층입니다- 안내음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간다, 쉬어라. 이 말을 가까스로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억지로 짜내듯이 말을 하는 게 말이 안 됐다. 그 말에 태섭은 아주 가볍게 대답했다. 네. 선배도 푹 쉬어요. 수고했어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랩탑을 켰다. 부팅 시간이 열받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다리를 달달 떨었다. forever052214 비밀번호를 거의 빛의 속도로 누르고 엔터를 눌렀다. 화면 로딩이 되기도 전에 인터넷 창을 켜서 송태섭 석 자를 검색창에 눌렀다. 태섭의 사진과 함께 간단한 프로필이 나왔다. 무시했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인터넷 수색대. 연애를 할 때 이 인터넷 수색대 때문에 가끔 공포에 질린 적도 있었으니. 이들은 모르는 건 없는 사람들이었다.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니 목격담이 공유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진짜 무서운 건, 얼굴로 소설을 쓰는 재능이 있다는 거였다. 오늘 정대만 선수의 얼굴이 밝네요, 며칠 전에 결과가 좋게 나와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 그런가요? 오늘따라 조금 더 다정한 것 같네요. 왠지 여친이 먹고 싶은 것에 토씨 하나 달지 않고 먹으러 왔을 것 같아요. 시발. 얼마나 소름 돋았던가.
그래서 그들의 혜안을 보고 싶었다. 송태섭에 관한 것들. 이걸 아는 사람 나 빼고는, 선배가 유일해요. 설마. 어떻게 그걸 아무도 몰랐을 수가. 블로그와 유튜브 썸네일을 보던 대만은 뭔가를 깨달았다. 미국에서의 일은 영어로 검색을 해봐야겠구나. 대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영어 전환 키보드를 눌렀다. 다시 검색. song…tae…sub…. 마우스 휠이 돌아가는 소리만 나는 조용한 방 안. 모니터의 불이 밝히고 있는 대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번역 버튼을 눌러가면서 글을 꼼꼼히 읽었다. 농구 잡지도 이렇게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씹어서 보는 내내 대만은 조금씩 절망하기 시작했다.
독한 새끼. 진짜 그 어떤 언급도 없다. like든 love든, 농구를 말할 때 가장 많이 말했다. 가끔 팬이 있을 뿐. 목격담? 미국은 파파라치가 있는 나라 아닌가? 사진도 이렇게 없을… 아니, 사진이 있긴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 쿨하게 길거리를 혼.자. 걷고 있는 송태섭. 간간이 팀메이트와 함께 있는 사진만 있을 뿐, 모르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대만은 제 가슴에 돌덩이가 하나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걸 아는 사람, 선배가, 유일. 나는 어째서 송태섭의 커다란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된 걸까.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책상에 이마를 갖다댔다. 그 사람은 미국에 있을 텐데. 아직까지 좋아한다면 왜 한국으로 이적했지? 재계약 이야기가 안 나온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송태섭 레이커스 재계약. 가장 상위에 있는 기사를 클릭했다. 미국 NBA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는 레이커스 소속 송태섭 선수(28)의 재계약이 불발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고국에서 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송태섭 선수의 확고한 의지가 있어 불발 되었으며, 모두가 예상하는 차별 등은 없다고 밝혔다… 오히려 송태섭 선수의 잔류를 위해 레이커스의 감독과 회사 임직원까지 계약자리에 나왔으며…
“…….”
비밀이 너무 무겁다 송태섭 이 새끼야…….
단백질 쉐이커를 만드는 내내 제 가슴 위에 있는 손이 끊임없이 쿵쿵거리는 심장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 먹고 양치를 하고 씻는 동안에도,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 송태섭이 둥둥 떠다녔다. 미칠 것 같았다. 잠이 안 왔다. 머릿속에서 양을 세도, 숫자를 세도, 그 끝에는 어김없이 태섭이 생각났다. 이게 이렇게 생각이 날 일이냐고. 천장을 멀뚱멀뚱 보는 내내 점점 성질이 뻗치기 시작해서 이불을 걷으려는데, 윙- 하고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이야. 빛을 내며 번쩍이고 있는 핸드폰을 손에 쥐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imessage 송태섭.
[노파심에 말하는데 오늘 한 이야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선배를 믿는데 못 믿어서 하는 말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야? 대만은 조금씩 성질이 났다. 타자를 치는 손에도 감정을 넣을 수 있다면, 지금 손에는 빡침을 넣을 순간이었다.
[이게 진짜 날 뭘로 보고]
[내가 다른 데서 네 이야기를 하겠냐? 하겠냐고]
[그리고 너 이 새끼 믿는데 못 믿는 게 무슨 말이야]
대만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자를 쓰고 있다는 표시가 이렇게 빡이 칠 수가 없었다. 늦어. 늦다고. 미국에서 영어만 눌렀을 리는 없고. 빨리 안 누르냐고 송태섭 이 새끼야.
[다른 건 다 믿죠 근데 나 오늘 알았잖아요 선배가 연애 고자인 거]
[이러면 이상한 데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열받는다고 전화하지 말고 그냥 자요]
[잘 자요 선배 내일 봐요]
[핸드폰 끈다]
“…….”
내 주먹이 무거워진 걸 다행으로 여겨라 송태섭 이 건방진 새끼야…….
대만은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안내음을 들으며 고개를 젖혔다. 잠은 다 잤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빡침에 결국 침대 밖으로 나왔다. 잠옷을 벗고 운동복을 입고 수면 양말도 신은 뒤, 베란다 문을 열었다. 와씨, 추워. 겨울에는 거의 옷걸이로 사용하는 런닝머신기계 전원을 켰다. 손잡이에 걸어둔 옷을 거실에 옮기고 기계 위에 올라가 천천히 걸었다. 5분도 안 되어서 달리기 시작했다가 층간 소음이 염려되어 결국 밖으로 나왔다. 달리는 내내 송태섭 개새끼 송태섭 못된 놈 송태섭 건방진 새끼 송태섭 이 싸가지, 염불을 외웠다. 누가 연애 고자야. 누가.
얘는 왜이렇게 늘 나를 열받게 할까?
다음 날에도 성질이 났다. 잠을 못 자서 퀭한 제 얼굴과는 다르게 태섭의 얼굴은 뽀송하다 못해 개운해 보였다. 뭐야, 저 묘하게 편해진 얼굴은…? 괜히 또 성질이 났다. 다음 날이 경기여서 적당히 연습을 하고 컨디션 조절에 신경 쓰기로 했다. 연습을 하는 내내 태섭이 신경쓰였다. 몸이 가볍다 못해 날아다녔다. 동료들조차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 물음에 태섭은 고개만 갸웃거리며 웃었다. 빙-긋. 무슨 말을 할 지는 궁금해서 아닌 척하며 귀를 기울이는데, 태섭에게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입 무겁다. 고개를 저으며 경기장을 정리하는 내내 꽂히는 시선이 있다는 걸 몰랐다.
“저녁 적당히들 먹어라. 알겠냐.”
“알겠어. 진짜 잔소리쟁이.”
“신경을 써 줘도 지랄들이야. 내일 다들 늦지 말고.”
“알겠습니다, 주장.”
정리를 하느라 가장 늦게 씻고 나온 대만은 아직 가지 않은 태섭 때문에 잠깐 어깨를 흠칫거렸다. 왁스로 고정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고 있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대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안 가냐.”
“가야죠.”
“어, 잘가라.”
“집도 같은데 같이 가요.”
“그 집 따로 가는데 뭔.”
“이웃사촌끼리 정 좀 쌓아 봅시다.”
“여기서 더 쌓일 정이 있냐.”
“많죠.”
저 말이 묘하게 거슬렸다. 후드티를 꿰어 입고 태섭을 힐끔거렸다. 외투까지 다 입고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대만은 짧게 한숨을 뱉고 라커문을 닫았다. 바로 주차장으로 갈 테니 겉옷은 팔에 걸쳤는데, 태섭이 옷을 입으라고 했다.
“왜?”
“저녁 먹고 가요.”
“너 내가 적당히 먹으라고 한 이야기 못 들었냐.”
“아까 낮에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있었던 붕어빵, 먹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대만은 걸음을 멈추었다. 태섭은 이마를 덮는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그건 적당히 맞죠?”
“…어떻게 알았냐?”
“눈을 못 떼던데요. 밥을 그렇게 먹고 또 먹으려는 줄 알고 잡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몰랐어요?”
진짜 말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할까. 대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풀었다. 요즘 송태섭 때문에 성질이 나서 턱에 힘을 많이 줬더니, 가끔 턱관절이 아팠다. 지금도 그랬다. 양쪽 근육이 뻐근한 게 느껴졌다. 짧은 숨을 뱉으며 얼른 입으라는 듯 턱짓을 하는 태섭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천천히 점퍼를 입었다.
“목도리는. 가져왔어요?”
“아니.”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이 허술하다.”
“어차피 차로 출퇴근 하는데 챙길 필요 없잖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태섭이 가방을 뒤지더니 목도리를 건넸다. 대만은 조금 놀랐다. 미국에서 생긴 습관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거니까 뭐라 하면 죽는다. 변명을 하는 듯한 말에 웃었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고개 좀 숙여 봐요. 어쩐지 풀린 마음에 자연스럽게 말을 듣게 된다. 숙인 목에 부드러운 것이 감긴다. 꽤 진지한 얼굴로 목도리를 정리하는 태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기분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볼을 문질렀다. 문지른다고 해서 이상한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주변 회사의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선배 같은 사람 많나 보네요. 저 얄미운 입술을 꿰매고 싶었다. 작년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날이 추웠다. 어깨를 움츠리며 목도리 안으로 입을 숨겼다. 자연스럽게 낯선 냄새가 났다. 목도리에서 나는, 태섭의 향기 같은 것. 대만은 두 눈을 굴려 옆에 있는 얄미운 놈을 보았다. 미동도 없이 서있는 태섭의 귀가 빨갰다.
“안 춥냐?”
“네.”
“귀가 빨간데.”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고요.”
“목도 좀 빨간 것 같은데. 목도리 줄까?”
“괜찮아요.”
제 얼굴을 힐끔 보고 고개를 돌리는 태섭의 귀 끝이 아까보다 빨개졌다. 대만은 그 귀 끝을 보다, 한 블럭 뒤에 있는 컨벤션 센터에서 꾸며 놓은 대형 트리를 보았다. 온갖 오브제로 반짝이고 있는 트리의 끝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네. 중얼거리는 제 목소리에 움직이는 태섭의 시선이 같은 곳을 쳐다본다. 죄송해요, 붕어빵이 방금 막 다 나가서 바로 굽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반짝이는 것에는 언제나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크리스마스에 뭐해요?”
“연습하고 있겠지.”
“그 연습 끝나고 약속 있어요?”
“몇 개 드릴까요?”
“8개요.”
대만의 말에 태섭이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쳐다본다. 적당히 먹으라면서요. 대만은 콧방귀를 꼈다. 붕어빵 내 손 보다 작다. 기가 찬다면서 웃는 태섭을 보면서 지갑을 뒤지는 얼굴이 곤란해졌다. 넣어둬요. 지켜보던 태섭이 지갑을 꺼내서 오천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괜히 민망해서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더 집어 넣었다. 바로 옆에 있는 물건의 주인인 태섭의 냄새가 더 많이 났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거스름돈을 받아 넣는 태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을 하며 대만에게 붕어빵 봉지를 내밀었다. 봉지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킁킁거리고 있자니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비웃은 건 아니겠지. 실눈을 뜬 채로 째려 봤다가 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도리어 좀… 이상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서 다시 째려봤다. 아까 전에 트리를 보던 것처럼 나를 볼 이유가 없지 않나.
“나 없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요즘 계좌이체 다 돼.”
“알고 있는 사람치고 당황하지 않았나. 아무튼, 갚아요.”
“치사하게 진짜.”
“선배가 내 애인이면 돈 안 받죠.”
“…미친 소리 하네. 너 요 며칠 이상한 소리,”
“크리스마스. 약속 만들어요.”
무슨 소리도 하지 못하도록 칼같이 자르는 말이 뜬금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정색을 하기가 무섭게 이런다.
“그 날 갚아요. 맛있는 거 사줘요.”
“어…?”
“잘 들었는데 못 들은 척 하지 말고요.”
“굳이 그 날…?”
“네.”
“왜…?”
“일수 놓은 사람 마음이죠, 그건.”
“너 그런 단어도 아냐?”
“…저 미국 사람 아니거든요.”
어이가 없다는 태섭에게 붕어빵을 하나 건넸다. 뜨거우니까 조심히 먹으라는 말에 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애예요? 어이없네.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부터 베어 물었다. 방금 막 해서 팥이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무심코 먹었다가 식도가 타들어갈 뻔해서 아, 뜨거, 악! 꽥꽥 소리를 질렀더니 짧은 한숨을 내쉰 태섭이 재빠르게 물을 건넸다. 그 손이 꽤 조용하고, 태연했다.
그 물을 마시느라 제 얼굴을 살피는 시선을 대만은, 보지 못했다.
와, 죽을 뻔했다. 넌 괜찮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을 꾹 참고 있다는 것도, 아직 뜨겁다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거 참 불어서 좀 먹지 성질 급하게, 라는 말을 하면서 아까처럼 혀가 데이지 않을까 싶어 살피고 있는 어떠한 다정이 있다는 것도 아직은,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