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를 모른다 b

태섭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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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이 들었다가 깼다를 반복했다. 눈을 감을 때는 늘 보았던 것이 보였고 눈을 뜰 때는, 늘 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태섭은 제 옆에 자고 있는 대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 들리는 조용하고, 고요한 집. 조금만 집중하면 들을 수 있는 일정한 숨. 깊은 잠에 든 대만의 얼굴. 어째서일까. 왜 아직도 이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숱한 밤, 그 밤의 시간, 그 시간 속의 우리. 미동도 없는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 의외로 외로움을 잘 탄다며, 누군가 옆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잠을 청한다고 웃었던 얼굴. 

 한 번 잠이 들면 잘 깨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 용기를 낼 수 있게 한다. 태섭은 이불 안에 넣어둔 손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이마를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온도는 따뜻했다.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온도. 그 언젠가, 우리가 처음으로 이렇게 같은 이불에 누웠던 날이 떠올랐다. 잔뜩 경직된 몸으로 천장만 보며 눈만 꿈뻑였던 그 날에, 뭘 이렇게 목석처럼 있냐고 말하면서 이불을 덮어주던 대만은 웃고 있었다. 이불을 덮어준답시고 안아보자고 말하던 대만은 답지 않게 솔직해서, 괜히 성질을 부렸었다. 먼저 고백을 하게 만들었던 주제에. 마음이 통하자마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먼저 다가오던 대만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선명했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우리의 연락이 뜸했어도, 그랬어도 찾아온다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하는데. 

 태섭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마를 만졌던 손은 어느새 볼 언저리를 만지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볼을 조심스럽게 누르면서 대만의 기척을 살폈다. 대만은 여전히 조용했다. 태섭은 긴 숨을 들이마셨다. 굳게 다물린 입 안에, 말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눈을 한 번, 깜빡. 여긴 따뜻하네요, 미국 집은 좀 추웠는데. 한 번 더, 깜빡. 거긴… 하나도 따뜻하지 않았어요. 한 번 더, 느리게… 깜빡. 대만의 품으로 조금 더 바싹 다가갔다. 그러자, 긴 숨을 내쉰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태섭이 꼼지락거리며 파고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품으로 끌어들이는 건, 대만의 습관이었다. 태섭은 그 품에서 익숙한 향기를 맡으면서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눈을 번쩍 떴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누워있는 이 곳이 어디인지를 한참동안 생각해야 했다.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은 집. 하얀 천장.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비어있는… 옆자리. 태섭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비어있은지가 꽤 됐는지, 차가운 온기만이 이불 위에 있었다. 태섭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한 시. 이렇게 늦게까지 잔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 건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태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조용했다. 새벽 내내 그랬던 것처럼. 달라진 건, 옆에 있던 대만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태섭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실은 종일 보일러를 틀어놓고 있었던 것처럼 훈훈했다. 태섭은 거실에 멈춰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는, 안개 낀 동네. 대충 봐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집들.

 익숙하게 부엌으로 걸어가 익숙하게 냉장고문을 열고, 익숙하게 물을 꺼내 마셨다. 식탁 위에는 컵이 놓여져 있었다. 태섭은 그 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건 선배 개인 물통이 아니라고요, 컵을 좀 쓰라고. 

 나도 모르게 그냥 마시는 걸 어떡하냐? 

 그럼 물 마실 때마다 내 생각을 하던가. 그럼 컵을 쓰겠지.

 그건 별론데.

 왜요.

 그럼 좋은 말로 해줘. 성질 부리는 널 떠올리기 싫어.

 태섭은 컵을 보면서 물병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그 말에 잔뜩 빨개진 얼굴로 뭐라는 거야, 진짜 하며 성질을 부렸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참 어렸다. 좋은 말로 해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성질을 부리지 말라는 말에 성질을 부렸을까. 

 물을 다 마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있을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섭은 물병을 식탁에 올려놓고,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일어났냐?

 장이라도 봐온 건지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두고, 젖은 옷을 털고 있는 대만은 웃고 있었다. 

 냉장고에 먹을 게 없어서 장 좀 봐왔어. 언제 일어났어?

 …조금 전에요.

 진짜? 엄청 오래 잤네. 

 그러게.

 컨디션은 좀 어때, 괜찮아?

 네.

 다행이다.

 대만은 대충 물을 턴 뒤 신발을 벗었다. 바지 끝자락이 물에 젖어있었다. 태섭은 그 바지를 보았다. 으, 차가워.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을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미안한데, 옷 좀 가져다줄 수 있어?

 태섭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옷장을 열고 익숙하게 대만의 옷을 꺼내 익숙하게 화장실문 앞에 두었다. 고마워. 문 안으로 대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문을 보다가, 대만이 문 앞에 둔 장바구니를 챙겨 식탁으로 옮겼다.

 배고프지?

 조금요.

 잠깐만 기다려. 

 요리라도 할 것처럼 움직이는 대만이 어색했다. 태섭은 거실도, 부엌도 아닌 곳에 서서 대만을 쳐다보았다. 태섭의 시선을 느낀 대만은 앞치마를 하려다 어색하게 웃었다.

 너 지금 속으로 비웃고 있지.

 …아니거든요.

 근데 비웃어도 할 말은 없네. 요리를 하는 건 처음 볼 거 아니야.

 장바구니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지금 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손이 익숙해보였다. 태섭은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대만은 태섭을 힐끔 쳐다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대단한 걸 할 줄 아는 건 아니고. 그냥, 어머니한테 좀 배웠어.

 …안 비웃었다니까요, 진짜.

 내가 찔려서 그런다, 내가.

 피식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 태섭은 대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혼자 중얼거리던 대만은 아, 하더니 태섭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태섭은 느리게 움직이는 대만의 손을 쳐다보았다. 보면 안 되는 건가, 싶었다. 그랬는데, 대만의 손에 들린 건 꽃병이었다.

 꽃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꽂아둘 병이 없더라.

 …….

 그래서 샀어. 네가 준 꽃이랑 어울리겠지?

 대만은 태섭을 스쳐지나, 거실을 지나고, 티브이 옆에 있던 꽃다발을 가져왔다. 태섭은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지, 라고 중얼거리며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이 구는 대만을 쳐다보았다. 

 되게 잘 묶어주셨다. 많아서 그런가.

 …….

 가위로도 잘리겠지? 끈이 되게 단단해 보이는데.

 태섭은 그제야 제가 산 꽃을 자세히 보았다. 무슨 꽃을 샀는지, 왜 이 꽃을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대만의 손에 있는 꽃은 주인을 만난 것처럼 아름다웠다. 꽃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대만의 두 눈동자를, 이런 건 익숙하지 않다면서 어색하게 웃는 입술을. 보고 있는데도,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못견디게 그리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빴네.

 …뭐가?

 꽃을 한 번도 선물해준 적이 없었잖아요.

 아….

 동그랗게 뜬 눈이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태섭은, 물끄러미 꽃을 보는 대만의 내리깐 눈을 보았다. 두 손으로 소중하게 꽃병을 잡고 있는 손을 보았다. 그 손에 힘이 들어가있다는 건, 하얘진 손가락 끝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럼 나쁜 게 아니지.

 대만이 웃었다. 그 웃음이 자연스러워서 자칫하면 스쳐 지나갈 뻔했다. 한 번 크게 움직인 목울대를. 

 …….

 …….

 물을 받아야겠다며 뒤돌아서는 대만에게 걸어갔다. 팔을 뻗어, 허리를 안았다. 그러자마자 잔뜩 굳는 대만이 느껴졌다. 새벽에 아무렇지도 않게 안아주던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태섭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틀고 미동도 하지 않는 대만의 등에 얼굴을 기댄 채로 눈을 깜빡였다.

 꽃은 점점 시들 거예요.

 어.

 그러기 전에 꽃을 말리면,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대요.

 어….

 이 말은 생각나네. 어이 없게.

 대만은 물을 껐다. 낮게 웃는 태섭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대만은 내리고 있는 비를 보았다.

 같이 말려요.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액자에 넣는 걸 추천한다고 그랬어.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어제까지는 싫었는데,

 액자도 같이 사요.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태섭의 목소리가 잘 들려서 오늘은, 

 …그래.

 싫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자.

 집에 오는 동안,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려고 연습한 말을 숨겼다.

 비가 오랫동안 왔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