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농구 역시 습관같은 것이었다. 비록 목숨을 걸고 하는 것처럼 지나친 것이었지만 매일매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신체의 일부 같은 것.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
그런 정대만에게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연습을 마치고 송태섭과 같이 집으로 가는 것. 처음에는 징그럽게 뭘 데려다주느냐고 핀잔을 쏟아냈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일주일, 이주, 그 이상이 넘어가자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다리게 됐다. 송태섭은 주장이 된 뒤에 농구부일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빨리 끝날 때도, 늦게 끝날 때도 있었다. 정대만은 머리를 싸매고 일지를 쓰는 송태섭의 옆에서 가벼운 연습을 하곤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라고 생각했던 건 오늘은 언제 끝나려나, 로 바뀌었다. 나 못 기다려 집에 간다, 라고 툴툴댔던 건 천천히 해, 로 부드럽게 바뀌었다. 송태섭은 공이 림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일지를 써 내려갔다. 사각 거리는 소리가 코트에 조용히 울릴 때면 수업 시간에는 졸기만 한다면서 저건 꽤 성실히 쓰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요즘 연습게임하자고 연락이 많이 오는 것 같아요.
그래? 감독님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조금이요. 윈터컵이 있어서 다 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그렇지.
주전 멤버 보완이 필요한 것 같아서 연습을 좀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주장이네, 송태섭.
네. 이래 봬도.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익숙해졌다. 먼저 잡아 오는 손이 낯설고 어색해서 이 손 좀 놓고 가면 안 되겠냐고 기겁을 했던 건 어느새 사라진 일이 됐다. 살짝 잡는 저와는 달리 언제나 꽉 잡아 오는 서늘한 손. 언젠가 이 손을 꽉 잡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헛기침을 하고 있노라면 슬쩍 올려다보는 송태섭이, 말은 하지 않아도 정대만을 살피고 있는 송태섭의 눈이 익숙하다.
선배가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어?
처음에는 선배가 3학년이라 걱정이 좀 됐는데, 선배까지 없었으면 내가 날 걱정할 뻔 했어요. 힘이 돼.
바람이 불었다. 약간 서늘했다. 정대만은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송태섭의 머리카락을 보다 해가 지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을이네.
…내 말 들었어요?
가을…
지금 되게 중요한 말 했는데?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툴툴거리는 송태섭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정대만은 눈을 깜빡였다. 보다 못한 송태섭이 정대만의 앞에 섰다. 삐딱한 눈과 마주쳤다. 뭔가가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게 고스란히 얼굴에 보였다.
선배가 나 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뭐냐, 갑자기.
나랑 있을 때는 선배가 딴 데 신경 안 썼으면 좋겠어.
뭐, 뭐래. 꺼져,
안 꺼질 건데. 안 그럴 건데.
깐족거릴래?
정대만은 송태섭의 손을 뿌리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성큼성큼 걷는 정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송태섭이 소리쳤다.
진짜 그래주면 안 되나?!
선배, 나 좀 좋아해줘요
!!!!!!!!
03
11.
가을이라.
정대만은 줄곧 가을을 생각했다.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이 온다.
그리고, 졸업.
정대만은 미래에 대해 뚜렷하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농구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었다. 관건은 언제나 무릎이었으나 치료나 재활을 잘 병행한다면 선수로서 오래 뛰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있었다. 듣자하니 채치수와 권준호는 지망할 대학까지 정해놓은 것 같던데. 정대만에게는 농구부가 있는 대학에 지망해야지, 라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변수가 생긴 것 같은 건지.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그건 송태섭이었다. 내가 졸업하면 송태섭은 3학년. 어떤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에 진학을 한다면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송태섭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내게, 고백을… 한 걸까?
신기한 일이었다. 지난 2년간은 막연한 것이어도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농구를 다시 시작하고서는 무서운 것이 생긴 것만 같다. 소중해서 지켜야 하는 것. 정대만에게는 농구가 그랬고, 그리고, 산왕전에서 안 감독이 말했던 ‘이것이 북산입니다’ 라고 했던 멤버들이 그랬다.
“그래서… …듣고 있어요?”
“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집중 안 할 거예요?”
“미안.”
집중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다는 티가 역력한 정대만의 얼굴을 보며 송태섭은 뒷목을 만졌다.
“피곤해요?”
“아니, 어, 사실은, 조금.”
“내일 이야기 할까요?”
“미안.”
정대만이 두 손을 모았다. 송태섭은 마음에 안 든 다는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좀 더 가까이 정대만에게로 다가갔다. 훅 다가오는 송태섭 때문에 정대만이 순간적으로 상체를 뒤로 가져갔다. 송태섭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뭐 한 걸까?”
“뭐가.”
“나랑 가까이 있는 거 싫어요?”
“…무슨 질문이 그러냐?”
정대만이 시선을 피했다. 송태섭은 손을 뻗어 정대만의 손을 잡았다. 정대만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옮겨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오늘 연습 때도 그렇고, 작전 회의 때도 그렇고. 몸은 여기 있는데 생각은 다른 데 있잖아.”
“미안.”
“그 말은 더 하지 말고요.”
“…….”
“나랑 있을 때는 다른 생각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거 되게 어려운 거였네.”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마…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정대만은 코트에 누웠다. 그 옆에 나란히 누운 송태섭이 손을 뻗어 정대만의 손가락을 잡았다. 정대만은 제 손가락을 꾹꾹 누르는 약한 힘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윈터컵 말이에요.”
“어.”
“잘할 수 있으려나. 치수 선배도, 강백호도, 서태웅도 없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선배 답네. 든든하다.”
송태섭의 말에 정대만이 웃었다. 허밍처럼 들리는 웃음을 들으며 송태섭이 말을 이었다.
“선배.”
“어.”
“나중에 말하고 싶어질 때 언제든 이야기해요.”
“어?”
“하고 싶은 이야기 있잖아. 정리되면 이야기 해달라고요.”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얼굴일 때 무슨 기분인지, 사소한 습관, 눈빛. 몇 번이고 함께한 경기에서 생긴 유대감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
송태섭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떤 말들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려고 했다. 그 말을 삼켜야만 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내 감정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온 세포가 알렸다. 송태섭은 몸을 일으켰다. 저를 쳐다보며 멍한 얼굴인 정대만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다른 손으로 정대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대만이 파르르 떨었다. 송태섭이 픽, 웃으며 조금 더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쫄지 말아요. 안 덮쳐.”
“…미친. 안 쫄았거든?”
“걱정하지 마요.”
“뭘!”
“그냥, 뭐든. 선배가 그랬잖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되니까, 무리하지 말라고요.”
이제 갈까요?
송태섭이 먼저 일어나 손을 뻗었다. 정대만은 그 손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생각해 보면 송태섭은 늘 그랬다. 나는 어렵게 생각하는 걸 언제나 쉽게 풀어냈다. 어쩌면 이 말을 꺼내기 위해 말을 걸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너무 앞선 생각인 것 같아 눈을 살짝 감았다. 보지 않아야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정대만은 온통 까만 세상에서 생각했다.
손 아파요, 얼른.
송태섭이 재촉하며 한 번 더 손을 내밀었을 때, 정대만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떴다. 송태섭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완전히 일어난 정대만을 보며 송태섭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정대만은 왜 이래, 하며 미간을 찌푸렸고 송태섭은,
“근데, 나중에는 그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무슨 기회?”
“내가 선배를 덮칠 수 있는 기회?”
유유히 제 할 말만 하고 코트를 벗어났다. 얼이 빠진 정대만의 얼굴이 빨개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먹을 꽉 쥔 정대만은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쥐어짜며 소리를 질렀다.
“송태섭 이 미친새끼야!”
“얼른 와요~”
“너 거기 딱서. 서라고 했다, 야!!”
하여간 진지할 틈을 주지 않네. 정대만이 웃으며 전력질주로 송태섭에게 달려갔다. 송태섭은 어깨를 으쓱이며 느리다고 핀잔을 주었다. 이 새끼 너 오늘 날 잡았어. 헤드락을 거는 정대만 때문에 아픈데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진지한 건 안 어울린다고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하는 말이라고는 아파! 아프다고! 뿐이었지만 송태섭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2.
비가 오네.
진학상담을 끝내고 나온 정대만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래서 어제 슛이 잘 들어갔나. 비가 오기 전날에는 무릎도 살짝 아팠지만 슛이 깔끔하게 잘 들어갔다. 이걸 송태섭에게 말했다가 다시는 무릎으로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별 쇼를 다 해서 비 오는 날을 알려주는 걸 그만뒀다. 기상청보다 더 정확하다니까? 덧붙인 말에 눈빛으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알게 됐다. 살벌하게 노려보던 송태섭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무서운 주장이 늦었다고 화 안 내게 빨리 연습하러 가야겠네 싶어 교실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농구부 연습을 하러 가려는데, 계단에 송태섭이 서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선배 기다렸어요.”
“나? 왜?”
“농구부 연습 안 하고 그냥 갈 까봐서요.”
“근면 성실한 날 뭘로 보는 거야.”
한 쪽 눈썹을 올리며 쳐다보는 송태섭의 눈이 영 불만에 가득차 보였다. 무슨 일 있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자고 중얼거렸다. 송태섭은 계단을 내려가는 정대만의 뒷모습을 보며 뒤통수를 매만지다가, 후, 숨을 쉬고 정대만을 불렀다.
“진학 상담 한 거예요?”
“아, 어.”
“안 감독님도 선배 진학상담에 같이 계셨다면서요.”
“어, 그랬지.”
“…….”
“왜. 뭐가 불만이야.”
송태섭 얼굴이 영, 살벌했다. 정대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빨리 가자. 정대만의 말에 송태섭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말 없이 정대만을 스쳐 지나갔다.
13.
연습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연습게임과 윈터컵이 곧 있고, 따로 조언을 구할 만큼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주장 조금만 쉬어요 라고 대놓고 요청할 정도였을까. 의견을 묵살하고 죽어라 굴리더니 한나의 중재로 연습이 종료됐다. 독한놈. 거친 숨을 내쉬며 코트에 뻗은 정대만이 땀을 닦고 있는 송태섭을 노려봤다. 송태섭은 그런 정대만을 힐끔 쳐다보고는 한나에게서 건네 받은 일지를 펼쳤다.
“오늘은 농구공 소리는 없어. 누구 덕에 엄~청 힘들어서.”
깐족거림에도 반응이 없다니. 정대만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했다. 몸을 일으킨 정대만이 묵묵히 일지를 쓰고 있는 송태섭을 쳐다보며 앉았다.
“송태섭.”
“네.”
“왜 그래?”
“…….”
“말 안 할 거냐?”
“…….”
“그래. 네가 나한테 그랬지? 하고 싶을 때 말 하라고.”
“…….”
“너도 말 하고 싶을 때 해.”
그 말을 한 정대만이 다시 누웠다. 문을 열어둬 빗소리가 들렸다. 오늘따라 빗소리가 좋네. 정대만은 어쩐지 나른해졌다. 연습이 좀 빡쎘어야지. 독한놈. 일지를 쓰는 소리를 들으며 정대만은 꿈을 꾸는 얼굴을 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냥 들어.”
“…….”
“농구를 해야지 라는 생각만 있고 구체적인 미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는데. 3학년이잖냐.”
그 말에, 일지를 쓰던 송태섭의 손이 멈추었다.
“왜일까, 를 생각해봤는데. 지금 하는 농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
“우리가 함께 했던 경기들이 재미있었어.”
“…….”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던 건 가봐.”
비 때문에 약간의 비린 냄새가 났다. 정대만은 길게 숨을 마신 뒤 내쉬었다. 천장을 비추는 불빛이 눈부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그랬다고.”
“…….”
“구체적인 미래는…”
송태섭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정대만의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제 얼굴 옆에 손을 두고 내려다보는 송태섭이 보였다. 깜짝 놀란 정대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송태섭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심장이 뛰었다. 이런 무표정을 한 송태섭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대만은 아무 말 없이 송태섭을 쳐다봤다.
“…….”
“…….”
빗소리가 옅게 들리는 코트는 적막했다. 송태섭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어 숨 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송태섭에게도 내 숨소리가 들리겠지. 그 사실이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같은 소리를 공유한다는 건 경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시간과 소리를 함께 나누고 있었다. 이건 정확히 뭘까. 못 볼 꼴 다 보고 험한 꼴도 당하고, 온갖 일이란 일은 다 겪었는데도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정말 다시 돌아온 거예요?’
과거를 묻지 않고 지금을 말하던, 조금은 어이없고 말도 안 됐던 송태섭에게, 지금 제 위에서 무슨 말을 기다리고 있는 송태섭에게,
“…멍청아, 기회잖아.”
나 역시, 지금을 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미래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