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주임님.
대만은 의자에 가방을 올려두고 목도리를 풀었다. 찬 기운이 묻어있는 목도리와 패딩을 의자에 대충 걸고 가방을 안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늘 하듯이 테이블 세팅을 했다. 다른 직원들이 하는 거에 비하면 거의 대충이었지만 대만에게는 그들과 똑같은 의식이었다. 어제와 똑같은 순서로 컴퓨터를 켜고, 수첩을 펼치고, 손에 익은 펜을 꺼낸 뒤, 의식의 하이라이트인 기도를 진행한다. 오늘 하루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제발 일 적기를. 제발 나 좀 그만 찾기를. 그 의식이 중간에 끼어든 다른 행동으로 밀려났다. 손목시계로 시간 확인하기. 이건, 어제까지 없던 행동이었다. 8시 50분. 곧, 9시. 태섭의 헬스장 일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주임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를 부르는 소리 때문에 대만은 가방을 꽉 잡았다. 어제 뭐 안 하고 간 게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떠오르지 않았고, 내일부터 알바 시작한다고 말하며 제 말대로 돌돌 싸매고 온 목도리를 코까지 올리며 눈을 맞춰오던 태섭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조금 들었다. E는 웃으며 텀블러에 든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어찌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지, 생각한 그런 게 아니다 싶어서 안심했다. 아직 출근한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절망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좋은 일 있으세요?
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보이셔서요.
그런가?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이 출근했다. 다른 게 있다면 만원 버스에 타고 있을 때의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편안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찐빵이 되어도 이 사람들도 힘들겠지 라는 범우주적 마음이 들었다.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잡고 있던 손잡이를 갑자기 놓아서 머리를 부딪혀도, 하차벨을 누르기 위해 불쑥 들어온 팔에 얼굴을 부딪혀도, 하차 하느라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힘들게 비집고 나가도, 하나도 짜증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려도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심지어는 콧노래도 나왔다. 그것 말고는 어제와 똑같았다. 저런 건 일에 속하지 않으니 그런 거 없다며 가볍게 말했다. 그 대답에 C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듯한 눈이었다. 인정하지 못하는 건 C 뿐만이 아닌지, 파티션 아래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홱 들더니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며 아닌데, 오늘 뭔가 이상한데요, 기운이 다르다고요 기운이. 한 마디씩 했다. 멋쩍어진 대만은 뒷머리를 만졌다.
그럼 뭐… 좋은 일 있나 보죠.
여자들의 촉이란,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다. 팀장을 제외한 직원 5명 중에 3명을 차지하는 여자들이 똑같은 반응이다? 이건 절대로 아니라고 하면 안 됐다. 26년 동안 함께 지낸 유일한 여자인 모친에게서 배운 것이었고, 이건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일을 했다. 10시 부터 시작된 회의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여태 구상하던 것으로 다음 회의에서 발표할 피피티를 준비하게 되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계시와도 같은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회사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일을 하다 중간중간 시계를 확인하는 것빼고는 다 똑같은데도 그랬다. 어제도 가르쳐 준 걸 B가 물어도, 휘갈기듯 써놓은 초안 보고서를 당장 제출 해야 할 일이 생겨도, 대만은 평온한 얼굴로 일을 가르쳐주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저를 여자 직원인 A, C, E가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짬이 나는 시간에 P 카페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일로 가득찬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 말 다한 것이었다.
9.
어서오세요, 대만 씨.
큼큼. 안녕하세요.
여느 때처럼 사장이 밝게 인사를 했다. 그에 반해 대만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인사했다. 마치 카페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머리를 꾸벅이며 애꿎은 목도리를 만졌다. 많이 춥죠. 물기 젖은 손을 닦은 사장이 똑같이 바닐라 라떼로 드리면 되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주 앉는 구석 자리에 앉으며 카페를 살피는데, 태섭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목도리를 테이블 위에 두고 앉으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태섭은 없었다. 오늘부터 하는 거 아니었나?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꺼냈을 때, 문이 열렸다. 태섭이었다.
왔어요, 태섭 씨? 수고했어요. 밖에 춥죠.
아뇨. 많이 안 추워요.
숏패딩에 목도리, 심지어 귀도리까지 하고 있는 태섭이 장갑을 낀 두 손에 쥔 무언가를 고쳐 들며 사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대만을 두 눈을 깜빡였다. 귀도리를 한 태섭은 오랜만에 보았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태섭을 처음 만났던 그 해 겨울. 잔뜩 심통난 얼굴로 귀도리를 손에 들고 오던 태섭에게 추운데 왜 이거 안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동안 말이 없던 태섭이 딴 곳을 쳐다보다 우물쭈물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안 멋있단 말이에요. 그 말에 태섭과 눈을 마주치며 사정사정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형이랑 있으니까 괜찮잖아, 제발 귀도리 하자, 그러면 감기 안 걸리고, 그래야 형이랑 같이 농구할 수 있어. 그 말을 하는 내내 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때의 태섭과 지금 눈 앞에 있는 태섭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달라진 거라고는 키가 큰 것(덩치 포함), 통통한 볼살이 사라진 것, 인상이 조금(많이) 사나워 진 것 뿐이었다. 그때 생각이 들자마자 풉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고, 이 웃음 때문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태섭은 형이 지금 여기 왜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다, 눈썹이 올라가기 직전 사라졌다.
두 분 아는 사이에요? 그런 것 같은데?
바닐라 라떼를 가져다 주며 사장이 물었다. 네. 대만은 짧게 대답하며 테이크 아웃잔의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커피와 우유 냄새가 났다. 매번 마시니까 라떼 아트는 안 하셔도 괜찮다는 말을 해서 아무런 모양이 없는 라떼를 보고 있자니, 프런트 뒤에서 태섭이 나왔다. 앞치마를 고쳐 입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는 태섭의 귀 끝이 빨갰다. 대만은 웃음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태섭이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게 보였다. 형아 왔는데 얼른 안 튀어 오냐? 저 말에 태섭의 눈썹이 더 올라갔다.
…형아가 뭐예요, 형아가.
오랜만에 귀도리 했더라, 너?
아, 쫌….
어릴 때 생각나서 형아라고 그랬다, 왜. 싫어?
뭐야? 오래 알고 지낸 거예요?
점심 시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빠진 카페 안에는 사장과 태섭만 있었다. 대만은 제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태섭을 쳐다보며 마음 놓고 웃었다. 와하하 소리가 카페 안에 틀어 놓은 음악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울려 퍼졌다. 태섭은 그런 대만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분명히 귀도리로 한 소리 한다에 500원을 걸 수 있었다.
귀도리 가지고 다녀?
…….
잘 하고 다녀. 그래야 감기 안 걸려. 내가 그랬지? 멋부리다가 얼어 죽는다고. 형아 말 잘들어라.
그 멋이라는 거 형한테는 부리고 싶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짜. 태섭은 성질을 내고 싶었으나, 전역을 하기 전에 다짐을 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참아. 욱하지 마. 새벽부터 나가야 해서 챙긴 귀도리를 이런 식으로 대만에게 들킬 줄 몰랐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가면 귀 끝이 빨개지고 가려워져서, 알바 첫 날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하고 나갔는데…. 프런트 뒤로 가서 옷을 벗고 정리하는 동안, 귀도리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거울로 봤다가 기겁을 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 모습을 정대만이 보다니. 태섭은 절망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때처럼 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대만이 사정사정해서 귀도리를 썼을 때, 말도 잘듣고 귀여워 죽겠다면서 볼을 잡아 늘린 12살의 송태섭을 보듯이 하고 있다고, 저 인간이.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그건 상관 없지만, 정대만은 그러면 안 됐다.
지금 일하는 시간 아니에요?
맞지.
근데 왜 이러고 있어요?
조금 여유 있어서. 왜. 싫어?
싫기는 뭐가. 태섭은 입술을 꾹 다물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대만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서 알바를 하게 됐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말을 꾹 삼켰다. 정말이지 바보 멍청이였다, 정대만은.
잘 아는 사이에요?
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는 거예요?
네.
신기하다.
대만은 사장에게 저와 태섭이 얽힌 간략한 역사를 설명했다. 어떻게 만나서 지냈는데, 아직까지 이렇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하는 동안 태섭은 뒷덜미만 만졌다. 저 말을 하는 대만은 신이 난 것 같았다. 간간이 저를 보면서 마주치는 눈이 반짝였다. 오로지 우리를 설명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대만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저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설거지나 하러 가겠다고 했다. 사실은, 사장과 눈이 마주치는 빈도가 잦아져서 그랬다. 무언가를 보려는 듯이 빤히 보는 시선이 결국에는 알아챌 것 같았다. 몇날 며칠동안 찾아와 여기서 꼭 알바를 하고 싶다고, 자리가 나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던 간절함의 주체가 무엇인지.
대만은 사장과 이야기를 하는 내내 태섭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는 내내,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 눈 앞에서 움직이는 태섭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랬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면서도 저와 슬쩍 눈을 마주치는 태섭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새끼. 오랜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옛날에나 있었던, 어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태섭이 눈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애틋한 동생이신가봐요.
네?
아뇨, 지금 대만 씨 눈빛 장난 아니에요.
제가요?
네. 소중해 죽겠다는 것 같은데?
예에에에?
대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도 있었다. 사장에게 말한 간략한 역사 속에 말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중해 죽겠다니. 사람은 그런 걸로 죽지 않았다.
태섭이 처음 알바할 때 생각나서요.
아…. 그러실 수 있겠어요.
처음 알바를 고1 때 했거든요, 태섭이가.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대만은 뒤집어 둔 핸드폰을 다시 뒤집었다. A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주임님 주임님 어디세요? P 카페에 계세요?]
[혹시 거기 계시면 저희 커피도 좀 사다 주시면 안될까요?]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팀장님이 부르셔서요. · ゚ ゚ * (> д <) * ゚ ゚ ·.]
[부탁드립니다 주임님 o (≧ ▽ ≦) o]
대만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태섭을 보게 되는 건 거의 자동반사적이었다. 태섭은 머신 사용법을 익히려는지 매뉴얼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 매뉴얼을 보면서 다른 손으로는 머신의 이곳 저곳을 만졌다. 그런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실내여서 후드티 차림인 태섭을. 턱선은 날카로워졌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보이는 동그란 얼굴을. 세상 관심 없는 듯한 무표정에 꾹 다문 입술이지만, 웃으면 그 누구보다 환해지는 말랑한 얼굴을….
야, 송태섭.
태섭은 제 앞으로 성큼성큼 오는 대만을 쳐다봤다가 조금 놀랐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질투날 정도로 다른 사람 앞에서 말랑말랑하던 대만이 험악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좀 뚱한 표정이 나왔다.
너 여기서 꼭 알바 해야 겠냐?
…네?
딴데서 하면 안 돼?
뭐라는 거예요, 지금?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대만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알바 시작한지 세 시간 밖에 안 됐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눈썹을 올리는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거침없이 말했다. 너 여기서 일하는 거 싫어.
10.
대만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싫어요. 이 말을 하는 태섭의 무표정한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싫다는 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저 말에는 칼같이 싫단다. 어찌나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또박또박 하던지. 한글 떼는 어린 아인줄 알았다. 대만은 다리를 떨다 제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이렇게 초조하게 굴 이유가 없는데. 대만을 이렇게 만든 일등공신들은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잠깐의 수다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테이크 아웃잔을 치아로 까득까득 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에 하는 이야기와 똑같았다. 시시콜콜한 하루, 유튜브, 맛집 등. 똑같은 이야기 속에서 걔가 튀어 나올까봐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기다린 걔의 이야기가 나왔다. 썸 이야기를 하면서 부터라는 게 찝찝했으나 걔는 이런 식으로 소비 되었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건데, 그럴 때마다 부렸던 우월을 오늘따라 부릴 수가 없었다.
맞아맞아. 주임님 그 카페에 알바생 새로 들어왔어요? 며칠 전부터 공고가 사라져 있어가지구. 갑자기 궁금하네?
대만은 머리를 싸맸다. 네 라고 할 수도, 아니오 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금방 시선이 떨어졌다.
잘생긴 알바생 들어왔으면 좋겠다.
눈이라도 즐겁게요. 그쵸.
주임님 내일은 카페에 같이 가요. 회사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좀 서러운 거 있죠.
맞아…. 잠깐이라도 바깥 바람을 쐬야 일의 능률도 오르는 거라구요.
무시. 안됨.
무시. 안됨.
무시. 안됨.
무시. 안됨.
대만은 직원들에게 이 집 커피 맛있다며 P 카페를 소개한 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장소로 남겨둘 걸…. 그러기에는 너무 회사 옆이긴 하지만…. 우리 건물에 있는 카페를 두고 굳이 가야 하냐는 직원들의 등을 떠민 제 손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 집 커피 맛은 차원이 달라요. 알량방구를 일삼았던 제 입에 바느질을 하고 싶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거의 녹듯이 몸을 기댔을 때, 메시지가 왔다. 태섭이었다.
[화내서 미안해요]
[형이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겠죠]
[근데요, 형…]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거 정말 싫은 거 아니죠?]
하아…. 대만은 이마를 긁적이다 답장을 했다.
[아니야. 그냥. 다른 생각을 해서 그래]
[말을 잘못 한 것 같다. 미안]
답장이 칼같이 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남은 시간도 힘내요]
[조금 있다가 봐요]
하아아……. 깊은 한숨에 직원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대만은 고개를 젓다가 끄덕였다. 그렇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C가 물었다. 다시 고개를 젓다가 끄덕였다. 주임님 이렇게 애매하게 대답하시는 거 처음 봐…. E가 말했다. 저 말에 머리를 싸맸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마음이 너무 애매했다.
11.
송태섭은 정대만의 회사에서 태서비로 불린다. 진급이라면 진급이었다.
대만은 처음에 저 호칭을 들었을 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태섭이를 잘못 부르신 거죠? 이 대답에 A가 해맑게 말했다. 아뇨? 태서비라고 한 거 맞는데요? 그리고 꺄르르. C가 말했다. 너무 귀여워, 태서비. 꺄르르. E가 말했다. 이름도 너무 귀엽잖아. 섭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꺄르르. 저 말에 뒷목을 잡았다. 섭이이이이? 저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호칭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게는 안 부르는데 그쪽이 왜, 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에게 그쪽이라는 말을 하면 파국으로 치닫는 법이었다. 그걸 잘 아는 대만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쪽쪽 빨았다. 겨울에는 따뜻한 것만 드시더니. 언제부터 얼죽아가 되셨어요? 사장의 말에 하하 웃기만 했다. 하하. 하하.
한 번 보고 말거라 통성명을 말하지 않았던 회식 자리에서와는 달리, 두 번도, 세 번도 볼 수 있는 카페에서는 자연스럽게 짧은 대화가 오고갔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던 태섭을 보는 내내 팔짱을 끼고 무표정으로 있다가, 누나라고 불러요! 라는 직원들의 말에 결국 한 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이 입꼬리만큼 마음도 삐딱해졌다. 대답 잘해라. 잘해라, 송태섭. 그 입꼬리와 마음은 A 씨, C 씨, E 씨, 라고 꼬박꼬박 붙이는 태섭의 말에 슬그머니 내려갔다. 기특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걔 아니 태서비는 다시 핫해졌다. 직원들의 이야기 팔할은 태서비가 차지했다. 카페에서 앞치마 하고 있는 것도 멋지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꺄르르. 이런 걸 태섭은 당연히 모를 텐데, 듣는 이야기로 세뇌가 된 건지 직원들과 같이 카페에 갈 때마다 저도 같은 시선으로 태섭을 보게 되었다. 오늘은 어떤 옷, 어떤 반지. 오늘은 어떤 바지, 어떤 시계. 팔뚝 너무 좋지 않아요? (그런가?) 말투 너무 좋지 않아요?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죠) 이런 이야기를 카페에 나오면 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 이골이 난 남직원 B는 이 커피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빠지게 됐다. 대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어 세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낸 뒤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제 얼굴을 보며 인사를 하는 태섭을 보게 되었다. 커피를 주문한 뒤 결제 카드를 주면서 잠깐 스치는 태섭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과 스탬프를 찍느라 잠깐 내린 고개에서 보이는 태섭의 속눈썹은 꽤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태섭을 조금씩 알게 되는 기분은 대만을 자꾸 카페에 가도록 만들었다. 비록 같이 오는 무리들이 시끄럽고, 태서비는 태섭이라는 것을 알려줘야만 하는 꺄르르 군단이었으나(가장 중요), 어떤 것이 계속 떠올랐다. 잊을려야 잊을 수 없는 마음… 같은 것.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런 건, 보이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태섭을 보면 그런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장 오래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저 뿐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보고 싶었다. 어떤 유일함… 같은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대만 역시 그 눈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주 오래오래.
12.
오늘도 고생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오후 5시. 카페에서의 일이 끝났다. 태섭은 앞치마를 풀고 옷과 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사장이 웃으며 카드를 받았다.
정말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맛있는 커피를 공짜로 마실 수는 없어요.
태섭 씨가 일을 잘해줘서 감사의 의미로 주고 싶다고요, 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태섭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만이 본다면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철이 들어서 이런 말도 하냐 라며 헤드락을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한다에 300원을 걸 수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대만 씨 기다리는 거죠?
네.
참 신기해요, 두 사람.
…하하.
보통 남자들 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대만 씨가 그랬어요. 싸우기도 오지게 싸웠다고. 그래서 그런 것 같다고.
재즈가 나오는 카페 안은 조용했다. 태섭은 원두 냄새가 나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옅게 웃었다. 저 말을 했을 대만을 생각하자니,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웃었어요? 아니면, 정색을 했어요?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떤 것이든 좋았다. 제 생각을 하면서 말을 했을 대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어떻게 할 도리 없이 뛰었다.
그렇다는 말은, 두 분 다 성격 장난 아니었다는 거겠죠?
하하.
지금도 현재진행형?
하하….
인정?
태섭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를 생각할 때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된 태섭의 습관을 보는 사장은 말없이 머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윙- 소리와 함께 태섭의 긴 숨이 함께 빨려 들어갔다.
저는 아직도 아닌 척 하면서 참고 있는 편이긴 해요.
오호.
그냥…….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서요.
태섭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깜빡임 속에 대만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6살이 되던 해에 20살이 된 대만을 처음 봤을 때.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선명했다. 앞자리가 바뀌고, 입고 있던 옷이 달라졌을 뿐인데 완전히 어른이 된 것 같았던 그때. 평소처럼 웃고 있는 얼굴도 달라진 것 같고, 손짓이나, 눈빛 모두, 달라진 것 같았을 때. 처음으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간격을 인정하지 못해서 말수가 줄었고. 17살이 되던 해에 21살이 된 대만을 처음 봤을 때는, 화를 냈었다. 어른인 척 굴지 말라면서.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면서. 그때 처음으로 주먹질을 했었고,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대만이 보호자로 왔을 때는 경찰서를 엎을 뻔했다. 저 멀리 가고 있는 주제에 인생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싫었다. 이런 마음도 모르면서 야 태섭아, 닮을 걸 닮아라, 나도 17살에 처음으로 주먹질 했었잖냐. 형이 그렇게 좋냐? 그렇게 형을 따라오고 싶어? 했을 때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겠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서 대만에게도 주먹을 날렸었다. 그렇게 좋냐고? 그렇게 좋았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때리고 부수는지 모르는 대만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빨리 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수고 싶었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일그러뜨리고 싶었다고.
제 생각은 그래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게 어른인 것 같아요.
태섭에게 커피잔을 내민 사장이 말했다.
도리어 10대 때는 숨기는 이유가 많을 때잖아요. 이러면 이럴 것 같아서, 저러면 저럴 것 같아서.
…….
그런데 어른은요. 그걸 드러내는 게 멋있는 것 같아.
…….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그런 척을 했다는 사람인 걸 알게 되면 실망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
그러면서 드러 냈을 때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과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내 인생을 같이 살아갈 사람들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정말 행복한 거고.
…….
굳이 어른처럼 보일 필요가 없어요. 어른이 대수에요? 다 큰 척을 하지만 속은 그대로인 게 어른인 거죠.
…….
어머. 나 너무 꼰대 같았죠.
태섭은 고개를 저었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잔에 담긴 커피가 일렁였다.
그러니까 태섭 씨도 그 사람에게 태섭 씨를 보여 줘요. 그 사람이라면, 이해해줄 거예요.
네.
고개를 끄덕인 태섭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사장은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사장이 스탬프가 찍힌 카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태섭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거. 사장이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대만의 이름이 쓰여진 카드였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칸이 없었다. 이건 대만 씨한테 주시고요. 사장은 또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카페 스탬프 카드였다. 이건, 태섭 씨가 대신 써주세요.
태섭은 고개를 돌려 카페 문을 쳐다보았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만을 떠올렸다. 직원들과 같이 오면 그들이 먼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잡아 주고 있던 팔과, 패딩에 묻혀서 춥다고 중얼 거리면서 직원들이 고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얼굴과, 따뜻한 카페 안의 공기 때문에 패딩을 벗고 셔츠 차림으로 커피 트레이를 받으러 올 때 마주치던 시선과, 직원들과 같이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접히는 눈꼬리를 생각했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 부장. 팀장. 프로젝트. 이런 이야기들. 그런 것들 속, 유일하게 보이는 정대만 같은 것을 그려보았다. 그런 대만을 볼 때면, 어느 날은 16살이었고, 또 다른 어느 날은 17살이었다. 그러면서도, 맛있게 잘 먹었어. 인사를 하는 대만이 어깨를 두드릴 때면 네. 들어가요, 형.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웃었다. 22살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어른 참 어렵네. 맥없는 웃음이 나왔다.
커피와 카드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온 태섭은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펜을 꺼냈다. 아무것도 적힌 게 없는 카드는 원래 있는 글자와 그림들로 가득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삼키는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일렁거렸다. 익숙한 글자로 쓰여진 정대만. 이라고 적힌 카드를 보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이 글자를 썼을 때의 대만을 상상해 보았다. 카드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했을 긴 손가락, 펜을 쥐었을 오른손, 그 손에 작게 남아 있는 흉터들. 부드럽게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서 그립게 깜빡이는 속눈썹. 그것들을 생각하니 긴 숨이 쏟아졌다. 무언가를 토해내는 것처럼. 어떤 마음을 보여 줬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마음 같은 것이 넓게 퍼졌다.
사장님.
네.
저… 얼마나 일하면 라떼 아트 배울 수 있어요?
사장이 웃었다. 귀엽다는 듯이. 내일부터 시간 나면 조금씩 가르쳐 줄게요. 그 말에 태섭이 웃었다. 편안하다는 듯이.
[……큰일났다]
문자가 온 건, 태섭이 카드를 다 적고 난 뒤였다. 줄곧 무표정이었던 태섭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우리 팀장님이… 너 카페에서 알바 한다고 했더니 기념 회식이나 하자고……]
태섭은 눈만 깜빡였다. 메시지 여러 개가 빠르게 올라왔다.
[말이 되냐고 이게]
[카페에서도 회식 할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클라스가 다르겠죠 래]
[클라스는 무슨]
[삽겹살에 소주가 어나더 레벨인가?]
[어떻게 생각하냐?]
[너도 싫지]
[…싫다고 하면 안 될까?]
헛기침이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대만이 들으면 기겁할 말들만 생각났다.
[그 클라스 저는 좋은데]
귀여워
[하면 안 돼요?]
귀여워 정대만
[형 옆에 있으면 형이랑 같이 먹는 거잖아요]
미치겠어 진짜
[같이 먹고 들어가요]
[저 기분 좋아졌어요]
[술 엄청 마시고 싶어요]
너무 좋아해요
대만은 점만 찍어 보냈다. 거기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웃음을 꾹 참느라 봉긋 솟아 오른 볼을 한 얼굴로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좋은 일 있어요? 사장이 물었다. 네. 그리고 제 손으로 쓴 대만의 이름을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정 대 만(아주 작게 눈꼽만하게 그린)♡.
-나와…….
힘이 없어요?
-아니, 그냥…. 어… 없어…….
걱정 마요. 나 있잖아요.
-너 있어서 그런 거거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럼 알려줘요. 그거.
-……?
왜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너? 기분 좋다더니 진짠가 봐?
겉옷을 입고 더플백을 멘 태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 커피잔을 반납하며 사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딸랑. 종소리가 났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불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어? 진짜냐고. 무슨 일 있어? 대만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대만의 회사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아주 가볍게. 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