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 준비 다 끝났냐? 어어, 우리 집은 어머니가… 잠깐만.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직 안 늦,
아 진짜, 두 분 뭐하시는 거예요! 태섭이네 준비 다 끝났다는데!
거실에서 태섭과 통화를 하다 안방 사정을 알게 된 대만은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한 손으로 이마를 붙잡은 대만은 정말 질린다는 표정으로 부친과 모친을 쳐다보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뭐 못할 짓을 했냐는 듯이 쳐다보며 껴안은 팔을 풀지 않는 부모의 파렴치함에 잠깐 할 말을 잃은 아들은 긴 숨을 들이마시며 화를 밑으로 가라앉혔다. 왜 부끄러움은 죄다 내 몫인지. 금슬이 좋은 거에 포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성질이 나는 걸보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두 분, 이러고 있을 때에요? 예? 우리 가족만 밥 먹으러 가요? 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생각은 안 해요? 예에? 대만의 말에 모친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이 어찌나 순진해 보이는지, 뒷목을 잡을 뻔했다. 저 뒷목은 결국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태섭이네도 우리 가족이잖아. 눈빛 만큼이나 순수한 모친의 말 때문이었다. 거기에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부친은 또 어떻고. 대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족? 가조옥? 태섭이 생각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족 아니에요.
누가. 태섭이네가?
네.
가족 아니면 뭐야?
모친의 말에 대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 가족 같은 애가 날 좋아한대요. 좋아한다고 했다고 나를. 근친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 눈동자와 함께 움직였다. 이 생각에 어폐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채로.
…아무튼. 빨리 가요. 준비 끝났대요.
으응, 알았어. 너 잠깐 나가 있어 봐. 빨리 끝내고 갈게.
아, 진짜! …뽀뽀만 해요. 뽀뽀만. 예?
알았어.
씩씩거리며 문을 닫고 나온 대만은 그제야 태섭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깜짝 놀라 핸드폰을 보니 아직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움직이고 있는 통화 시간을 보다 괜히 뻘쭘해져서 뒷머리를 매만지려다 세팅을 했다는 걸 깨닫고 목덜미만 만졌다. 어쩐지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끓어오르려는 속을 한숨으로 달랜 뒤,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미안. 이 말에 태섭은 괜찮아요. 한 마디만 했다. 낮은 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 목소리에 귀가 가려운 기분이 들어서 반대쪽 귀에 핸드폰을 갖다댔다.
-아직 사이 좋으시네요.
너무 좋아서 문제지….
-그런 건 유전인가.
뭐가?
-두 분 아들이 형이잖아요.
그런데. …아. 야. 하지 마. 절대 말 하지 마. 절대로 안 닮고 싶으니까.
-이미 닮았는데요? 조금 다른 걸로.
뭐가. 뭐가! 그거 욕이야. 진지하다.
-형 다정하잖아요.
태섭의 말에 베란다 밖을 쳐다보며 목을 만지고 있던 손이 멈추었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한데, 두 분 다정함을 형도 닮았어요. 목소리가 퍽 상냥하게 들렸다.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만 벙긋할 뿐, 정작 중요한 언어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이게 조금 답답할 법 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건 저만 그런 게 아닌 건지, 태섭 역시 말이 없었다. 눈만 깜빡이다 반대쪽 귀에 핸드폰을 옮겼다. 목을 만지고 있던 손바닥을 허벅지에 연신 문지르며 짧은 숨을 뱉다가, 아직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의 방문을 두드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을 찰나, 그래서 궁금해요. 라는, 조금, 아니, 많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형도 연애를 하면… 형 아버지 같을지.
절대 아닐 걸?
-그런 건 사귀는 사람이 알지 형은 잘 모를 걸요.
…그런가?
대만은 애매하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릿속에 잠깐 사귀다 헤어졌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다정하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연애는 자주 했으나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었다. 그래도 한때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그리고 조금 허무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을 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모친의 어깨를 팔로 부드럽게 안고 있는 부친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나이 때쯤이 되면 나도 저렇겠구나 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얼굴을 아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부친이 물었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뽀뽀만 했어. 진짜야. 모친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 말에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있잖아요.
응. 왜?
아버지 첫사랑이 어머니라고 그랬죠.
어. 왜?
다행이다.
뭐가?
아니에요. 이제 가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면 나도 아버지처럼 한 사람을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말을 꾹 삼키고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태섭아. 대만은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았다. 네, 형. 제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태섭이 말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들은 이 말을 들은 순간, 기분 역시 밝아졌다. 이게 뭐라고. 정말이지 모를 일이었다.
6.
저녁 식사 자리는 늘 그랬듯 화기애애 했다. 이야기의 주된 화제는 태섭과 올해 고3이 되는 태섭의 동생 아라였다. 아라는 어머니와 함께 며칠 뒤에 일주일 정도 해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본격적인 수험 공부를 준비 하기 전에 힘을 내고 싶다는 명분이었다. 그 해외 여행 비용을 태섭이 조금 보탰다. 태섭이 군대 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두 사람의 여행 비용에 보태라고 했다는 말을 태섭의 모친이 했을 때, 대만의 모친은 어머머, 어머머, 소리만 했다. 대만은 큼 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한 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군인 월급이 얼마나 많다고 그 돈을 모았던 건지. 미심쩍은 눈으로 태섭을 힐끔거렸다. 정작 태섭은 늘 그랬듯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다만 볼은 조금 빨갰는데, 저게 불 때문인지 부끄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태섭의 옆에 있는 아라가 오랜만에 오빠 짓을 했다고 말하며 콜라를 마셨다. 해맑게 웃는 아라를 보는 태섭의 눈썹이 조금씩 올라가는 게 보였다. 성질 참고 있네, 송태섭. 대만은 웃음을 참으며 다 구워진 고기를 태섭의 모친 그릇 위에 한 점, 제 모친 그릇 위에 한 점을 올렸다. 고마워, 대만아. 태섭의 모친이 옅게 웃었다. 아니에요. 제 말에 옆에 있던 모친이 어머 얘 왜 부끄러워하고 그래? 하며 어깨를 팍! 쳤다. 진짜, 너무 아팠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은 못하고 맞은 어깨를 쓰다듬으며 입술만 내밀었다. 그러고 있자니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저거에 더 입술이 튀어나왔다. 나 아파. 아프다고. 왜 몰라 줘.
일주일이면 짐 많겠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겨울이라 두꺼운 옷만 챙겨야 할 것 같아서요.
아라의 말에 대만의 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주를 다 마신 대만의 부친은 술이 든 병을 태섭에게 내밀었다. 자동반사적으로 술을 따르려고 했던 태섭이 받으라고 말하며 웃는 대만의 부친을 쳐다보지 못한 채로 두 손으로 받친 잔에 술을 받았다. 대만은 완전히 빨개진 태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태섭은 늘 제 부모에게 깎듯이 대했다. 편하게 해도 된다는 말에도 늘 그렇게 했다. 그래서 당연한 건데. 고백을 들어서 그런지 저 얼굴이 꼭 상견례 자리에서 장인에게 술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걸 깨닫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술 생각이 났다가, 여태 운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지 않아서 물을 마셨다. 그냥 대리 부른다고 할 걸. 이제와서 마시겠다고 하는 게 모양 빠지는 것 같아서 괜히 입만 다시며 잔을 부딪히고 있는 태섭과 부친을 쳐다보았다.
태섭이 아직 면허 없다고 그랬지.
네.
딸 생각은 있고?
네. 어머니랑 아라 여행 가면 공부 하려고요. 학원에 등록은 해놨어요.
그러면 대만이 네가 데려다 줘.
어디를요?
공항에.
대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서로 괜찮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일정을 체크했다. 밤 비행기라고 했고, 회식만 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일정은 없는 날이었다. 도리어 좋았다. 회식을 한다면 핑계를 댈 수 있는 이유가 생겼다. 조금 들떠서 캘린더에 일정을 추가하는 동안에도 태섭의 모친은 정말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유전인가. 태섭의 조심스러운 성격이 어머니를 닮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태섭의 모친에게 일정이 없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며 웃었다. 태섭에게 늘 확실히 말했던 것처럼. 자꾸 거절하시면 저 섭섭해요. 그제야 고맙다고 말하는 태섭의 모친에게 일정이 있었어도 데려다 드렸을 거라는 말을 하자마자 네가 웬일이냐며 제 모친이 어깨를 또 팍! 쳤다. 이번에는 진짜 못 참아서 아파, 엄마 했다가 부친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대만은 심히 억울했다. 아들이 26살이나 됐는데도 아직 애다, 애…. 인상을 오만상쓰며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맞은편에 있는 태섭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저 얼굴 때문에 더 억울했다. 넌 내가 맞고 혼나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오냐고.
여행 비용은 애기가 선물해 줬으니까 내가 애기 좀 챙겨줘도 되는 거지?
뭘 또 챙기려고 그래. 이미 많이 챙겨줬어, 너.
학원 등록비 선물 해주고 싶어. 이미 등록은 했다지만. 미리 알았으면 등록 전에 챙겨줬을 텐데.
태섭은 기겁을 했다. 괜찮다며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정말 괜찮아요. 그 말을 하는 태섭의 얼굴이 새빨갰다. 대만은 그 얼굴을 보면서 팔짱을 꼈다. 모친은 호호 웃으며 태섭이 귀엽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을 듣는 대만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머리 필터는 태섭이어도 귀로 듣는 실제 호칭은 애기였다. 우리 애기 아직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니. 도대체 뭐가. 어떤 면이 아직 애기냐고.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혀로 입술을 축이다가, 빨개진 볼을 긁적이다가 아주 난리가 난 태섭이 저러고 있는 걸 보자니, 굳이 따지자면 이 사이를 중개할 수 있는 사람이 저라는 것에서 태섭이 애기라는 걸 조금, 아주 조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섭이가 괜찮다잖아요.
뭐라는 거야, 얘가. 전역한 태섭이 제일 자주 만난 애가.
그게 왜요?
알바 안 하고 있다며. 그러면 이번에 모아 놓은 돈 거의 다 썼을 거 아니야.
알바 하려구요.
조용히 듣고 있던 태섭이 말했다.
사실 전역하고 바로 하려고 했는데, 안 하고 있었어요.
왜 안 하고 있었어?
바로 알바를 시작하면 어머니가 절 또 챙겨야 되잖아요. 아라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그런가 커서도 어쩜 이렇게 생각이 깊니…….
그것도 그렇고….
대만의 모친과 이야기를 하던 태섭이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놀란 대만이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군대에 있으니까 시간이 제일 아깝더라구요. 그 시간을 좀 메워보고 싶었어요.
어머머… 애기야아…….
저 말을 하면서 저를 빤히 보는 태섭을 대만은, 물끄러미 응시한다. 깊고, 고요하고, 차분한 태섭의 시선은 돌아갈 줄을 모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꽂혀 있어도 볼 수 있는 건 단 하나인 것처럼.
지금 송태섭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걸 유일하게 정대만 혼자만 안다.
대만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달달달달. 그 기척을 느낀 모친이 다리 가만히, 라고 말하며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그러자마자 잡힌 반대쪽 다리를 덜었다. 달달달달. 아들! 결국 모친이 팩 하고 언성을 높였다. 대만이가 군대에 안 가서 그런지, 철이 늦게 드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대만이만큼 철 든 애가 어디있다고 그래. 네 눈엔 그렇게 보이니? 대만이가 우리 아들이라서 그런 거 아니지? 응, 절대 아니지.
대만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분명히 옆에서 말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시선은 송태섭. 송태섭의 시선 역시, 정대만. 어떤 시간이 멈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대만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멈춘 공간에서 시간을 되돌린다. 그 시간은, 태섭이 전역을 했을 때. 그날은 1월 들어 처음으로 눈이 오던 날이다.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어깨 위에 있는 눈을 털고 씩씩하게 경례를 하던 그때. 어서 와라. 다부진 어깨와 등을 꽉 안았던 그때. 막 전역 했음에도 좋은 냄새가 나던 목덜미. 그 향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그 말 역시, 선명했다. 내리는 눈이 조용해서 크게 들리던 그 말.
이제는 형을 시간 상관없이 볼 수 있어요. 매일매일 볼 수 있어요. 보고 싶었던 만큼 보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
7.
비슷한 생활이 계속 되었다. 회사 밖에서 기다릴 거면 한파가 심해졌으니 로비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한 것빼고는 거의 비슷했다. 대만은 여전히 걔로 불리는 태섭의 뒷담화 아닌 뒷담화를 들으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어떤 우월과도 같았다. 그래봤자 걔는 나를 좋아합니다. 말은 할 수 없는 어떤 자신감이 대만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아주 가끔, 이런 게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지루할 만하면 걔 이야기를 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을 했고 퇴근을 해서는 태섭을 만나 같이 저녁을 먹고, 목도리를 돌돌 두르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함께 집에 가고, 집에 다다라 아쉽다는 시선을 보내며 잘가라는 태섭의 배웅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하루. 분명히 태섭이 망가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나름대로의 형태를 갖추고 잘 굴려갔다. 이제는 이것이 대만의 일상이 되었다. 태섭이 전역을 하기 전처럼,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굴려가는 어떤 일상. 제 마음이 어떤 형태인지는 아직 몰라서 어떤 형태로 모가 났는지 알 수 없는 그런. 태섭이 알바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태섭의 모친과 아라를 공항까지 데려다 준 다음 날,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태섭이 말했다. 형. 저 알바 시작하려구요.
어. 찾아 보려고?
찾아 봤어요.
언제?
형 기다리면서요. 이곳 저곳 찾아봤어요.
그날 저녁은 칼국수였다. 매운 칼국수를 하는 집으로 유명한 곳인데, 둘 다 매운 걸 잘 못먹어서 순한 칼국수를 주문해서 호로록 먹었다. 대만은 잘먹는 태섭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먹다가도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먹는 태섭을 보면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조금씩 먹어. 제 말에 두 눈을 깜빡인 태섭은 입 안에 있는 음식을 다 삼킨 뒤에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군대에서 먹는 게 습관이 됐나 봐요. 이 말에 마음이 약해진 대만이 만두를 주문했다. 만두 먹고 싶었어요? 태섭이 대만에게 휴지를 건네며 물었다. 태섭에게 받은 휴지로 입 주변을 닦은 대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시킬 걸. 태섭이 대만의 그릇에 칼국수를 덜어주며 말했다. 맨투맨 소매를 걷고 있는 태섭의 팔에는 흉터가 많았다. 그 흉터들을 보면서 말했다. 나중에 볶음밥도 먹을 거지? 대만의 말에 태섭이 빵 터졌다. 맛있으니까 먹어야 돼. 많이 먹자. 태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네. 형. 많이 먹어요.
그리고 볶음밥을 먹으면서 알바 이야기를 했다. 조금 바삭한 볶음밥을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어디서 일하는데?
형 회사 옆에 있는 P 카페에서요.
아. 거기 커피 맛있는데.
그런 것 같아서 지원 했어요.
어?
형 회사 건물에 있는 카페에 안가고 굳이 옆 건물에 가잖아요.
알고 있었어?
불을 끈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다 못마셨다고 테이크 아웃잔 들고 나오잖아요. 그때마다 똑같은 컵이었어요. 그 말을 한 태섭은 잠깐만 기다리라며 숟가락을 들었다. 많이 뜨거울 것 같으니까 먼저 먹어볼게요. 몇 번 후후 불고 먹더니, 제대로 바삭하게 됐다며 웃었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식은 뒤에 먹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물잔에 물을 채운 태섭이 저를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커피 어떻게 내리는지 노하우 다 알아낼 거예요.
스파이냐?
뭐, 그런 걸로 쳐요.
누가 저렇게 순수하지 못한 이유로 알바를 시작하냐? 카페 사장이 꿈이었냐?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 거기 단골이라서 사장님이랑 친해. 너 그런 거 내가 다 말할 거야. 태섭이 조용했다. 실컷 떠들던 대만이 머쓱해서 하던 말을 멈추었을 때, 빤히 보고 있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저 시선에 더 머쓱해져서 숟가락을 들었다. 말을 하지 않는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보이는 것 같았다. 말은 보일 수가 없는 건데, 태섭의 눈을 보고 있자면 다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알게 되는 말들은 오랫동안 남았다. 듣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는 핑계로 조금씩 천천히 먹었다. 남은 칼국수 국물과 같이 먹으니 또 맛있었다. 대만은 너무 배가 부르니 천천히 나가자고 했다.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인 태섭은 걷었던 소매를 내렸다.
그런데 신기하다.
뭐가요?
그 카페 있잖아. 엄청 유명해서 알바 공고 뜰 때마다 빨리 마감 된다고 그랬거든.
태섭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자리를 뚫은 거잖아. 신기하다.
저 말에는 웃었다. 대만이 왜 웃냐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태섭이 말을 조금 망설이다 대만을 쳐다보았다. 정확하게 대만의 눈을, 빤히.
형은 우연을 믿어요?
어. 왜?
그러면 그 우연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믿어요?
글쎄. 우연은 그냥, 우연 아닌가. 자연스러운…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해요?
어.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만들 수도 있는 거요.
음….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지개를 켰다. 우연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떤 타이밍이 맞는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했을 뿐인데. 아무 말 없는 태섭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거 말고 다른 거 또 해요.
두 개나 하냐?
금세 화제를 전환한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O 헬스장에 트레이너로 있는 선배가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서요. 직원이 갑자기 그만 뒀나봐요.
음…. 느리게 고개를 깜빡이던 대만이 시선을 피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는데?
헬스장은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카페는 10시부터 5시까지요.
나보다 더 바쁜데?
걱정 마요. 지금처럼 형이랑 같이 저녁 먹고 집에 갈 수 있어요.
…아니. 누가 그걸 걱정했대? 아니거든?
태섭이 낮게 웃었다. 그럴 수록 대만은 태섭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는다면 태섭이 여태 하고 있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알아채고 말을 했지만. 그 말에 확신을 주고 싶지 않았다.
가게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그새 더 추워졌다. 대만은 어깨를 으쓱이며 목도리 안으로 입을 감추었다. 날이 추워도 너무 추웠다. 따뜻한 걸 먹고 나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더 추울 뻔했다며 가방을 고쳐 맸다. 태섭은 귀 끝이 잔뜩 얼은 채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뭔가를 깨닫고 가방을 열었다.
자. 이거 껴.
형은요?
나는 괜찮아. 코트 입은 너보다는 따뜻해.
태섭은 장갑을 보면서도 선뜻 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해서 코트 주머니 안에 있는 태섭의 손을 꺼냈다.
멋부리다가 얼어 죽는다. 알겠냐?
…….
너 우리 직원들이 멋있게 입고 온다는 말 때문에 얇게 입고 오는 거 아니지? 그럼 혼난다.
…….
목도리도 너 해.
이건 괜찮아요.
난 패딩 이잖아. 지퍼를 끝까지 올리면 눈까지 가릴 수 있어. 볼래?
장난스럽게 웃으며 목도리를 푼 대만이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졸지에 대만이 사라졌다. 봤지? 대만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태섭은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손에 쥔 목도리를 꼭 잡았다. 그것이 대만의 손인 것처럼. 그러고 지퍼를 내리는 대만과 눈이 마주쳤다. 야, 목도리 안하고 뭐하고 있냐? 잔소리를 오지게 들었다. 네가 애냐? 어? 우리 엄마가 애기라고 한다고 진짜 애기인 줄 아는 거냐고. 뽀얀 입김이 쏟아졌다. 그 입김 때문에 대만이 뿌옇게 보였다. 군대에 있을 때, 꿈에서 봤던 것처럼. 그래서 일까. 앞에 있는데도 울컥했다. 이렇게, 진짜, 내 앞에 있는데도.
형.
오냐.
좋아해요.
태섭은 이 간절함을 알아 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대만의 수많은 우연이 되고 싶었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가장 되고 싶은 건, 대만이 생각하는 우연. 그 우연처럼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
…뭐냐, 갑자기.
갑자기 말하고 싶어서요.
……시끄러. 아무 말도 하지 마.
갑자기 이러고 싶을 때, 말하면 안 돼요?
야 너 자꾸 나한테 물어보고 뭐 하려고 하지 마.
그럼 안 물어보고 해도 돼요?
아씨. 하지 마.
알았어요. 안 물어보고 할게요.
하지 말라고.
그래도 좋아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해서 다행이네요.
…네 마음인데 내가 어쩔 건데.
그럼 내 마음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면 해 줘요?
대만은 태섭을 싸늘하게 쳐다본 뒤,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형. 같이 가요. 그 말을 무시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지퍼를 코 끝까지 올렸다. 송태섭 이 놈 완전 미친놈이었다. 뭐 저런 느끼한 말을 해. 연애 시절에 나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다. 어찌나 힘을 줘서 걷고 있는지 쿵쿵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 발을 굴렸다. 어떤 소리가 계속 들려서였다. 지퍼를 올려서 그런지 몸 안이 금세 뜨거워졌다. 뒤따라 오는 발자국 소리가 일정했다. 따라잡을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는 발걸음에는 어떤 의도가 느껴졌다. 그 의도를 무시하려고 못 들은 채로 계속 걸었다. 곧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그러다 깨달았다. 같은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 같은 정류장에서 내린다는 것. 하…. 긴 한숨을 뱉으며 걸음이 느려지던 찰나에 태섭이 말했다. 형, 나 추워요.
너 내일부터 돌돌 싸매고 와라. 알겠냐?
네.
내 앞에서 춥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해 봐 가만 안 둬.
네. 형.
잠깐만 있어 봐. 핫팩 있었던 것 같은데….
태섭은 가방을 뒤지며 꼼지락 거리는 대만을 보면서 목도리 안에 입술을 숨겼다. 목도리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옆으로 타야 할 버스가 보였다. 조금만 뛰면 정류장이었고, 버스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대만은 여전히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분명히 있었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대만이 전광판 안내 방송을 들을 까봐 근데요 형, 하고 말을 건넸다. 어. 왜? 대답하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금세 빨개진 대만의 손가락 끝을 보면서 버스가 빨리 가기를 기도했다. 타는 사람이 적기를. 내리는 사람이 적기를. 조금만 더 같이 있을 수 있기를.
어. 버스 왔다.
뛰자.
출발했어요.
…….
방금 봤어요.
…….
진짜예요.
대만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렇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었다. 대만에게 부러 말하지 않았다. 대만이 생각하는 우연은 소리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것으로 있고 싶었다. 그러면 오래오래 같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원이 조금 늦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원래 가장 되고 싶은 건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서 대만의 옆에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좀 더 세게 흔들어, 그래야 빨리 따뜻해져. 대만이 툴툴거렸다. 옆에 있는 걸로 이미 따뜻해 진 건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답했다. 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