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04

태섭대만

7







13.


 태섭이 온다. 눈이 마주 치자마자 꾸벅 인사를 한다. 그런 태섭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뉘었다. 반가워 죽겠다는 사람(A, C, E aka 꺄르르)파, 덜 반가운 사람(B, 대만, 팀장)파. 각 파의 수장 A와 대만의 얼굴도 선명히 갈렸다. 그러나 태섭은 덜 반가운 사람파에 가깝게 섰다. 처음부터 인사도 대만에게 했다는 것처럼 오자마자 찰싹 붙어서 직원들과 인사를 했다. 대만은 여기에 마음이 좀 풀어졌다. 직전까지 직원들에게 시달려 100까지 간 피곤함이 80쯤 줄어든 것 같았다. 큼 소리를 내며 헛기침을 했다. 가시죠. 손짓을 했다. 이러면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안 간다. 정확히는, 반가워 죽겠다는 사람들이. 태섭의 옆에 쪼르르 서서 간다. 도합 5명의 사람이 길거리를 장악하게 된 셈이다. 80까지 내려간 피곤함이 서서히 오르는 게 느껴졌다. 퇴근 길이라 사람이 많아서 5명이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태섭 역시 바로 물러서며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란히. 그러다 물러나고. 그럼 또 태섭이 물러서고. 끈질기게 제 옆으로 오는 태섭 때문에 목도리 안으로 입을 숨겼다.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볼까지 숨겼다. 추워요? 태섭이 물었다. 아니. 짧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태섭의 얼굴은 조금 말랑해보였다. 


 아직 기분 좋냐?

 네.

 왜?

 형이랑 같이 저녁 먹으니까요.

 둘이서만 먹는 거 아닌데?

 형 옆에 있으면 형이랑 같이 먹는 거라니까요.


 이상한 논리였다. 처음 문자를 봤을 때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납득하고 싶었다. 


 만날 먹는 저녁인데 뭐 좋다고….

 그럴 때 있잖아요.

 어떤 때?

 같은 거라도 오늘은 더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때요.


 건물마다 사람들이 더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로 5명의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뉘게 되었다. 대만은 제 옆으로 붙는 태섭과 함께 걸으며 앞서 가기 시작하는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에게 치여 점점 더 멀어지는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그냥 다른 데로 가버릴까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계속 생각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한다면 그건 이상한 게 아니지 않을까. 앞을 보고 있는 태섭을 힐끔 거리면서 패딩 주머니 안에 넣은 손을 꽉 쥐었다. 이런 생각까지 이상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늘 하는 이야기조차 할 수가 없어서 조용할 때쯤, 태섭이 입술을 열었다. 입을 열자마자 입 안이 따뜻 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뽀얀 입김이 나왔다. 


 형. 

 어.

 우리 그냥 다른 데로 갈까요?


 태섭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뽀얀 입김이 선명했다. 대만은 그 입김과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두 눈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진지한 얼굴을.


 농담이에요.

 …….

 얼른 가요.


 대만은 조금씩 빨리 걷는 태섭을 뒤따라가며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송태섭도 했던 생각이면 내가 했던 생각은 이상하지 않다는 건데. 농담이라고 말하는 태섭은 납득이 안 됐다. 뒤돌아보는 태섭의 귀 끝이 빨갰다. 그 귀를 보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 때문에 귀 끝이 빨개졌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아직 너무 추웠다. 어깨가 부르르 떨릴 만큼 추워서 같이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다음 말도 준비했다. 옆에 붙어 있으면 안 춥잖아. 그 다음에, 진짜 농담이었냐고 물어봐야지.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대만이 입을 연 찰나, 태섭이 옆으로 왔다. 잠깐 앞서 간 건 실수 였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태섭이 물었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아니었다고 했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꾹 삼킨 말을 모르는 척하며 왼쪽으로 길을 꺾었다. 꺾어도 익숙한 길이 나왔다. 꾹 삼킨 말 역시 익숙한 마음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다. 언제든 물어볼 수 있도록.




14.


 잠깐만.


 대만은 가게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섭의 손목을 잡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태섭을 보자마자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태섭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놀란 듯한. 조금… 의외인 듯한. 이렇게 잡았던 적이야 많은데, 태섭이 고백을 한 이후에는 이런 적이 처음인가. 할 말이 있어서 잡았던 건데, 그 자리에 다른 게 들어왔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태섭이었다. 왜요? 평소와 똑같은 말투였다. 큼 하며 헛기침을 한 대만은 숨을 골랐다.


 무례한 질문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술 들어가면 안 될 수도 있어.

 …….

 그러면 기분 나빠 하지 말고. 그러려니 해.


 저를 빤히 쳐다보는 태섭은 무표정이었다. 분명히 시선은 닿아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보이는 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목울대. 무언가를 삼키는 것처럼 움직이는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이더니, 그제야 태섭이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표정이 조금 들떠 보였다.


 네. 형.

 장난 아니야. 진지해, 나. 술 못 마실 것 같으면 적당히 넘겨. 억지로 안 마셔도 돼. 

 네.

 만약에 누가 주사 부리면 받아주지 마. 그런 거 받아주는 거 아니야.

 걱정 마요. 적당히, 잘 할게요. 형도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어.


 확실히 오후에 카페에서 만났을 때보다 느낌이 다르다. 대만은 그런 태섭을 힐끔거렸다. 기분이 좋다고 한 것과 연관되어 있을까. 그걸 알 수가 없어서 힐끔거리기만 했다. 들어가요. 문을 열어주는 태섭은 가벼운데 단단해 보였다. 마치, 어떤 관문을 넘은 사람처럼. 그렇다면, 무엇을 넘은 걸까. 이런 태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하고 있냐는 타박을 들으며 가게로 들어갔다. 자리로 가자마자 둘이 뭐하다 이제 오냐는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옆자리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삼겹살과 목살 각각 3인분과 소주와 맥주 각각 두 병씩 주문했다. 대만은 고기보다 먼저 나온 술을 따기 전에 직원들에게 엄포를 늘어놓았다. 태섭이 주량 한 병이에요. 한 병 입니다. 한 병. 세 번이나 강조했다. 옆에 앉은 태섭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든 말든, 한 번 더 강조했다. 한 병. 우리 회사 사람 아니에요. A가 꺄르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씩! C가 말했다. 근데 그때 술 잘 드셨는데? 안경을 치켜 올리며 말하는 C의 눈이 매서워졌다. 잠깐 당황했으나 평정심을 잃지 않은 대만은 태연하게 넥타이를 끌르며 말했다. 그때 기억 안나세요? 취해서 B 씨가 택시 태워 보냈었잖아요. 이 말을 하면서 B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이 술자리의 주체가 태섭이 되어서 재미 없을까봐 노심초사했던 B는 대만과 눈빛 교환을 한 후, 크게 박수를 쳤다. 맞아요, 맞아요, 그때 제가 잘 태워서 보내 드렸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B의 말에 E가 박수를 쳤다. 맞아요, 맞아요, 언니 그때 내가 택시 번호 알려 달라고 그랬었잖아요! C의 가느다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 대만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때 택시를 태워서 보낸 건 대만이었으나, 모두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억 할 리 만무했다. 자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먼저 집에 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팀장은 그래요 그래요 그래도 축하는 해야지. 라며 소맥부터 마시자고 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나 주량 세 병인거 알잖아요. 왜 거짓말을 해요? 


 속삭이듯 묻는 태섭 때문에 진심 섞인 한숨이 쏟아졌다.


 그래야 살아서 돌아갈 수 있어.

 네?

 아까 전화할 때 힘이 없냐고 물었지. 진짜 없었어 이거 때문에. 아니 이 사람들이 너한테 사회의 참맛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두 분 무슨 대화를 그렇게 은밀하게 하세요?

 둘이서만 이야기 하는 거 금지! 노노노노!


 태섭의 옆에 있던 A가 태섭의 어깨와 팔을 톡톡쳤다. 그걸 본 대만의 눈이 가자미가 됐다. 주변을 살피던 대만은 의자를 옆으로 당기며 태섭에게 제 쪽으로 붙으라고 했다. 오라는 손짓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한 태섭이 입술을 꾹 다물며 의자를 당기려다, 대만의 옆에 붙어 있는 B와 눈이 마주쳤다. 가만 보니 대만이 B와 거의 붙어 있었다. 태섭의 눈썹이 단 번에 올라갔다.


 이쪽으로 와요.

 네가 와.

 오라고요.

 네가 오라니까?

 

 가만히 있다 태섭에게 난 지금 당신의 위치가 마음에 안 들어 눈빛을 받은 B가 말없이 대만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태섭은 대만의 옆으로 의자를 당겼다. 그제야 올라간 눈썹이 차분히 내려왔다. 자리가 마음에 드는지 대만 역시 편안한 얼굴로 태섭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 잔을 받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대만의 옆에, 찰싹. 붙어 있지 않은 쪽 간격, 있음. 역시 첫 술이 최고였다. 캬. 원샷을 하고 잔을 털었다.

 텐션 미쳤다. 대만은 혀를 내둘렀다. 미쳤다, 진짜. 술을 정말, 끝도 없이 주문하고 끝도 없이 마셨다. 누가 보면 송태섭이 신입으로 들어온 줄 알겠다. 쌓여가는 술병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왜 이렇게 마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새로운 사람 한 명이 있어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지만, 태섭과는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이 아닌데 왜이렇게 분위기가 좋은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물론, 꺄르르 군단의 역할이 컸지만……. 꺄르르 군단의 얼굴이 빨갰다. 저 얼굴은 마실 만큼 마셨다는 거였다. 저기서 조금만 더 마시면 다음 날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할 거다. 문제는 태섭이었다. 대만은 얼굴을 빼꼼 내밀어 태섭을 살폈다. 태섭의 볼이 빨갰다. 


 괜찮냐? 


 어깨를 툭툭 치며 조용히 물었다. 저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술 엄청 마시고 싶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폭탄주를 연달아 그것도 빨리 마셨더니 술이 좀 빨리 취한 모양이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어떻게든 태섭이 취하지 않게 만드려고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다 보니 태섭 보다는 덜 취한 듯 싶었다. 태섭은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툭툭 치며 물었다. 괜찮아? 좀 간지러운 건지 어깨를 움츠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한 번. 어쭈.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농구공을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이던 송태섭. 집에 데려다 주면서 내일 또 보자는 인사를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던 송태섭. 어릴 때의 상징과도 똑같은 끄덕임에 가슴 한편이 조금 간지러웠다. 그때의 송태섭 정말 귀여웠는데. 대답이나 이야기를 잘 하려고 하지 않은 시기를 거쳐서 꼬박꼬박 네. 아니면 네. 형. 까지 오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것도 빨개진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서. 이거 송태섭 술버릇인가. 이런 거면 술을 좀 먹여보고 싶었다. 문득 태섭의 술버릇을 모르고 있다는 게 조금 억울했다. 전역 하고 나서 제대로 마셔볼 걸. 왜 그러지 않았는지는 대만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러고 있는 태섭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와 이야기를 할 때는 무표정한 얼굴을 슬쩍 풀고 중얼거리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는 다시 무표정해진다. 나한테만 보여주는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웠,

 ?


 자 그럼 두 번째 취조 들어가겠습니다아.


 A가 숟가락을 꽂은 소주병을 흔들었다. 테이블에서 박수가 나왔다. 그 중에 대만은 혼자 얼굴을 오만상 찌푸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 지금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 테이블이 흔들려 잔에 있는 소주가 일렁거렸다. 그 소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게 뭐든지 볼 수 있는 유리 구슬도 아닌데. 

 취조에 들어가겠다는 말만 하고 난리가 났다. C의 핸드폰을 보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무언가를 적어 온 모양이었다. 하고 있던 생각 때문에 피곤했던 대만은 저 모습을 보자마자 급격하게 기가 빨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저런 걸 언제 준비한 거야…. 생각을 하기도 싫었다. 이미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술을 홀짝이고 있는 송태섭 생각을. 이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도대체 뭘 보고 내 생각만 한다고 한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태섭이 지금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감동이라고 할 것이다. 백프로였다. 오천원을 걸 수 있었다. 괜히 심란해서 짧은 숨을 뱉은 뒤 소주를 마시는데,


 애인 있어요?


 E의 말에 사레가 걸릴 뻔했다. 저 질문이 뭐라고 심장이 뛰었다. 그것도, 쿵쾅쿵쾅. 잔을 입에서 뗀 대만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두 눈을 굴리며 다시 소주를 마셨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아서 마셨다. 그랬는데.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요?

 있어요.

 풉, 컥, 켁, 으으.

 괜찮아요?


 결국 사레가 걸렸다. 태섭이 능숙하게 휴지를 건넸다. 입을 다 닦자마자 물잔을 건넸다. 그 물을 마시며 제 등을 두드리는 태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전보다 덜 빨갰다. 소주 3병이 주량이면 술도 빨리 깨는 모양이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갈 뻔해서 물을 두 잔이나 마셨다. 태섭이 또 물었다. 괜찮아요? 대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크게 한 번. 태섭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한 번. 물을 연거푸 들이마셔서 좀 살만해졌다 싶었는데.


 고백은 했어요?

 네.


 대만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니. 분명히 송태섭한테 묻고 있는 건데 내가 왜 이러냐고. 내가. 태섭과 붙어 있는 오른팔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애인이 없다고요?!

 차였어여어어어?!!!

 잘 모르겠어요.

 예에에에에에에에?!?!!!

 꺼지라고는 안 했거든요.


 제발……. 테이블 아래에 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 미친놈이 지금 어디서. 이게 어디가 적당히 하는 거냐고, 이게! 말을 할 수 없으니 눈으로라도 알려줘야 했는데,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꺄르르 군단이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쳐도 태섭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라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술을 마셨다. 소주가 아니라 몇 십년 묵은 귀한 술인 줄 알았다. 어찌나 천천히, 홀짝거리며 마시는지, 술이 성인군자로 만든 줄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채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여유로움을 유지하는 걸보니 말 다했다. 말을 하지 않아서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좀 더 강하게 재촉 하기 시작했다. 좀 더 이야기해봐요. 네? 연애 상담 쌉가능. 연애 경험 유! 연애 경험 다! 정말, 진심으로, 정말로, 너무나, 피곤했다. 할 수만 있다면 태섭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너 인마, 너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내가 궁금하다, 내가!


 괜찮아요.


 소주를 세 잔 마신 뒤 하는 말이 저거였다. 대만은 그제야 태섭을 쳐다보았다. 


 내 마음을 알고 있잖아요.


 태섭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을 읽는 것처럼. 어떤 문장을 보는 것처럼.


 알아도 옆에 있어 주잖아요.


 이건 꼭, 오랫동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괜찮아요.


 배를 누르면 사랑해 라고 말하는 인형처럼. 뚜껑을 열면 같은 노래가 나오는 쥬크박스처럼. 바꾸지 않으면 매일 아침 듣게 되는 기상 알람처럼.

 태섭의 말에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A는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은 채로 태섭을 보고 있었고, C는 말없이 술을 마셨으며, E는 어쩜 그럴 수가 있냐며 혼잣말을 했다. B는 같은 남자지만 정말 멋진 것 같다며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했으며, 팀장은 진정한 남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서 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섭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섭은 그 시선을 알면서도 눈 한 번 맞춰주지 않았다. 이러면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 괜찮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그리고 그런 나는.


 진짜 그런 걸로 괜찮냐?


 최악이다.


 만날 못 참아서 욱 하는 거 잘하면서.


 정말로 내가, 내 생각만 하면서 지낸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고, 형편 없이 느껴졌다. 이런 걸로 고작 너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게. 


 진짜 그거면 돼서 좋아한다고 한 거냐?


 너는 나를 어디까지 알고 있어? 어디까지 보고 있어? 내 깊숙한 곳도 보여? 그곳도, 보고 있어?

 그제야 태섭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태섭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 만큼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입술을 빤히 보았다. 몇 번이고 깜빡이는 눈을 빤히 보았다. 에이, 갑자기 왜 이러세요 주임님…. 맞은 편에 있는 C가 말했다. 기껏 고백 했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안타까워서 이러시는 거죠…? C 옆에 있던 E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주임님. 옆에 있다잖아요. 그 사람이 태섭 씨를 보고 있다잖아요.

 …….

 그러면 언젠가 그 사람도 알 거예요. 태섭 씨가 얼마나 본인을 좋아하는지.


 B가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못하는 건 태섭과 대만, 두 사람 뿐이었다. 서로를 빤히 보고 있는 눈동자에 마음이 비쳐보였다. 그제야 그 무게가 느껴졌다. 분명히 다르지만, 비슷한 성질을 가진 어떤 마음의 무게가. 한없이 무거운 어떤 것이, 누가 더 무거운지를 잴 수 없을 만큼 잡아 당기고 있어서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15.


 어우, 무거워.


 집으로 들어온 태섭은 저에게 완전히 기대어 뻗어버린 대만을 조심스럽게 소파에 뉘인 뒤, 허리를 폈다. 완전히 술에 취한 사람은 물에 젖은 스펀지 같구나. 긴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신 뒤, 거추장스러운 옷과 가방을 벗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대만의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니,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대만이 형이 술을 많이 마셔서 좀 깨운 뒤에 보내야 될 것 같아서요. 늦을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술을 많이 마셨어? 무슨 일 있었어?

 …일이 힘들었나 봐요.

 -으응. 그럴 만해. 걔 발표할 피피티 준비 때문에 집에서도 일하고 그랬거든.


 그 말에 밖을 보고 있던 태섭을 고개를 돌려 대만을 쳐다보았다. 집에서는 일 하지 말라고 그래도 중요하다고 해야된대. 스트레스가 쌓였나 보구나. 그 말을 들으면서 대만의 앞에 섰고. 걔 지금 자고 있지? 다리를 굽혀 대만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며. 안 일어나면 깨우지 마. 내일 토요일이잖니. 자게 놔둬. 완전히 주저 앉아 고개를 숙였다.


 -너는 많이 안 취했어?

 다 깼어요. 괜찮아요.

 -호호…. 데리고 오느라 힘들었지.

 아니에요.

 -내일 같이 해장 해. 아참. 알바 하러 간다고 그랬지.

 괜찮아요. 내일은 헬스장 쉬어요.

 -다행이구나. 데리고 오느라 수고했어, 애기야.

 아니에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쉬세요. 

 

 전화를 끊었다. 금세 조용해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표정이 없어진 얼굴로 대만을 쳐다보았다. 

 대만이 피피티 준비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안 중요하다고 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늘 같이 저녁을 먹었으니까. 형은 야근 같은 거 안 하냐고 물으면, 나는 제 시간 안에 하는 일을 다 하는 우수 사원이라서 그런 거 안한다고 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하면서 걱정 하지 말라며 웃었다. 그랬다고, 정대만이. 

 기대는 양날의 검과 비슷했다. 그래서 휘두르지 않는 쪽으로 쓰자고 생각하며 묻어 두었다. 잘못 휘둘러서 내가 베이기라도 하면. 가만히 있는 대만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실망하기 싫어서 되도록이면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장 대만을 깨우고 싶었다. 깨워서 물어보고 싶었다. 나한테는 그렇게 이야기 안 했잖아요. 괜찮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랬냐고. 왜, 그렇게 했냐고.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대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두를 타는 것 같았다. 아파. 형. 나 아파. 그러니까 일어나서 말 좀 해 봐요. 

 끄응……. 대만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불편한 모양이었다. 태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결국 또 솔직해지지 못한다. 퇴근 후 대만을 만나기 전까지 했던 다짐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고백한 걸로 끝내자고 생각한 마음을 찾고 싶었다. 그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눈시울을 모르는 척하며 떨리는 손으로 패딩 지퍼를 열었다. 형. 일어나 봐요. 꽉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엄청 무거운데 움직이라는대로 움직이는 대만이 신기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정대만은. 정대만에 관한 한 도무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태서바.


 대만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어찌나 천천히 뜨고 있는지, 무거운 중력에 저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태섭은 긴 숨을 뱉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야.

 왜요.

 ……왜 대답을 안해.


 주사 받아주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 누가 지금 이러고 있네. 마른 세수를 했다. 야…… 송, 태섭……. 안타깝게도 태섭은 제 이름을 부르는 저 목소리를 모르는 척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네. 형.

 목말라…….


 이 진상, 진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어쩔 수 없어서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기다려요. 물 가져 올,

 …….

 …술 깼어요?

 …….

 형.

 …….


 제 힘으로는 움직이지 못하던 대만이, 태섭이 일어나자마자 손목을 낚아챘다. 태섭은 그 자리에 굳어 대만을 내려다보았다. 대만은 태섭의 손목을 잡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 생각이 괴롭다는 것처럼 머리를 저었다. 그걸, 태섭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진짜…… 그거면 돼서 좋아한다고 했어……?


 그저 느꼈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뜨거운 손을. 제 얼굴을 느리게 응시하는 눈동자를. 그 눈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제 모습처럼 보였다. 꿈에서 뿐만 아니라, 보고 있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볼 때가 있었다. 너무 보고 싶으면 그랬다. 너무 좋으면… 그랬다. 당신은 어느 쪽일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니요.

 

 듣고 싶은 대답을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형이랑 손을 잡고 싶어요.

 ……. 

 손을 잡고 걷고 싶어요.

 …….

 사소한 걸로 연락하고 싶어요.

 ……. 

 형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 

 형이 나를 궁금해 했으면 좋겠어요.

 ……. 

 형의 모든 순간들마다 인사를 하고 싶어요.

 ……. 

 그리고 마지막에는……

 ……. 

 보고 싶었던 만큼,

 ……. 

 보고 싶을 만큼…

 ……. 

 ……키스를 하고 싶어요.


 이거…… 꿈 맞지? 이렇게 물어보기를. 그러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