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북산의 정대만이냐?
입학 후, 대만은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중학 MVP 라는 수식어만 익숙했지 북산의 정대만이라는 수식어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과에서는 이미 유명인사라고 했다. 대만은 머리를 매만졌다. 그래서 입학식에서 시끄러웠던 건가? 입학식에서 과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찾아 갔을 때, 저를 보며 쑥덕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만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농구부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농구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알아봐주다니. 산왕 놈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또 실감이 됐다.
새로운 분위기, 사람들, 장소. 대만은 오랜만에 느끼는 어색함이 낯설었다. 농구부에 등록을 하러 가기도 전에 농구부에서 왔다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입부 신청서를 썼다. 전국 제패는 이제 꿈도 아니다! 작년에는 아깝게 2위를 했지만 이제는 1위도 가능하다! 선배들이 외쳐댔다. 대만은 속으로 웃었다. 채치수가 위에서 조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놈도 상황 정리를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최강인데. 선배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만은 주변을 살폈다.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혹여나 신경전이 있지는 않을까 했지만, 당장은 없어 보였다. 뭐, 지내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대만은 이 흐름에 일단은, 제 몸을 맡기기로 했다. 1학년은 까라면 까야했다.
농구부에 입단을 하고 처음 연습하던 날. 대만은 드디어 깨달았다. 이곳이 북산이 아니라는 것을. 채치수도, 권준호도, 시끄러운 강백호와 서태웅 그리고, 송태섭도 없다는 것을. 농구를 하자마자 부재가 확인이 되다니. 대만은 제 순서를 기다리며 농구공을 튕겼다. 그러다, 불쑥 떠오른 이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농구공을 꽉 잡았다.
송태섭.
대만은 이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뭔지 모를 기분이 저를 덮쳤다는 것을 느꼈다. 이 기분은 한동안 계속됐는데 결국에는, 태섭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단숨에 바꾸고, 부모님에게나 전화하는 효자 노릇을 하게 만들었다. 대만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외우다시피한 전화 번호다. 누르기만 하면 되는데. 대만은 차마 태섭의 전화 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태섭이 알게 된다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지금 뭐하는 거냐고 캐물을 게 뻔했다. 그 얼굴이 너무 선명했다. 너무 선명해서 도리어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송태섭과 떨어졌다는 것을.
일상에 너를 데려오는 방법
02
만약에 송태섭이 왜 전화를 안 했냐고 따져묻는다면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과제 때문이라고. 대만은 제 옆에 쌓아둔 서적들을 노려보며 책상에 이마를 갖다댔다. 진짜 죽을 것 같다. 농구가 아닌 다른 거에 기력을 쏟고 있자니 좀이 쑤시고 동시에, 미친듯이 지쳤다. 이건 농구를 하면서 지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냥 자고만 싶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게 됐다. 마음이 심란해서 농구공을 가지고 나온 어느 날 밤, 산왕의 이명헌과 같은 대학이라는 것을.
“…너?”
“……북산, 정대만이다 뿅.”
코트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이명헌이었다. 대만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이 학교였냐?”
“응.”
“그런데 왜 농구부에 입단을 안 했냐?”
“사연이 있다, 뿅.”
미친. 저 말투를 듣고있자니 산왕과의 경기가 생각났다. 저 새끼 때문에 송태섭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었다. 대만은 명헌을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쳐다봤다. 명헌은 그런 대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하던 농구를 마저했다. 대만도 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명헌을 뒤로 하고 반대편 골대에서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힐끗거리며 서로 의식을 하기는 했지만 서로의 농구를 방해하지 않다가, 대만이 먼저 명헌에게 공을 던졌고 자연스럽게 원온원을 하게 됐다. 과연, 이명헌이었다. 태섭이 유일하게 경기가 끝난 후 지쳐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게 만든. 이런 가드를 뚫었다니, 송태섭 너도 참,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명헌에게 공을 빼앗겼다. 생각이 너무 많다 뿅. 명헌이 중얼거렸고 그 말에 대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공 한 번 뺏지 못하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코트에 눕고 말았다. 지쳐 헉헉대는 저와는 달리 명헌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이 새끼 진짜 뭐하는 새끼지? 대만은 땀에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농구공을 튕기고 있는 명헌을 쳐다보았다.
“고민이 있는 건가?”
“…글,쎄… 죽겠다…”
“이 밤에 농구를 하러 나온 거면 그런 거다 뿅.”
“그러는, 너는.”
“난 있어.”
“뭔데.”
“농구를 계속 해야 하는지에 관한 거.”
“뭐?!”
대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헌이 그런 대만을 대수롭지 않게 쳐다봤다.
“그렇게 보지 마라 뿅. 정우성 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너 지금 농구를, 아니, 정우성은 또 뭔데?”
“다음에 또 보자.”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이명헌이 황당하면서 동시에, 정우성이 떠올랐다. 정우성이라니. 연락을 하며 지내나? 이명헌이, 정우성이랑? 아니, 정우성이, 이명헌이랑? 대만은 헷갈렸다. 뭐, 어떻든 간에 저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태섭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너도 후배랑 연락하며 지내냐? 나도 후배랑 연락하며 지내, 뭐 이런, 얄팍한 선배 노릇? 그러다 자괴감에 빠졌다.
송태섭은 그냥 후배가 아니고 사귀는 사람이잖아…
대만은 한숨을 푹 쉬었다. 태섭과는 전화를 할 필요도 없이 자주 만났다. 아침이든,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었다. 그래, 마치. 농구를 하는 것처럼. 언젠가 태섭이 원하는 위치에 언제나 내가 있어서 짜릿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래서 전화를 하는 게 무서웠다. 떨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받는 게, 인정하기 싫지만 무서웠다. 태섭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태섭과 떨어지기 싫었다. 그런데 말하지 못했다. 대만은 가끔, 그게 뭔지 아직은 알 수 없는 면에서 선배 노릇을 하려고 했다. 약한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섭은 가장 좋은 동료이자 그리고, 누구보다 저를 잘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떤 이기심으로 결국에는 태섭을 방치 했다는 걸 대만은, 인정해야만 했다. 나 진짜 못났다. 대만이 자괴감을 쏟아냈다. 그리고, 내일은 반드시 태섭에게 전화를 하리라 다짐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후련해진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농구공을 챙겨 기숙사로 걸어갔다.
그런데, 영 찝찝했다. 마치 이명헌에게 나이스 패스 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그런. 대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 태섭이 개고생 시킨 인간이라고. 용서 못하지.
처음 전화를 했을 때, 대만은 태섭의 전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목소리가 꽤… 뭐랄까, 제 목소리는 좀 저음인데, 태섭은 그렇지는 않았지만 음, 계속 듣고 있으면 잠이 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할 게 뻔해서 힘들다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괜히 장난치듯 말했다. 원래, 태섭과는 장난을 잘 쳤으니까. 선배들에게 들은 태섭의 이야기를 할 때는 좀 뿌듯하기도 했다. 괜히 잘 기억은 안 난다고 말했는데 그걸 또 알아채는 송태섭 너는 참.
대만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심장이 간지러웠다. 이번 주에는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같이 농구를 하자고 말할 때는 우리가 수도 없이 나누었던 패스와 슛, 드리블이 생각났다. 익숙한 코트장에서 대만에게 집중하고 어떻게든 대만을 뚫으려던 송태섭. 대만은 그 날이 몹시도 그리웠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보고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꺼낸 순간 마음이 더욱 더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송태섭을 보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편으로는, 송태섭은 나에게 보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나만 그런 걸까 싶은, 옹졸한 어떤 마음까지.
분명히 송태섭이 먼저 좋아하고,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이렇게 자꾸 걔의 마음보다 내 마음이 자꾸 커지는 것만 같은 건지, 대만은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과제를 하느라 늦게 잠든 대만은 다음 날, 피곤한 눈을 억지로 떠 씻은 뒤 수업 준비를 했다. 가방을 챙겨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학교 내에 있는 기숙사인데. 대만은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 복도에서 농구부 선배를 만났고, 대만은 거의 90도로 인사를 했다. 대만이 파악하기로, 가장 꼰대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잘못 걸렸네. 대만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선배가 대만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이번 주말에 뭐하냐?”
“이번 주에는 집에 가보려고 합니다만.”
“다음에 가.”
“예?”
“어느 정도 안면도 익혔겠다, 더 잘 지내봐야지. 술집 예약 해놨고, 장소는 오늘 연습 후에 공지한다.”
“하지만 이미 본가에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고,”
“정대만?”
“…예.”
씨발. 대만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선배는 웃으며 대만의 어깨를 툭 쳤다. 대만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강의실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거의 던지다싶이 책상에 올렸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대만은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씨발. 이런, 개,
양아치짓 할 때 빼고 이런 거친 욕은 거의 해 본 적이 없는데. 대만은 고개를 푹 숙이며 주먹을 쥐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태섭에게 전화를 해서 못 간다고 하는 것보다, 태섭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더 걱정이 됐다. 미치겠네, 진짜. 대만이 어느새 조금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수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최악이었다.
수화기를 쥔 손에 땀이 났다. 대만은 천천히 태섭의 집 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여보세요. 태섭이었다.
“어, 나.”
-선배.
태섭의 목소리가 밝았다. 대만은 고개를 숙여 제 신발끝을 쳐다보았다.
-수업은 다 끝났어요?
“응.”
-과제는?
“아직 많아. 해도해도 끝이 안나.”
-너무 무리 하지 마요.
“응.”
-오늘 뭐 했어요?
대만은 문득, 목이 메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키고, 뒷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똑같지, 뭐. 공부하고, 농구 연습 하고. 너는?”
-저도 똑같아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똑같네, 뭐.
“그러게.”
-형을 못 본다는 거빼면 다 똑같은데. 형만 없는 게 너무, 별로에요.
뒷목을 매만지는 손이 멈추었다. 나도 그렇다고, 네가 너무 보고싶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그 말이 안 나왔다.
-아, 나 요즘 슛 연습 하고 있는데. 꽤 잘 들어가요.
“그래?”
-이번에 와서 한 번 더 봐줘요.
“어…”
-나 너무 완벽해지는 거 아닌가 몰라. 선배가 나 너무 좋아하면 어떡하나. 받아줘야 해요, 말아야 해요. 응?
뒷목을 매만지는 손 끝이 차가워진다. 심장이 뛴다. 이번 주에 못 가게 됐다고, 한 마디면 하면 되는데. 다른 놈들에게는 쉬운 말이 태섭의 앞에서는 어려워진다. 대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들은 건지 태섭이 형, 한다. 대만이 웃었다. 태섭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태섭은, 나와 가깝다는 걸 드러낼 때는 반드시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 말을 할 때의 태섭은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형 소리를 잘 안 하는 녀석이 나에게는 형이라는 호칭을 쓴다. 이건 마치 내가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증명과도 같이 들렸다. 그 흔한, 형이라는 호칭이.
-무슨 일 있어요?
“태섭아.”
-응.
“…미안.”
-…뭐가요.
“이번 주에 못 가게 됐다.”
태섭이 아무 말도 없다. 대만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농구부에서, 뭉치자고 그러네.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뭐, 그런 취지로.”
-…….
“1학년이라 까라면 까야돼.”
-…….
“너한테 제일 먼저 전화했어. 부모님은 아직 몰라.”
태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쉽게 들렸던 숨소리도 안 들렸다. 수화기를 막고 있나.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혀로 입술을 축일 무렵,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대만은 그 소리에 약간 안심했다.
-어디서 해요.
“어?”
-어디서 하냐고, 돈독하게 뭔지 하는 그거.
“그게, 학교 근처에 있는 술집.”
-몇 시에.
“…8시?”
-잠깐 봐요.
“어?”
대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안 들어갈 테니까, 잠깐 보자고. 내가 갈게요.
“잠깐만, 태섭아”
-형이 못 오면 내가 가면 돼요. 어려운 거 아니야.
“언제 끝날지 몰라. 너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형이 재워주던가.
“기숙사에 아무나 못 들어와.”
-그럼 길바닥에서 자면 되겠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갈 거에요.
“태섭아.”
-형은 나 안 보고 싶어?
“야, 너 진짜”
-나 안 보고 싶냐고.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그럼 됐어요. 토요일에 봐요. 전화 오래 했네. 끊어요.
“태섭아, 야, 송태섭!”
이 새끼가 진짜!
대만은 끊어진 수화기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쯤되니 대만은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수화기를 놓고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대만은 얼이 빠진 상태였다. 누군가 움직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뻣뻣하게 움직이는 다리 때문에 대만은 결국 제자리에 멈췄다.
이 막무가내인 놈을 어쩌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역시, 송태섭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뚫는 놈. 그 점이 농구를 할 때는 든든하게만 느껴졌는데, 정대만에게 적용이 됐을 때는, 빌어먹을.
말도 못 하게 좋아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