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야. 아, 아프다고.
…꿈인가. 왜 17살의 송태섭이 있지.
연고를 바르는 송태섭의 손이 움찔거린다. 너는 무슨 주먹이 짱돌처럼 세냐.
…현실이었던 과거도 꿈인가. 이 날은 그 날이다. 경찰서에 있는 송태섭을 찾아갔던 날. 송태섭이 나한테 주먹질을 한 날.
송태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너 근데 이럴 거면 패기는 왜 팼냐? 병주고 약주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밴드를 붙이는 손은 노려보는 시선에 비하면 다정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간지럽게 느껴진다. 밴드를 붙이고 나서도 송태섭의 시선은 계속 똑같은 곳을 보고 있다. 왼쪽 턱, 밴드를 붙인 곳. 그 시선을 보다 맥없이 웃는다. 덕분에 인기 더 많아 지겠어. 사연 있는 남자 어쩌구 하면서. 송태섭의 눈썹이 올라간다. 고맙다 섹시하게 만들어줘서? 눈썹이 더, 올라간다. 송태섭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구는 눈썹이 재미있다. 그래서 웃었더니, 단 번에 다친 곳이 아파졌다. 아야야… 소리를 냈더니, 송태섭의 눈썹이 단 번에 내려간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웃으라고 한 농담에 웃지도 않는다. 진지한 얼굴에 한숨을 뱉는다. 송태섭. 얼굴 만큼이나 진지한 시선이 닿는다. 왜 그랬냐. 송태섭은 대답하지 않는다. 안 말해도 괜찮아. 그런데. 송태섭은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 힘들면 나한테 풀어. 말도 좀 하고. 받아줄 수 있어. 눈도 깜빡이지 않는 송태섭의 눈동자. 진짜야. 뭐든지 받아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를 너무 괴롭히지 마. 송태섭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꾹 다문 입술과 시선에서 대답을 찾는다. 그러려고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게 조금 섭섭하다. 무슨 일 있으면 나 꼭 찾아. 송태섭은 대답 대신 눈을 깜빡인다. 알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의미 없이 깜빡인 걸까. 나는 너를 잘 아는 사람이고 싶은데. 하나도 모르겠다. 형아잖아. 대답해라. 어? 송태섭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다.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는데도 모르겠다. 왜 이런 눈으로 보는지. 왜… 울 것 처럼 느껴지는지.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언젠가 너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런 너를 단 번에 알아채는 걸까. 그때의 마음은 정말 이상할 것 같다.
정말 이상해서 분명히…….
대만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잘 안 떠진다는 것을 인지 하기도 전에,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것과 속이 뒤집어 질 것 같다는 것이 먼저 와닿았다. 끙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였다. 속박 당한 것도 아닌데 이럴 수가 있나.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눈만 깜빡였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익숙한 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실 천장이라는 거였고, 익숙하지 않은 건 왜 거실 천장이 보이냐는 것이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멀쩡한 방을 놔두고 거실에서 자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지독한 숙취로 생각해보면 술을 뒤지게 마셨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술에 취해도 씻고 제 방에서 잠을 자는 술버릇을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이 생각을 하자마자 입고 있는 옷도 불편하다는 게 느껴졌다. 가만 보니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손을 들어 킁킁거렸다. 고기 냄새, 술 냄새가 났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아 미친. 이러니까 꿈을 꾸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면 숙면을 취하기가 어려워 꿈을 많이 꾼다는 식의 기사를 본 건 까맣게 잊었다. 몸이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았다. 이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미칠 것 같은 건.
설마.
대만의 얼굴이 조금씩 새하얘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은 거의 공포 영화나 다름 없었다. 그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발. 제발. 우리 집 티브이가 보이기를. 우리 집 장식품이 보이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티브이와 장식품이었다.
……깼어요? , ……아니요. , ⏪️ 나한테 기대요. , 바닥 차가워요 앉지 말고요…. 추워요? 택시 곧 온대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 ⏪️ ⏪️ 진짜 그거면 돼서 ⏸️
이런 미친, 미치이이이인!
대만은 벌떡 일어났다. 사람이 쪽팔리고 미칠 것 같으면 초인적인 힘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 것 같았다. 머리가 정말 깨질 것 같았다. 속도 이상해서 헛구역질을 참기 위해서 입을 틀어 막았다.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정 반대였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이럴 수가 있나. 이런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왜’ 를 생각하고 싶은데, ‘송태섭’ 생각만 났다. ‘미치겠다’ 를 생각하는데, ‘송태섭’ 을 같이 생각했다. 태섭의 집에서 태섭을 생각하는 기분은 참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태섭의 방이 있는 방향을 보면서도 태섭을 생각했다. 마주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게 이상했다. 똑같이 하면 되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씻고 싶어.
…….
나 좀 일으켜 줘.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이 아침에 어디를 다녀온 건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는 태섭을 보면서 말했다. 두 눈만 깜빡이던 태섭은 미동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처리하는 사람처럼.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처럼 꿈뻑꿈뻑 눈만 깜빡였다. 태섭을 빤히 보던 대만은 그제야 제가 무슨 말을 한 건지를 깨달았다. 아니, 내가 할 말은. 그렇다고 씻겨 달라는 게 아니고. 되지도 않은 말이 떠올랐다. 변명할 거리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그런 걸 하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말에 다른 의미가 섞이는 것. 이건 그러니까, 어떤 전초전인 것 같았다. 다른 어떤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는. 정작 태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에 쥔 걸 바닥에 놓고 귀도리를 풀기만 했다. 아주, 신경질적으로. 그런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른 봄이 와야만 했다. 그래야 볼이 빨간 게 밖에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태섭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의미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머쓱해진 대만은 헛기침을 했다. 아 빨리 나 좀 잡아 줘. 신경질적으로 말이 튀어나온 건 덤이었다. 태섭의 눈썹이 조금 올라간 듯 싶더니, 목도리를 풀며 걸음을 옮겼다. 괜히 뻘쭘해서 자동으로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 입술을 보자마자 시선을 피한 태섭이 뭐라고 했다.
입술 집어 넣어요.
대만의 눈이 동그래졌다. 툴툴 거리는 말투는 방금 전까지 꿨던 꿈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저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던 태섭이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한 건 17살 때고, 그 말을 시비조로 하던 때 역시 그때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반가운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야 근데.
…….
너 나한테 귀도리 한 거 보여주기 싫냐? 좀 그런 것 같은데? 왜?
실실 웃으면서 한 말에 무반응이 돌아왔다. 도리어 눈썹이 올라간다. 대만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자연스럽게 태섭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몸을 기댔다. 태섭이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왜?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태섭의 눈썹이 조금 더 올라갔다.
뭐 할 말 있냐?
……안 나요?
뭐가?
기억. 안 나냐고요.
나.
태섭이 두 눈을 깜빡였다. 조금 놀란 듯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요?
거의 다.
…그 거의 다가 어디까진데요?
가게에서 있었던 일은 거의 다 기억나.
동그랗게 뜨고 있던 태섭의 눈이 원래의 크기를 되찾아갔다. 대만은 그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심과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태섭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에, 태섭이 힐끔 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시선과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을 보았다. 그것을 보며, 긴 숨을 들이마셨다. 어떤 각오처럼. 이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들을, 아니 사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이기심으로 넘겼던 마음과 마주보고 싶었다. 그게 태섭의 마음이든, 제 마음이든. 그러려면 태섭이 있어야 했다. 반드시.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잠깐 멈추었던 생각에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진짜 그거면 돼서 좋아한다고 한 거냐? ⏹️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오늘 약속 있냐?
없어요.
송태섭은 괜찮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지가 않았다. 왜 괜찮지 않은지 알고 싶었다. 왜 화가 나는지도 알고 싶었다. 이것 역시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참이었다.
그 전에 해장부터 하자.
…….
집에 뭐 있냐?
…이 말 할 까봐 편의점 다녀 왔어요.
오케이. 씻고 나올게.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형’ 이고 싶어서 별에 별 짓을 다 했었으니까.
17.
화장실에 들어간 대만은 변기에 앉아 핸드폰 캘린더를 훑었다. 캘린더에는 카테고리에 따라 색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다. 직장 카테고리를 뜻하는 보라색이 대부분인 캘린더를 조금만 더 올리면, 집을 뜻하는 하늘색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늘색이 채워지기 시작한 시점. 1년 6개월 전. 정확히는, 태섭이 입대를 한 순간.
이때만큼 캘린더를 열심히 쓴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중요한 회사 일정을 잊지 않으려고 의무적으로 하는 거라지만, 그때는 거의 자발적이었다. 태섭이 훈련소에서 나오는 날, 휴가, 진급, 편지를 보낸 날 등등, 모든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캘린더를 본 그때 당시 여자친구가 놀랐던 기억도 여기에 담겨 있었다. 이게 다 뭐냐는 질문에 동생 일정 이라는 말을 했던 그때. 그 여자친구는 태섭의 생일 즈음 대만의 주사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태섭이 생일 한달 전에 입대를 해서 그랬다. 누가 생일 전에 영장을 날리냐며 화를 냈던 게 떠올랐다. 그걸 보던 태섭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럴 수도 있죠 라고 했다. 저 말에 더 화가 나서 아니? 그럴 수 없거든? 신랄하게 국방부를 비판했었다. 그리고 태섭의 생일 이틀 전에 여자친구와 같이 술을 마셨던 날. 태섭이 생일 축하를 못해줘어……. 진상을 부렸다. 왜? 어디 갔어? 군대에 있어어어어어……. 그 해 태섭의 생일은 토요일이었다. 여자친구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하필이면 그날. 대만은 망설임없이 그날 우리 가족이랑 동생 가족이랑 같이 생일 기념으로 밥 먹기로 했어 라고 대답했고, 다음 날 차였다. 그 동생 군대에 있다며. 어. 그런데 그 가족이랑 같이 밥을 먹어? 중요한 약속이야. 오빠는 나보다 동생이 더 중요해? 이 질문에 답을 못해서 차였다. 조금 슬픈 마음은 태섭의 생일에 같이 밥을 먹으면서 가족들과 디데이를 세면서 울 때 아주 찔끔 울었다. 그랬는데 그 다음 날에는 도리어 화가 났다. 이렇게 기분이 쉽게 바뀔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태섭이를 챙길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걸 몰라주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캘린더에 다 있었다. 그것을 훑어보는 내내 웃었다가, 무표정이었다가, 착잡해졌다가, 다시 웃었다가를 반복했다. 지금 이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고 싶어서 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니었다. 이걸 쓸 때의 마음이 다 기억나지는 않아도 분명한 건, 태섭을 생각했을 거라는 것이었다. 분명했다. 무언가를 쓰는 건,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의 모든 것은 죄다 송태섭이었다. 태섭에 대한 어떤 마음이 고스란히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다. 이미 애매했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앉아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대만은 젖은 수건을 목에 걸며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몇 가지 반찬과 햇반이 놓여져 있었다.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태섭을 힐끔거렸다.
콩나물국 만들었어요.
어…. 고맙다.
칼칼하게 했어요. 저는 괜찮았는데 매우면… 알아서 먹어요.
저 소리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시큰둥하게 말하며 자리에 앉은 태섭이 볼을 긁적였다. 더 웃었다가는 눈썹을 올릴 것 같아서 군말 없이 잘 먹겠다는 인사를 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건 콩나물국 하나밖에 없었다. 그 국을 먼저 먹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조심스럽게 저를 보던 태섭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군인 시절 취사병이었던 전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송태섭표 콩나물국은 정말 기가 막혔다. 그 국만 세 그릇을 먹었다. 두 번째 까지는 건더기와 같이 먹다가 세 번째에는 국물만 마셨다. 태섭은 군말없이 대만이 해달라는 걸 다 해줬다. 너는 속 괜찮냐? 한 그릇 이상 먹지 않는 태섭을 보며 물었다. 네. 이 한 마디만 한 태섭은 뭐 더 갖다 줘요? 도리어 되물었다. 대만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 배가 불렀다. 원래 술 마신 다음 날 잘 못 먹는데 진짜 많이 먹었어. 태섭은 이 말에 눈썹을 올렸다. 그런 사람치고 엄청 먹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만은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 정도로 맛있어. 속이 풀린다, 야.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태섭이 제 입술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걸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대만은 양심에 찔려 설거지를 했다. 태섭이 괜찮다는데도 바득바득 했다. 국냄비를 싹싹 비워서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진짜 잘 못 먹어. 거짓말 아니야. 변명을 하듯 늘어놓는 말에 태섭은 고개만 끄덕였다. 귀 끝이 조금 빨간 것 같았다. 저건 조금 부끄럽다는 뜻인 것 같은데, 무슨 포인트에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양치까지 다 하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은 티브이 화면에 반사되어 보였다. 세상 안 친한 사람들인 것처럼 조금 먼 거리를 둔 채로 앉아있었다. 대만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 본격적이고, 그렇다고 이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자니 조금 민망했다. 그래서 바닥에 앉았다. 태섭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렇게 앉냐고 물어서 대화 하려고. 한 마디 했더니, 그럼 형이 소파에 앉아요. 한 마디를 던진 후 바닥에 앉았다. 제 옆에. 무심히. 아까보다 좁아진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식탁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덜 본격적인 느낌이 나면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할 참인데 그런 분위기를 내지 않으려는 게 아이러니 하긴 했다. 당연했다. 그건 조금, 낯간지러운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말할게. 태섭이 짧은 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네.
송태섭.
네.
…….
…….
침묵.
그러니까.
네.
…….
…….
역시, 침묵.
…….
형.
씻으면서 생각을 해 봤어.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던 태섭은 긴 숨을 뱉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만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말을 하고서 숨을 고르려는지, 짧은 숨을 몇 번이고 뱉었다. 그 숨에 바닥이 꺼지는 것 같았다. 별 말 하지도 않았는데 손이 떨려서 팔짱을 꼈다. 그래야 대만이 못 볼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고 두려워서, 아무 말이나 던질 것 같은 제 상태를. 팔 안에 숨긴 손가락 끝으로 살을 꾹 눌렀다. 팔을 파고 드는 감각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아무 말 하지 마. 그러기로 했잖아. 고백 한 거, 그거면 된 거잖아. 기대와 욕심을 죽이자마자 고백한 걸로 끝내자고 생각한 마음이 보였다. 그걸 억지로 잡아 끌어 올렸다. 찾을 때는 그렇게 안 보이더니. 정말 짓궂었다. 정말, 자기 멋대로였다. 마치, 정대만처럼.
나는 여태 너한테 확실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더라.
말을 고르고 고르는 듯이 바닥을 쳐다보고 있던 대만의 시선이 태섭에게 닿았다. 그 온전한 시선을 받은 태섭은 숨을 죽였다.
차인 거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했었지.
형, 그건,
동생으로서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말 아니었어. 근데…. 아니. 이거 말고.
…….
꺼지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거. 그거.
…네.
네 마음을 우습게 본 거 아니야.
…….
너는, 그러니까. 너는…….
…….
…….잘 모르겠어. 그런데.
…….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너한테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미안.
죽인 숨이 더더욱 가라앉았다. 태섭은 그 숨과 함께 저 아래로 가라앉고 싶었다.
그런데.
…….
그런 주제에 어제 네가 괜찮다고 했을 때는, 화가 났어.
…….
너는 괜찮다고 하는데. 화가 났어. 그럴 작정이었으면 진짜 왜 그런 말을 했냐?
…….
그때는 화가 안 났는데 지금은 화가 나. 근데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
맥없이 웃다 한숨을 내쉬며 땅 밑으로 꺼져가던 태섭이 퍼뜩 올라온 건, 대만의 마지막말 때문이었다. 저 말에 심장이 뛰었다. 조금, 아니 많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했던 그때의 말이 지금은 변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 말에 욕심이 생겼다. 힘이 생겼다. 변덕이 장난처럼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 느껴졌다. 말릴새도 없이 기대라는 검을 휘두르기 위해 칼집에서 꺼냈다. 그런데도 좋았다. 마음대로 휘두를 준비까지 마쳤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술이 덜 깬 셈 쳐. 아니. 다 깼어 사실은.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러니까,
형,
다음에는 잘 정리해서 말해볼 테니까. 시간을 줘.
말을 끝낸 대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섭은 말이 없었다. 그저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 공기 사이에 침묵이 흘렸다. 그런데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서 없는 말이라도 뱉어내서 그런 건지, 도리어 가볍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태섭이 무겁게 보이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말을 하기 전과 후에 뱉은 한숨이 허상인 것 같았다. 그 허상으로 깨달았다. 태섭이 고백을 한 이유를. 이기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잘 보고 싶어서였다. 그 무엇도 아닌, 나를. 짓누르는 마음의 무게가 아닌, 온전한 시선으로 보고 싶어서였다.
형은 정말 형 생각만 해요.
…그거 알고 있는 거 아니었냐.
잘하고 있는 걸 더 잘하라고 하면 어떡하라는 거예요?
태섭이 옅게 웃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마음이라도 좋은 것처럼.
형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해온 게 기다리는 거예요.
…….
그래서 계속 그럴 수 있는데.
…….
이상해요. 형이 그 말을 하니까, 조급한 마음이 들어요.
어떤 거라도 받아서 좋다는 것처럼.
형 옆에 계속 있어도 돼요?
눈만 깜빡이고 있던 대만이 맥없이 웃었다. 태섭은 그 얼굴을 보면서 팔짱을 풀었다. 다른 곳을 보면서 뒷머리를 만지는 대만을 보면서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조금 가까워진 것뿐인데,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물어보고 하지 말라고 그랬지, 내가.
대만이 튕기는 손가락에 이마를 맞았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하나도 안 아팠다. 그런데도 이마를 문질렀다. 그것도 닿은 거라고 좋아 죽겠다고 세포 하나하나가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을 기억하고 싶어서 태섭은 계속 이마를 문질렀다. 몇 초 전까지 어떤 형태로 있던 마음이 대만의 말 한 마디에 바뀐 것이 느껴졌다. 태섭도 모르는 형태로 바뀌었으나, 아주 부푼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 때문에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 대답 안 하냐? 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르면서 장난스럽게 웃는 대만이 물었다. 태섭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좋아한다는 건 당신이라는 커다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긴 숨을 쉬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구나. 이런 건 하나도 모르는 대만에게 말했다. 네. 형. 진짜 안 물어볼게요. 조용히 형 옆에서 시계 태엽을 빠르게 감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