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06

태섭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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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월요일 힘내요]


 여느 때와 똑같은 알람소리를 듣고 눈을 뜬 대만은 태섭의 메시지 때문에 일어난 게 꿈인 줄 알았다. 그랬다가 꿈이 아닌 걸 알고서는 잠이 덜 깬 줄 알았고, 잠이 다 깬 걸 알고서는 다른 사람한테서 온 건 줄 알았다. 그런 사람이 당연히 없는데도 그랬다. 메시지를 보는 내내 답장은 할 생각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태섭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5시 55분이었다. 태섭이 헬스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5분 전. 대만은 이 시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미 지나간 시간인데 거기에서 본 사람처럼 무언가가 그려졌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어플을 켰을 순간이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핸드폰을 잡았을 두 손, 55분에 보내기 전에 했을 행동 같은 것.

 송태섭이 변했다. 

 대만이 내린 결과는 그랬다. 변했다. 눈에 보일 정도지만 아주… 미묘하게. 토요일에 이야기를 한 뒤부터 그랬으니 대충 생각해도 저 때문에 변한 게 틀림없었다. 아닌 척하면서 힐끔 거리는 시간이 늘었다거나, 눈이 자주 마주친다거나-그래놓고 눈이 마주치면 허공을 보면서 아닌 척하는데 그게 진짜 어찌나 웃기던지-, 자꾸 관찰하려고 한다거나.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기력을 쓴 것 같으니 좀 누워있겠다고 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서 내친김에 태섭의 집에서 지냈는데, 있는 내내 계속 저랬다. 결국에는 너는 왜 자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힐끔 거리냐고 했는데, 어찌나 기분 나쁜 티를 내던지. 저게 어이가 없어서 너 계속 그렇게 쳐다볼 거면 쳐다보지 말라고 했더니 누가 좋아하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냐고 해서 할 말을 잃었다. 송태섭 눈썹이 이마를 뚫고 솟아 오르는 줄 알았다 진짜. 반면에 거의 10시 10분 각도로 유지하는 대만의 눈썹은 9시 15분 각도로 축 쳐졌다. 시선을 피하는 건 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이랬다. 대답한 대로 이제 안 물어보고 할 거예요. 진짜예요. 할 말이 없었다. 할 수도 없었다. 

 출근을 하는 내내 주말부터 지금까지 태섭이 한 행동을 생각했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낸 건 사실 오늘 아침 뿐만이 아니었다. 어제도 그랬다. 삼시 세 끼 챙기라는 메시지는 기본에, 형 나 심심해요. 어릴 때도 하지 않은 말을 했다. 어쩌라고. 했더니 뭐 해요? 조금은 간지러운 답장이 돌아왔고. 직장인에게 일요일이란 짜파게티 요리사가 아니라 무조건 집에서 쉬는 날인 거다. 쉬고 있어. 라고 보냈더니 그럼 같이 게임할래요? 였다. 나는 그런 비생산적인 건 안 한다. 이렇게 보내면 알았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온 건 한 번만 같이 해줘요. 였다. 이 메시지를 무시하지 못했다. 송태섭이 뭘 같이 해달라니. 이런 게 옛날에도 있었냐면, 거의 없었다. 농구 같이 하자는 말 빼고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거였다. 저때는 농구공을 품에 안고 저만 쳐다보는 얼굴-정확히는 볼살-과 눈빛을 무시 못해서 형아가 아침부터 밤까지 해줄게 몸이 부셔져라 해줄게! 했었다. 그때는 태섭이 어려서 그랬다지만, 이제 다 큰 놈이 이러는 건데 마음이 약해지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알면서 이러는 건가 싶어서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해는 안 돼도, 어이가 없어도, 손은 자연스럽게 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뭐, 뭐 같이 하는데, 뭐뭐. 못 이긴 척 같이 게임을 했다. 밤새도록 했다. 형 우리 이제 자요. 태섭이 이 말을 할 때까지. 게임만 같이 한 게 아니라 문자도 하고 전화도 했다. 야 나 점심 좀 먹고 올게. 형 나 화장실 가요. 엄마가 마트 가쟤. 운전 조심히 해요. 마트 갔다 왔어, 손 떨려. 수고했어요. 너 저녁 안 먹어? 저녁 뭐 먹어요? 너 뭐 하는데 조용해? 편의점 갔다 왔어요, 엄청 추워요. 돌돌 싸매고 갔냐? 네. 

 시간을 달라는 걸로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가. 대만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는데. 몸이 거의 인간 병기가 된 송태섭이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에, 정말 먼지 한 톨 정도의 죽을 확률이 있다면 저 놈 멱살을 붙잡고 흔들 거다. 이 새끼야 너 아직 죽을 때 아니야. 누구 마음대로 죽어. 내 허락맡고 죽어. 이 생각에 또 현타가 왔다. 내가 뭔데. 쟤한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데. 근데 이 말을 해도 송태섭은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네. 형. 백퍼였다. 

 

 좋은 아침 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주임……님.


 A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대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부터 일이 있는 건지 핸드폰을 보는 대만의 얼굴이 꽤 살벌해보였다. 가방을 내려 놓고 목도리와 겉옷을 벗는 내내 심각하더니, 갑자기 파티션 아래로 사라졌다. 한 명씩 파티션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인사를 하던 직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눈빛을 주고 받으며 무언가를 공유하고, 대만이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주임님 얼굴 엄청 빨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기운이 이상하신데…?

 괜찮으세요?


 A, C, E, B의 질문 세례를 들으며 의자에 앉은 대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목이 나가라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하면 머릿속에 있는 메시지가 튕겨져 나갈 거라고 믿으며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라 믿었는데, 도리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네가 이렇게 해봐라 우리가 나가떨어지나! 메시지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이제 헬스장 일 끝나요] 말만 하는 줄 알았더니 새로 업데이트되어 몸집을 부풀리며 대만을 붙잡았다. 대만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직원들을 보다 시계를 쳐다봤다. 8시 58분. 업무 시작 2분 전. [일 열심히 해요] 이 메시지에 책상 정리를 할 생각도 못하고 책상에 이마를 처박았다. 쿵! 소리가 나자마자 꺄악 소리가 들렸다. 주임님! 소리를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이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다가 끄덕이는 이런 애매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그러다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송태섭이랑 썸 타는 거 맞지? 

 예스다. 백퍼, 예스.


 주임님 또 애매하게 대답하신다…….

 아무래도 이번 주에 한 번 뭉쳐야 할까 봐요.

 근데 주임님 이번주 금요일에 피피티 발표 아니셨나…? 준비는 다 하셨어요?

 아니요……….


 이것도 저것도 준비가 된 게 하나도 없다. 대만은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26년 인생에서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군 적이 없었다. 이건 꼭 그런 거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인생 최대의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그런 거면 조금 이래도 괜찮지 않나. 이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송태섭이었다. 나보다 성질이 더 급한 놈. 지금은 아닌 척하고 있는 걔. 아니, 조금 티를 내는 태서비. 이 놈이 달라고 했던 시간을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그러려면 아직 저 밑바닥에 떡하니 붙어 있는 어떤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19.


 그래서 카페에 갔다. 커피는 마셔야지. 합리화를 하면서. 할 말이 있기도 했다. 그 말을 할 작정으로 카페 메이트들(꺄르르 군단)에게 일을 맡기고 왔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깥 바람도 좀 쐬야 전환이 되니까요. A가 말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으실 텐데 저희 일에 더해진다고 주임님만큼 죽을 것 같은 심정은 아니니까요. C가 말했다. 점심 시간에 말씀드렸던 거 생각해 보세요. 저희 진짜 잘 들어줄 수 있어요. E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점심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대만은 아침에 책상에 이마를 박은 것때문에 점심을 먹는 내내 무슨 일이 있냐는 채근을 들어야만 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진짜 이번 주에 뭉쳐야 할까요? 저희가 들어 드릴게요! 연애 상담 쌉가능! 연애 경험 유! 연애 경험 다! 며칠 전 회식 자리에서 들은 소리를 또 들었다. 연애의 ㅇ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냥 조용히 있었다. 여자의 촉이란 정말 무서운 거였다. 조금이라도 말을 섞다가는 결국 알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태섭이 일을 하는 카페에서 할 수는 없었다.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늘 하듯이 손을 들어 대충 흔드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사장과는 세상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어서 와요, 대만 씨.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인사를 할 때마다 태섭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저 눈썹을 보자마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전에 무슨 생각이었든, 무슨 마음이었든, 거의 자동반사적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늘 눈이 가는 것은 지나칠 수 없었다. 거기에 따라오는 생각 역시. 


 태섭이 아직 아메리카노랑 에이드 종류만 만들죠.

 네. 우유 데우는 거 배우고 있어요. 

 소질 있어요?

 그럼요. 곧 태섭 씨가 만들어주는 바닐라 라떼 드실 수 있을 거예요.

 힘내라, 송 바리스타?


 대만의 카드에 스탬프를 찍고 있던 태섭의 귀 끝이 조금 빨개졌다. 저걸 보고 있자니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이런 태섭을 보고 있자니 카페에 오기 전까지 괴롭혔던 생각이 하나도 안 났다. 정말 힘을 낼 작정인지 이쪽으로 오지 않고 바닐라 라떼를 만드는 사장 옆에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태섭 때문에 머릿속이 아예 백지가 되었다. 그 백지 상태에 대만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났다. 입술은 왜 저렇게 내밀고 있어? 눈 저렇게 크게 뜰 줄도 아네. 저렇게 뜨면 더 잘 보일 줄 아는 거야 뭐야. 진짜 웃기고 귀엽, …….

 대만은 그 웃기고 귀엽…… 다고 생각한 태섭이 커피잔을 직접 들고 오는 걸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웃기고 귀여운 건 그런 거고, 할 말이 있었다. 일을 좀 맡기고 오기는 했지만 바쁜 건 사실이었다. 다른 말도 좀 하다가 꺼내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직장인의 비애였다.


 나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야근해. 저녁에 같이 밥 못 먹어.

 

 커피를 내려놓기 전까지 순했던 태섭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대만은 큼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내가 저번에 말했지? 중요한 피피티 발표가 금요일이야. 


 언제는 우수 사원이라서 제 시간에 다 한다면서요.

 우수 사원을 더 착취하는 곳이 회사라는 곳이야….


 내가 왜 입사 하고 얼마 안 돼서 주임 딱지 달았는지 아냐. 태섭은 제 눈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대만을 보면서 짧은 한숨을 뱉었다. 이 한숨에 제 눈치를 보는 대만의 눈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참았다. 여태 참았으니 참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은 참 이상했다. 대만이 넘겨준 이름 모를 마음을 받으니까 조급해졌다. 조급해지니까 초조해졌다. 초조해지니까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 내내 주구장창 연락했다. 내가 뭐하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아니, 형이 뭐하는지 알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내 생각을 해줬으면 해서. 오버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도 손이 안 멈췄다. 그래도 대만은 다 받아줬다. 툴툴 거리면서도 다 해줬다. 이러니까 자꾸 기대하게 됐다. 여기까지 해도 괜찮을까. 자꾸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얘 왜 이래. 생각하면 어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애처럼 군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저녁은 먹을 거잖아요.


 저렇게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거의 애처럼 툴툴거렸다. 이 말투를 눈치챘을까. 대만의 눈치를 살폈다. 대만은 말없이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이게 태섭의 기분을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또 시간을 달라는 것처럼 보여서,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데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해서 속이 답답했다. 그냥, 생각하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기다리는 걸 제일 잘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나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회사 식당에서 먹으려고. 라는 말에 욱할 뻔 했다. 나랑 있는 시간이 아까워요? 이 생각이 들자마자 제 뺨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어른답게 굴어. 어른답게. 말이 없는 제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대만을 보면서 이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랬는데 나온 말이.


 일부러 야근 하는 거 아니죠?


 태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게 뭐가 어른이야. 완전 속좁은 말을 한 것 같아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걸 꾹 참았다. 그저 대만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질문에 대만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테이블에 유리잔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탁. 그 소리가 무언가를 결정했다는 탕. 소리처럼 들렸다. 태섭은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대만의 시선에 아차 했다. 오버했다. 확실했다. 이걸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싶을 때 대만이 말했다. 시선을 살짝 피하면서. 그런 거 아냐, 인마.


 좀 중요한 발표라서 그래. 잘해야 돼. 잘 되야 되고. 


 그리고 다시 커피를 마신다. 태섭은 그러는 내내 대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커피잔을 떼자마자 입가 주변에 묻은 우유 거품을 혀로 핥는 것까지 죄다 쳐다봤다. 핥고 싶다. 이 생각을 대놓고 했다. 여태 이런 생각은 대만이 없을 때만 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아니라면, 정말 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랬는데. 태섭은 느꼈다. 제 마음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기로 한 기대를 보란듯이 흔들어서 거기에 보기 좋게 베였는데, 그게 아픈지 안 아픈지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달라며 웃은 얼굴만 기억났다. 이 얼굴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면 기다리면 된다. 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이 아니면 컨트롤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처럼. 10년이다. 그 동안 해온 게 저거다. 정대만을 기다리는 것. 정대만을 좋아하는 것. 여태 잘 해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답지 않게 조용히 커피만 마시는 대만을 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형.

 어?


 지금, 그게 안 된다. 정확히는 대만이 시간을 달라고 했던 그 순간부터. 분명히 내 마음인데,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처럼 군다.


 …카페에는 오는 거죠?


 그 주인에게 말했다. 줄곧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은 생각에 찍혀 있던 온점이 물음표로 바뀔 것 같으니, 나 혼자 두지 말라고. 


 당연하지. 직장인에게 커피는 생명수라고.


 태섭은 피식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대만이 딴 곳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런 대만의 옆얼굴을 보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온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정말 구차한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저 생각만 했다. 차라리 귀도리를 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하면 나를 보면서 웃으니까. 정말, 하나도 안 멋졌다. 누굴 좋아하는 건 이럴 수밖에 없는 건가. 자꾸 매달리고 싶었다.




19.


 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대만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거의 울면서 기지개를 켰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책상에 엎드리고 싶었으나 얼굴을 갖다대면 바로 잘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 뒤 다리까지 쭉 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조금 움직였더니 나았다. 그랬더니 조금 더 움직이고 싶어서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통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쳐다봤다. 나름 높은 층수에 있어 내려다보는 맛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일을 하지 않을 때나 그랬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층을 보면서 동질감을 느꼈다. 멋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야경을 보다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9시 45분. 수요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간인지 요일인지 모를 것을 쳐다보는 대만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태섭과 같이 집으로 가지 않는지 벌써 3일이나 됐다. 3일밖에 안 됐다고 할 수도 있는데 벌써 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걸보니, 일상이 된 일을 하지 않는 건 역시 이상한 거구나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느껴져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늘 똑같은 길, 똑같은 버스, 똑같은 정류장을 거치는데 이것 모두가 어색했다. 너무 조용했고 너무, 추웠다. 계속 밖에 있다보면 추운 것도 적응이 되던데, 월요일부터는 정말 적응이 안 됐다. 빨리 집에 가야 한다며 걸음을 서두르면서도 태섭의 집이 있는 아파트에 괜히 눈이 갔다. 얼굴을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이럴 일인가 싶어서 헛웃음을 뱉기 일쑤였다. 그렇게 헛웃음만 뱉으면 됐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 느꼈다. 송태섭을 못 보는 것. 송태섭이랑 같이 밥 못 먹는 것. 송태섭이랑 정해진 시간에만 연락할 수 있는 것. 이것 말고도 많았다. 다 달라도 똑같은 것으로 묶여 있었다. 자주 봤던 애가 없어서 허전하다고 느끼는 것.


[저녁은 챙겨 먹어요]

[이제 동기들 만났어요 다들 너무 시끄러워요]


 허전함을 느끼자마자 오늘 태섭이 보는 문자를 다시 훑던 대만이 피식 웃었다. 태섭은 오늘 그간 미루고 미루던 대학 동기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단다. [맞다 너도 친구 있었지] 정말 순수하게 놀라서 보냈는데 태섭은 [ㅡㅡ] 이거 하나만 딱 보냈다. 다시 봐도 웃겼다. 태섭이 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었다. 너 전역하고나서 누구 만나러 간다는 소리 한 번도 안 하지 않았냐, 여태 만난 사람은 나밖에 없었던 거 아니었냐, 그래서 친구가 없는 줄 알았다. 이 말을 장난처럼 하고 싶었으나 그 뒤에 태섭에게서 더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이것 역시 조금 허전했다. 지금은 조용한지, 얼마나 마셨는지, 얼마나 더 마실 건지, 언제 집에 갈 건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다른 걸 생각했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밑바닥에 있는 감정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 이런 걸 생각하면 태섭이 입대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태섭이 입대하던 날. 온 가족이 출동했다. 차를 운전하던 대만은 훈련소로 가는 도로에서 시간이 제발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만 하면서 밟았다. 그런데 훈련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정말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빡빡 깎은 머리를 보면서 왔는데 훈련소 앞에서 저 머리를 봤을 때는 더 혼란스러웠다. 얼마나 울컥하던지. 딴 놈들이 빡빡이든 말든 이런 생각 하나도 안 드는데, 송태섭은 울컥하다 못해 애틋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옆에서 모친이 엉엉울면서 애기야 너를 어떻게 보내니 타령을 할 때 대만도 같이 울 뻔했다. 태섭은 상대적으로 덤덤한 제 모친보다 거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대만의 모친을 달래느라 애를 썼다. 저 잘 할게요. 걱정마세요. 연락도 자주 드릴게요. 덤덤하게 위로했다. 

 그리고 그 덤덤한 시선이 대만에게 왔을 때. 대만은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준비한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태섭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너무 빤히 쳐다봐서 할 말 대신 해보라는 말을 던졌다. 그래도 태섭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그냥 보기만 했다. 태섭이 그러는 동안 대만은 그제야 준비한 말을 늘여놓았다. 잘 다녀와라. 밥 잘 챙겨먹고. 누가 괴롭히면 일단 참아. 주먹 절대 쓰지 말고. 이 말을 했을 때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며 미간을 찌푸린 거빼고, 똑같은 눈으로 빤히 보기만 했다. 그러다, 진짜 들어가야 되기 전에 한 마디 했다. 다녀올게요. 학교 잘 다녀 오겠다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그렇게 빤히 보더니 훈련소로 들어갈 때는 뒤도 안 돌아봤다. 대만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제야 빤히 볼 수 있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도 송태섭이 보였다. 작아져도, 송태섭이 보였다. 없어져도, 송태섭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대만의 모친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송태섭이 보였다. 우리 애기 있는 동안 전쟁나면 내가 쳐들어 갈 거야아… 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아…. 그게 무슨 소리야 여보 그럼 나도 같이 가요…. 두 사람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전쟁은 지금 일어난 것 같았다. 혹시 아들 필요하면 대만이 불러. 우리 아들이잖아. 제 모친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태섭이 없는 동안 제가 아들 할게요. 이 말을 하는데 마음 어디가 이상했다. 좀 많이 이상해서, 분명히 80km로 가고 있는데 체감은 40km 인 것 같았다. 오빠, 핸들 잡은 손에 힘 좀 빼요. 옆에 있던 아라가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딸이자 아들이잖아요. 신경쓰지 마요. 아라의 말에 그냥 웃었다. 웃음 밖에 안 나왔다. 빨리 송태섭이 민간인이 됐으면 싶었다. 그래야 이 이상한 마음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빌었는데 시간은 느리게 흘렸다. 송태섭 하나에게서 연락이 없는 건데 전부 연락이 없는 것 같았다. 야 너 언제 오냐. 디데이를 세면서 혼잣말을 했다. 나 대신 시간이 송태섭을 따라간 것 같았다. 이게 어이가 없고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서 태섭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며 반갑다고 했다. 형이 할 법 하면서 형답지 않은 짓을 했다. 그래서 괜히 호들갑을 떨었는데 태섭은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처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동안. 오래오래. 최대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그러고서 한 마디 했다. ……시간이 너무 느려요, 형. 엄청 애틋하게 말했다.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아는 듯이. 그런 말을 했으면서 휴가가 끝났을 때는 이랬다. 시간이 너무 빨라요, 형.  


 어…….


 태섭에게 전화가 왔다. 대만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송태섭 이 놈, 전생에 분명히 양반은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며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늘 하던 대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들리는 목소리는 태섭의 것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오! 대만이 형 맞으시죠?

 누구세요?

 -저 태섭이 대학 동기요! 통화 목록에 많이 있으셔서 연락드렸어요!

 

 대만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대만이 형 이라고 하는데 목소리는 여자다. 대만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짐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핸드폰 너머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엄청 시끄러웠다. 태섭의 동기는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이 말이 거슬렀다. 대충 들어도 술에 취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면 반가워서 마실 수도 있지.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송태섭은 술이 세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 취해도 송태섭은 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걸 보기도 했고. 그렇게 믿으며 짐을 챙기는데 동기가 엄청 큰 목소리로 말했다. 태섭이가 취해서 택시 태워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집이 어딘지 아세요?! 


 네?

 -태섭이가요오! 술에 취해가지고오! 집에 가겠다는데에! 집으로 잘 갈지 확신이 안 들어서요오! 이렇게 취한 걸 처음 봐가지고오!


 저 말을 들으면서도 정보 처리가 안 됐다. 누가 취해? 송태섭이? 같이 마신 두 번의 술자리에서 나랑 같이 사람들을 택시 태워서 보낸 그 송태섭이?


 태섭이 지금 뭐해요?

 -졸고 있어요! 근데 지금 일어났어요!

 거기 어디에요?


 전화를 끊은 대만은 뭐 하나는 깨먹을 것처럼 힘을 줘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숨을 골랐다. 절대로 처리되지 않을 것 같은 정보가 하나로 묶여졌다. 송태섭이 취했다. 이 사실 하나로 패딩을 입지 않고 밖으로 나가도 추운 걸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송태섭 이 새끼. 딱 기다려. 나 없는 시간에 뭐했는지 1부터 10까지 물어볼 거니까 목 깨끗히 닦고 기다리고 있어.




20.


 꿈인가……? 


 송태섭을 보자마자 1부터 10까지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택시를 타고 달려온 대만은 그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얼굴을 보면서 묻는 태섭을 보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튕겼다. 


 이게 꿈같냐? 어? 


 대만은 느리게 눈을 꿈뻑이는 태섭을 보며 한 마디 했다. 맞은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는 태섭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얼굴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몇 시간 전에 카페에서도 봤는데. 지금 보니 더 반가웠다. 그래서 얼마나 마신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안녕하십니까아아아아!! 태섭의 동기들이 벌떡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취한 상태로 벌떡 일어나서 휘청거리는데도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사체과 군기 아직까지 장난 아니네. 저들을 보고 있자니 태섭이 대학에 입학한 뒤 참가했던 신입생 환영회가 떠올랐다. 어땠냐고 물으면 좋았다, 별로였다, 이런 이야기만 하던 놈이 저 환영회 이야기는 어찌나 조곤조곤하던지. 그 뒤로 동기들과 전우가 됐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전우들이 저에게 선배님 대한답시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유, 저 선배님 아닙니다. 그러면서 크게 웃었다. 조금 어색해서 태섭이 형이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회사에서 하는 행동이 그대로 나왔다. 잘 오셨습니다, 대만 형님! 누군가가 다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태섭에게 손목을 잡혔다. 싫어요. 하지 마요. 얼굴에 적힌 말이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잡으려던 손으로 태섭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랬더니,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순해졌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멍한 얼굴로 보는 게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귀여웠다. 계산을 할 요량으로 카운터에 갔더니, 계산은 다 했는데 안 가고 저러고 있단다. 사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태섭의 옆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뭐해요…? 

 택시 부르려고.


 말이 끝나자마자 태섭이 자세를 고쳤다. 


 저 안 취했어요. 택시 안 타도 돼요. 


 대만은 당황했다. 


 아니, 애들은 보내야 될 거 아니야. 


 이 말에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2차를 외치는 동기들을 죄다 무시하면서. 얼른 보내요. 다 보내버려요. 나랑 형 빼고.

 그렇게 태섭과 같이 동기들을 택시에 태웠다. 2차 가요, 2차! 이렇게 외치는 동기들 중 그나마 멀쩡하게 보이는 애한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문제 있으면 연락 하라고 명함을 내밀었다. 그 명함을 동기가 받기 전에 태섭이 빼앗았다. 태섭은 두 눈을 동그랗게 쳐다보는 대만은 쳐다보지도 않고 뚱한 얼굴로 나한테 연락해. 한 마디만 했다. 어어, 알았어! 동기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만은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진 택시를 보다 여전히 뚱한 태섭을 보며 물었다.


 술 다 깼냐?

 형은 아무한테나 명함을 줘요?

 그러려고 만든 게 명함이거든?

 개인 핸드폰 번호가 적힌 걸 아무한테나 준다고요?

 그런 게 명함이라니까?


 태섭이 또 죽일 듯이 노려본다. 대만은 이런 태섭이 같잖았다. 사실 아무한테나 안 준다. 중요한 사람한테만 준다. 이 말은 안 했다. 이러는 태섭이 어디까지하나 궁금해서 그랬다. 그러면 이제 같잖아지는 건 태섭이 아니라 저였다. 그래도 말 안했다. 이런 식으로 속마음을 대놓고 표현하는 태섭은 처음이었다. 주사 받아주지 말라고 그랬는데. 1부터 10까지 받아주고 싶었다. 갑자기 즐거워졌다. 그래서 아무말도 안 하고 지켜보는데, 태섭이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같이 가. 들은 척도 안 했다. 같이 가자니까? 역시, 들은 척도 안 했다. 왜 목도리 안 했냐? 이 말에는 고개를 돌렸다. 뚱한 얼굴로 보고 있는 태섭의 앞에 서서 가방에 쑤셔 넣은 목도리를 꺼냈다.


 형은 진짜 바보 멍청이에요.

 어쭈.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어요.

 계속 해라? 어? 


 말은 저렇게 하면서 웃는다. 태섭은 호선을 그리면서 웃는 입꼬리 끝을 쳐다보았다. 저 입꼬리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해도 계속 하라고 할 거예요?


 재미있었냐?

 …아니요.

 왜?

 술을 너무 많이 먹여서요.

 그래서 많이 마셨냐?

 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태섭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냥, 빤히. 그러다 한 마디 했다. 안 취했어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우리도 택시 타자.

 버스 타고 간다고 그랬잖아요. 


 이 말을 또박또박 했다. 언젠가, 한글을 뗀 아이처럼 싫다고 말한 것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안 취했으니까 버스를 타도 된단다. 쓰읍…. 의심의 눈초리로 태섭을 훑었다. 또박또박, 느린 목소리로 말하는 게 취하지 않았다고 어필하는 것 같아서 의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혀는 꼬이지 않았지만 느낌이 그랬다.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 안 취했다는 말만 했다. 대만은 콧방귀를 꼈다. 진짜 취한 사람은 다 그런 말을 해. 제 말에 태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 입술에서 확신했다. 얘 취했다.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진짜 택시 안 타? 태섭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한 번. 


 절대 안 타요. 버스 타고 갈 거예요. 그래야 늦게 가요. 

 집에 들어가기 싫냐?

 모르는 척 하지 말고요.


 이 말을 들으니 또 안 취한 것 같다.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은 채로 목도리를 둘렀다. 허공에서 어색하게 맴도는 손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너 나랑 같이 다닐 때만 목도리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멋부리다가 얼어 죽는다, 진짜. 

 그럼 형이 매일매일 이렇게 목도리 해주면 되잖아요. 


 일부러 다른 말을 했는데 거기에 또 진심을 얘기하는 듯한 태섭 때문에 귀 끝이 뜨거워졌다. 굳이 말한 것이 분명한 매일매일이 콕 박혔다. 다른 걸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 다른 게 계속 생각났다. 매일 보고 싶어요. 같이 안 가는 이틀 동안 허전했어요. 제 마음인지 저 녀석 마음인지 모를 것이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취했다. 송태섭 취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같이 가요, 형. 나 추워요. 저 말에 성질이 났다. 야 너 저 말 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둔다고 그랬지. 태섭이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가만히 두지 말라는 듯이. 저걸 무시했다. 저러는 걸 보니 취한 게 분명했다. 믿고 싶은 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버스를 탔다. 다행히 2인 좌석이 남아 있었다. 대만은 태섭을 먼저 앉혔다. 별 거 안 했는데 힘들었다. 와. 짧은 숨을 뱉은 뒤 태섭을 쳐다봤다. 꼼지락 거리며 자세를 고치던 태섭이 숨을 길게 들이마시더니… 내쉬는 건 고개를 푹 숙이고 했다. 진짜 미친놈인 것 같았다. 그냥 봐도 술냄새 날까봐 하는 짓이었다. 진짜 안 취했나? 다시 의심을 했다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해서 저 의심을 접었다. 취했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제 어깨에 기대는 태섭을 모르는 척했다. 술버릇이 잠들기인가. 그럼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야.

 …….

 자냐?

 …….

 진짜 자?


 태섭은 말이 없었다. 일정하게 내뱉는 태섭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점점 더 내려가는 고개를 따라 내려가는 어깨가 아파질 때쯤, 조심스럽게 태섭의 얼굴을 붙잡아 올렸다. 그러자마자 태섭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편한 자세를 찾는 사람처럼. 대만은 눈도 안 깜빡이고 가만히 있었다. 태섭이 움직이는 동안 가만히 있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조금씩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더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아주 조금씩. 내쉬는 숨에서 술냄새가 났다. 눈만 굴려 태섭을 쳐다보았다. 푹 숙인 태섭의 머리만 보였다. 전역을 했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자랐다. 아까 만졌던 촉감이 떠올랐다. 꽤 좋았다. 복슬복슬한 것도 아니고, 까실한 것도 아닌. 뭔가, 송태섭 그 자체인 것 같은 느낌이 생생했다. 그래서 주변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담, 쓰담. 두 번 정도 쓰담은 뒤 손을 내렸다. 내린 손을 주머니 안으로 감추었다. 조금 땀이 났다. 이 새끼 야한 생각 자주 해서 머리카락이 빨리 긴 건 아니겠지. 태섭이 제 오른쪽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해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와. 내일 출근 큰일났다.

 …….

 근데 버스 되게 빨리 가는 것 같다. 이틀은 엄청 길게 느껴졌는데.

 …….

 벌써 거의 다 왔어. 슬슬 일어나야 되는데.

 …….

 …사실은 알아. 시간이 빨리 가는 거라는 거. 

 …….

 나 바보 아니야. 나도 알아, 이 멍청아. 그런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을 뜬 태섭을 보지 못한 것도, 천만 다행이었다.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면 아마도, 태섭이 참고 또 참은 말을 들었을 지도 몰랐다.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요. 내가 듣지 못하는 말이 뭔지 전부 다 알고 싶어요. 정리되지 않은 말이라도 좋으니까 얼른 말해줘요. 빨리 말해주지 않으면 형을 좋아하는 만큼 미워질 것 같아요. 그런 만큼 더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러기 싫어요. 아니. 그래도 돼요. 더 좋아해도 돼요. 형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이미 많이 좋아해도, 더 많이 좋아할 수 있어요. 계속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형이 달라고 한 시간 때문에 멈춘 내 시간을 좀 봐줘요. 형이랑 같이 있어도 느린 내 시간을 봐줘요. 나 좀 생각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