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비밀번호는 정말, 123456 이었다.
대만은 아라와 같이 구구절절 내뱉었던 너무 쉬운 비밀번호의 위험성에 대한 잔소리를 다시 하려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는 태섭 때문에 미국에서는 이런 문화 아니지 않냐는 질문을 했다. 미국 유학 시절까지 생각하면 20살 때부터 있었던 것이니 이제는 그 나라의 문화가 더 자연스러울 텐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죠. 질문에 대한 목소리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분명했다.
말한 적 있죠? 미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놀란 게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는 거였다고.
취했으니 데려다 달라고 말했을 때와 똑같아서 조금 배알이 꼴렸지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한다는 말이 편하게 앉으라는 말이어서 더 그랬다.
적응 못 해서 미국에 있는 집에서도 이러고 지내요.
진짜? 다들 놀라지 않냐?
내가 놀란 것도 있으니 이해하라고 그랬어요.
태섭이 얼음이 든 물잔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대만은 티브이 테이블에 걸터 앉는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집이 워낙 넓어서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멀게 느껴졌다.
너, 안 취했지.
오면서 다 깼어요.
처음부터 안 취했잖아.
형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해요.
대만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미간이 구겨지는 찰나에 생긴 침묵은 짧았으나, 어떤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게끔 하는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송태섭.
네.
이름을 부르면 바로 대답하는 시간은 어느 때에는 아주 길었지만,
진짜 무슨 일 있냐?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 날이 19살. 태섭과 함께 농구를 하던 날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느새 30살이 된 송태섭이 눈 앞에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은, 그런.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변한 것이 분명한 태섭을 목도하는 동안의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어깨를 으쓱이며 긴 숨을 뱉는 태섭의 반응은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온 것임에도.
너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잖아.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버리잖아.
제 몫의 물을 마신 태섭이 잔을 옆에 둔 뒤, 깍지를 낀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 상태로 오랫동안 기지개를 켰다. 무언가를 털어내고 싶은 것처럼 천천히, 호흡을 뱉으면서.
20살이 됐을 때는, 무서웠던 것 같아요. 미국에 가게 되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근데 미국에 갔더니, 무섭다는 건 배가 부른 감정이었어요. 살아 남아야 했거든요. 언어든, 생활이든, 뭐든. 무섭다는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
…….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
이 상태로 30살이 됐을 때, 이상했던 것 같아요. 사라지지 않아서.
대만은 태섭의 호흡 뒤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물을 마셨다. 얼음이 가득 담겨 있어 차가운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목울대가 멈췄을 때서야 궁금한 걸 물었다. 그게 뭔데?
마음 같은 거요.
태섭이 눈을 깜빡였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그러니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같은 것들.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걸 그때 했더라면, 같은 거요.
송태섭, 그런 건,
후회. 맞죠, 형.
저도 모르게 호흡을 들이마신 대만은 헛웃음에 이 숨을 함께 뱉어버렸다.
어. 너랑 완전 안 어울리는 거.
형도 마찬가지잖아요. 그 날 이후로 없는 거잖아요, 그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짧게 터진 웃음은 큰 소리로 바뀌었고, 집에 술 없냐는 소리와 함께, 태섭이 위스키를 꺼내왔다. 이 술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한국에서는 비싼 술인데 이걸 마시네. 아라가 놀릴만 했네.
놀리는 게 틀림 없는 말에도 태섭은 발끈하지 않았다. 잔을 꺼내고, 냉장고에 있는 치즈와 나초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들이 모두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대만이 크게 웃었다. 이런 것도 미국 문화는 아니지 않냐고 물으며 터진 웃음이 거실 전체에 울려퍼졌다. 태섭은 말이 없었다. 그저, 대만을 빤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만약, 대만이 지금 이 순간 안 취한 거냐고 묻는다면, 취한 게 맞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변하지 않은 마음 같은 게, 정대만이 여전히 반짝이는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에이전시에 말했어요. 돌아가고 싶다고.
입 안에 든 술을 뱉는 정대만 역시 그래서, 정말 대책없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어도.
뭐, 뭐? 뭐어?!
말 그대로예요.
왜?!
말 그대로라고요.
아니, 이 미친, 야. 인마, 너.
놀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그래서,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만의 옆에 앉았다. 티슈로 입 주변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욕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커녕,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해서 도리어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컨디션 떨어졌냐? 아닐 텐데.
날아 다니죠. 선배들이 기사 공유 하잖아요.
더 할 수 있잖아.
네.
근데 왜? 그 후회라는 게 중요해? 그런 게 한창 전성기인 네 발목을 붙잡을 만큼?
태섭의 시선이 다시 대만에게로 움직였다. 그 시선을 고정했다. 찰나라도 사라진 대만을 보기 싫어서 눈도 깜빡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마음 같은 것이 사라지지 않을 동안, 무수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대만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대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반짝였다는 것을, 태섭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대만은 알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게 도대체 뭐라고 이러는데? 네 결정이긴 한데, 하….
대만은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태섭이 처음 NBA에 진출했을 때, 태섭에게 쏟아진 찬사와 그 속에 감춘 회의감과 조롱 같은 것을 대만은 알고 있었다. 그걸 보면 화가 났다. 당신들이 뭘 알아. 송태섭에 대해서 뭘 아는데. 걘 그런 애가 아니야. 비난을 쏟아내고 싶을 때마다 태섭을 응원했다. 연락했고, 북돋아주었다. 성태섭의 성공이 정대만이 이룬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기뻐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해주고 싶어서. 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에이전시에서 했던 소리 형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왜?!
형이잖아요.
대만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는 걸 알았을 때, 태섭이 가까이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태섭은 편안해보였다. 이 생각과 결정을 후회 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내가 형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거든 이 새끼야?
뭐가요?
몰라. 몰라! 그거랑 나랑 휴가를 보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태섭이 웃었다. 양 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이 웃음이, 무엇을 말할지 알려주었다.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 안 할 거니까 대답해. 하라고, 웃지만 말고.
그래서, 제주도 언제 갈까요?
야!
어쩐지 뛰는 심장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